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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좀비'와 '뱀파이어'…당신은 어느 쪽인가요?

[취재파일] '좀비'와 '뱀파이어'…당신은 어느 쪽인가요?
보도국 문화과학부에 속해 있는 저의 담당 분야는 방송통신, IT입니다. 넓게 보면 게임도 맡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요, 사실 저는 게임을 잘하지는 못해도 무척 좋아합니다. 그중에서도 저의 취향을 '저격'하는 분야는 1인칭 슈팅게임(First Person Shooting, 줄여서 FPS)인데요, 유독 이 장르를 좋아하게 된 것은 제가 대학 복학생 시절이던 2000년 무렵 친구들과 PC방에서 종종 밤을 새우며 게임을 하던 시절의 아픈 기억 때문입니다.

기억하시는 분들도 많이 계시겠지만, 당시 모든 PC방을 주름잡던 게임은 '스타크래프트'였습니다. 둘씩 넷씩 편을 갈라 게임을 시작하면 늘 먼저 공격당해 죽는('스타' 용어로는 'eliminated'라고 하죠) 건 저였습니다. 뭐가 문제인 건지, 나름 혼자서 연습도 해 봤지만, 친구들의 빠른 손놀림과 전략을 당최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취파

그러다 보니 게임과 게임 사이 뭔가 '딴짓'을 해야 했는데, 그때 시작한 게 '언리얼 토너먼트(Unreal Tournament)'와 '퀘이크(Quake)', '레인보우 식스(Rainbow Six)' 같은 FPS 장르였습니다. 진행 속도가 빠르고, 죽고 나도 바로 다시 살아나고(reset), 거기에 스타크래프트 패배의 스트레스를 총질(?)을 하면서 해소할 수 있어서 저에게는 그만인 장르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는 아예 PC 방에 가면 친구들은 스타크래프트를 하게 내버려 두고 저는 그냥 FPS 게임을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 뒤 기자가 되고 나서는 좀처럼 게임을 마음껏 즐기지 못했습니다. 저도 직장인인 만큼 쉬는 날은 있었지만, 왠지 게임에 대한 애착이 조금 옅어졌기 때문에 선뜻 PC 앞에 '게임을 하기 위해' 서는 앉지 못했습니다. 아주 가끔 다른 기사나 보도자료 등으로 새로운 FPS 게임이 나왔다고 하면 인터넷으로 주문해 '맛보기' 정도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콜 오브 듀티(Call of Duty)'나 '메달 오브 아너(Medal of Honor)', '배틀필드(Battlefield)' 시리즈를 잠깐잠깐 거쳤고, 가장 최근에는 '타이탄 폴(Titan Fall)' 정도가 전부입니다. 깊지는 않아도 그럭저럭 이어온 취미 정도가 되겠네요. 

그러다가 얼마 전 콘솔 게임기에 '지름신'이 꽂혔습니다. 물론 그전에도 어쩐지 '없으면 서운할 것 같아서' 플레이스테이션 2도 구매했었고, 엑스박스 360을 들여놓기도 했었는데요, 실로 오래간만에 콘솔 게임기로 FPS를 해 보고 싶어져서 지난해 말 크리스마스 선물을 핑계 삼아 플레이스테이션 4를 집으로 모셔(?) 왔습니다. 함께 사 온 첫 게임은 이미 플레이스테이션 3 시절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던 '라스트 오브 어스(The Last of us) 리마스터링'이었고, 주말에 시간을 조금씩 낸 결과 며칠 전 엔딩을 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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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읽어 주신 분들은 게임을, 혹은 범위를 좁혀서 FPS 장르를 좋아하시거나, 어느 정도 알고 계신 독자들이실 것 같습니다. 아직 '라스트 오브 어스'를 플레이하지 못한 분들을 위해 스포일러는 자제하도록 하겠습니다.

