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DIY족 혹은 '덕후'들을 위한 맞춤 전시(?)

[취재파일] DIY족 혹은 '덕후'들을 위한 맞춤 전시(?)
커피, 봄베, 스웨터, 테니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에겐 아마 전혀 연관성 없어 보이는 단어들일 겁니다. 그러나 글을 쓰고 있는 제겐 꽤 밀접하게 연결된 단어들입니다. 이 단어들을 이어주는 고리는 DIY입니다.

커피를 좋아하는 저는 몇 년 전부터 이른바 '홈로스터'가 됐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꼴로 250g에서 300g 정도 생두를 직접 볶습니다. 커피뿐 아니라 탄산수도 좋아합니다. 작은 병으로 사 마시는 것으로는 감당이 안 돼서 아예 탄산수 제조기를 구입했습니다. 그런데 제조기를 사고 나니 이산화탄소 실린더를 업체에 택배로 보내서 다시 택배로 받는 충전 과정이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더군요. 그래서 아예 이산화탄소 봄베를 하나 구해 집에서 직접 실린더를 충전합니다.

겨울에는 취미로 뜨개질을 합니다. 원래는 학교 때 가사 시간에 배운 안뜨기 겉뜨기밖에 몰랐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 세이브더칠드런의 신생아 모자뜨기를 알게됐습니다. 돈이 아닌 노동을 기부한다는 취지가 좋아서 모자 몇 개를 뜨다 보니 뜨개질이 생각보다 재미있었습니다. 유튜브를 뒤져서 장갑에 도전하고, 다음엔 카디건에 도전하고, 그러다 보니 직접 뜬 스웨터로 서랍 하나가 꽉 차게 됐습니다.

직접 원두 볶고 탄산수 만들고 뜨개질 한다고 하면 제가 무슨 한국판 마샤 스튜어트를 꿈꾸는 사람인 줄 오해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까운 이들은 다 압니다. 제가 그런 살림꾼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걸 말입니다.

그렇다고 딱히 근검절약 알뜰형 인간이어서도 아닙니다. 이른바 DIY 족들은 다 아시겠지만, 대부분의 DIY는 대량생산, 대량소비 사회에서 대기업이 제공하는 규모의 경제를 여간해선 이길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물건들이 개인이 일일이 재료를 구해서 직접 만드는 것보다 완성품을 사는 게 더 쌉니다. 만드는 사람의 '인건비'와 '시간'을 포함하면 더더구나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취미로 테니스를 치는데 2년쯤 전에 스트링 머신을 샀습니다. 테니스 라켓에 줄을 매는 기계입니다. 동호인들은 보통 두어 달에 한 번쯤 줄을 바꿉니다. 줄값을 제외하면 줄 매주는 값은 1만 원쯤 합니다. 제가 구입한 머신은 말 그대로 로우엔드 모델인데, 그래도 이 머신으로 줄을 매서 본전을 뽑으려면 멀쩡한 줄을 수시로 끊고 새로 매도 몇 년은 열심히 써야 합니다. 계산기 두드려서는 도무지 수지가 안 맞는 일입니다. 이렇다 보니 스스로도 자주 'DIY'라고 써 놓고 이른바 '덕후질'이라고 읽게 됩니다. 적잖은 시간과 품이 들고 경제적으로도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일들을 굳이 직접 하는 이유가 논리적으로는 설명이 어려운 탓입니다.

그런데 오늘, 제 '덕후질' 뒤에 숨어 있는 저도 알지 못 했던 제 심리를 얼핏 알 것도 같아졌습니다. 아니, 그보다는 굳이 논리 앞에 주눅 들지 않아도 될 명분을 찾게 됐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시작하는 한 전시를 보고 온 덕분입니다. '사물학 2: 제작자들의 도시'라는 어려운 제목의 전시입니다.
취파

사실, 제목만 봐서는 도무지 무슨 내용인지 감이 안 잡혀서 안 가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다 혹시나 싶어서 가 봤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예상과 달리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던 제목과 달리 실제 전시는 절대 어렵지 않았습니다.

전시장엔 별의별 물건, '사물'들이 가득합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한 쪽 벽면 가득 여기저기 붙어 있는 신발들입니다. 모두 성수동 신발 거리에서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신발들 한가운데는 신발 공장들의 위치를 손으로 그린 가죽 지도가 붙어 있습니다. 각각의 신발들은 만들어진 공장까지 선으로 연결됩니다. '성수동 프로젝트'라는 작품입니다.

한 작가는 트랜지스터와 기초적인 IC회로를 이용해 아주 단순한 컴퓨터를 직접 만들었습니다. 작품 제목 역시 '손으로 만든 컴퓨터'입니다.

또 한 작가는 직접 토스터 만들기에 도전한 과정 전체를 영상으로 담았습니다. 매일 쓰는 가장 기본적인 도구를 직접 만들어 보겠다는 일념으로 광산을 찾아 구리와 철을 채취하는 게 시작입니다. 누가 봐도 무모하기 짝이 없는 '토스터 프로젝트'입니다.

또 다른 벽엔 '기술한국'을 만들기 위한 정부 정책과 그 성과들을 빼곡히 적어놓은 칠판도 있습니다. '제작연대기: 1967-2014'라는 작품입니다. 1967년은 '한강의 기적'을 이뤄낸 대한민국이 처음 기능올림픽에 출전한 해입니다.

이쯤 되면 전시 제목 속에 담긴 의미가 슬슬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사물학2: 제작자들의 도시'라는 제목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가, 우리가 이뤄낸 현대 문명이 머리 만이 아닌 손으로 뭔가를 만들어낸 '제작'의 결과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또, 주변을 가득 메운 흔한 사물 하나하나가 모두 노동과 '제작'의 숭고한 가치를 보여 준다는 뜻입니다.

전시 기획자는 이번 전시를 통해 '제작'에 담긴 세 가지 의미를 전달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세 가지 의미는 놀이, 노동, 사회운동입니다. 제작이라는 행위는 숭고한 노동이면서 그 자체로 즐거움을 주는 놀이이기도 하고 때로는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기도 한다는 의미입니다. 세 가지 의미 가운데 저는 특히 '놀이'라는 의미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저 뭐든 직접 하는 게 좋고, 특히 손으로 뭘 만드는 게 좋아서 하는 제 '덕후질'에 충분한 명분이 생긴 것 같아서 말입니다.

사실, 실제로 해 보면 내 손으로 직접 뭔가를 만드는 노동은 참 재미있고 즐겁습니다. 그런데 충분히 즐겁고 마땅히 즐거워야 할 제작과 노동이 언제부터인가 별 볼 일 없는 일로, 엉뚱한 짓으로 취급받기 시작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가 있지만 주로 돈이 덜 된다는 이유입니다.

돈 안되는 '덕후질'에 빠져 있는 저는 감히, 세상이 삭막해지고 사는 게 머리 아파진 건 손으로 하는 노동과 '제작'이 싸구려 취급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생각합니다. 동의하신다면 소개해 드린 전시장에 한 번 가 보시길 권합니다. 재미있으실 겁니다. 동의하지 않으신다면, 역시 소개해 드린 전시장에 한 번 가 보시길 권합니다. 제 생각에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드실 수도 있습니다. ^^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