스포일러를 쏙 빼고 간단히 말하면 이 게임은 두 주인공 캐릭터의 고군분투 생존기로 요약되는데, 이들을 끊임없이 위협하는 존재는 바로 '좀비'입니다. 물론 '인간 대 좀비'의 단순한 이분법적 대립구도는 아니고 훨씬 복잡합니다. 좀비는 일단 적으로 보면 되지만, 반대로 인간이라고 모두 주인공의 편은 아니기 때문이죠. 아무튼, 이 게임은 현재 할리우드에서 영화화가 실제로 진행되고 있을 정도로 빼어난 이야기 구조와 이야기를 둘러싸고 있는 음울한 분위기와 사실적인 배경 묘사로 많은 게이머의 찬사를 받은 '잘 만든 게임'입니다. 저 역시 엔딩 화면이 끝나고 제작자들의 이름이 담긴 엔딩 크레디트(ending credit)가 모두 올라간 뒤에도 한동안 먹먹해서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미국 터프츠 대학에서 국제정치학 강의를 하는 다니엘 드레즈너(Daniel W. Drezner) 교수가 2010년에 쓴 '국제정치이론과 좀비(Theories of International Politics and Zombie)'라는 책이 있습니다. 국내에는 2013년에 출간됐는데요, 현실의 문제인 국제정치와 허구의 영역에 속하는 좀비가 같은 책에 등장하는 게 좀 의아하지만, 이 안에는 드레즈너 교수의 재미있는 이론이 담겨 있습니다. 소개해드리기 전에 간단한 용어 정리를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좀비(Zombie) : 이동하면서 인간을 공격하는 시체
뱀파이어(Vampire) : 인간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인간의 피를 빠는 초자연적 존재


드레즈너 교수의 이론은 이렇습니다. 

"미국에서 민주당이 집권한 시기에는 뱀파이어 콘텐츠가 유행하고 공화당이 집권한 시기에는 좀비 콘텐츠가 유행한다. 공화당은 성적 방종과 외국인을 상징하는 뱀파이어를 두려워하고, 민주당은 각각의 개성이 지워지고 무조건 집단에 동화되는 좀비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얘기지만, 집권당의 성향에 따라 상대방을 상징하는 허구의 존재를 '때려잡는' 콘텐츠가 주목받는다는 건데요, 다시 말하면 공화당원은 민주당원을 '외국에 관대하고 성적으로 문란한 존재'로 보고 싫어하고, 반대로 민주당원은 공화당원을 '개성 없이 집단으로 행동하는 생각(두뇌) 없는 존재'로 보고 한심하게 여긴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드레즈너 교수의 이 당돌한(?) 이론은 미국 현지에서도 많은 반박을 받은 것 같습니다. 당장 민주당 정권(오바마 대통령)인 지금만 보더라도, 이론대로라면 뱀파이어들이 고생을 하는 콘텐츠가 많아야 하는데, 사실은 '좀비 콘텐츠'가 엄청나게 유행하고 있죠. 현재 시즌 5가 방송되고 있는 드라마 시리즈 '워킹 데드(The Walking Dead)'가 대표적입니다.

물론 오바마 정권이 재선을 지나면서 특히 내정보다는 외교 분야에서 정치 성향상 중도에 가까운 우측까지 아우르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때문에 민주당 지지자들도 일방적으로 뱀파이어(즉 공화당원)를 '박멸'하는 콘텐츠는 자제하고 있다는 분석도 가능합니다.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공화당이 혹시 집권하게 되면 그 반대도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콘텐츠는 그런 '정치 성향'을 뛰어넘어 '잘 나가는 것이 잘 나가는' 것이라는, 즉 정치적으로 초월적(?)인 존재라는 '대통합 이론'도 가능하겠죠. 저는 오히려 이 쪽이 맞는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좀비와 뱀파이어는 미국에서는 이렇게 정치적으로도 분석되고 있는 흥미로운 콘텐츠입니다. 우리나라도 예를 들어 '도깨비'와 '귀신'이 이런 식으로 분석하는 날이 올까요? 우리 고유의 콘텐츠도 내재된 파괴력은 만만치 않을 텐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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