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심리적 외상'에 대한 이해 없는 재난 보도는 이제 그만!

"세월호" 사건, 미디어가 '심리적 외상'에 관심갖는 전환점 되다

[취재파일] '심리적 외상'에 대한 이해 없는 재난 보도는 이제 그만!
지난 금요일 방송회관에서 한국방송학회와 방송기자연합회 주최로 ‘재난보도와 트라우마’라는 제목의 세미나가 열렸습니다. 국내 미디어 학계에서 ‘심리적 외상(트라우마)’ 과 관련해 열린 첫 공식 세미나였습니다. 직접적으로는 숙명여대 미디어학부의 이미나 교수와 배정근 교수, 그리고 아동복지학부의 하은혜 교수가 ‘세월호’ 참사를 취재한 기자 367명에 대한 ‘심리적 외상’ 서베이한 것이 계기가 되었지만 사회를 본 서울대 언론정보학과의 양승목 교수조차도 국내 저널리즘 학계에서 이제껏 한번도 보지 못했던 주제라면서, 미디어 학계에서 ‘심리적 외상’까지 고려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기자 중에서는 제가 유일하게 발제자로 참여해 심리적 외상 피해 취재원을 취재한 경험을 공유했습니다. 
세미나

제가 ‘심리적 외상’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4년차였던 1999년, 여기자로서는 처음으로 ‘뉴스추적’이라는 시사고발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부터였습니다. 재난 보도도 그렇지만 ‘뉴스추적’ 같은 탐사보도의 경우에는 보통 특정 사건, 사고의 피해자나 피해자의 가족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회의 구조적 문제, 부조리, 병폐 등 사회문제를 제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보도에서보다도 마음이 아픈, 심리적 외상을 입은 사람들이 중요한 취재원일 수 밖에 없습니다. 또 뉴스와는 다르게 탐사보도의 경우에는 대개 몇 시간, 혹은 몇 일도 만나기 때문에 취재진의 입장에서도 그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제가 ‘심리적 외상’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2001년 성폭행을 당한 8살 여자아이에 대해 취재하면서부터였습니다. 형사 미성년 문제였습니다. 찾아가보니 아이는 방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검은 크레파스로 스케치북을 칠해나가는데 언뜻 보아도 도움이 필요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프로그램은 프로그램대로 취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아이를 도와줄 수 있는 병원을 수소문해, 가족의 동의 아래 아이를 입원시켰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날 가족들이 그 아이를 병원에서 빼갔습니다. 정신과에 대한 편견 때문에 가족들이 아이의 치료를 거부한 것이었습니다.

그 사건이 저에게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처음으로 그 동안 내가 취재하던 사건, 사고의 피해자들이 겪고 있는 ‘심리적 외상’에 대해 과연 저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기자의 역할은 피해경험 취재원의 이야기를 통해 사회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지만 정말 어려운 시기에, 어렵게 자기 이야기를 공유해준 사람에게 작은 도움조차 주지 못한다면 내 프로그램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회의에 빠졌습니다. 이후 보도국의 다른 부서로 가게 되었을 때 야간대학원을 다니면서 ‘트라우마와 저널리즘’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국내 미디어 학계에서는 심리적 외상과 연계돼 연구한 논문이 한 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심리학과 교수들을 찾아가 혹시 상담심리에서 사용하는 틀 중에 차용할 수 있는 것은 없는지, 또 해바라기아동센터를 찾아가 혹시 성폭력 피해자들을 상담할 때 해서는 안 되는 질문이나, 도움이 되는 질문 방식은 혹시 없는지 등을 물었습니다. 그리고 심리적 외상의 증상은 무엇인지, 증상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무엇인지, 또 언론의 취재관행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무엇인지 등을 찾아보면서, 취재경험이 있는 심리적 외상 취재원들에게 취재관행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습니다.

1999년에서 2003년까지 만4년간 제가 뉴스추적을 통해 제작한 프로그램은 모두 62편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심리적 외상을 입었던 것으로 보이는 취재원들의 프로그램을 추려보니 20편 정도 됐습니다. 제가 석사 논문을 쓸 당시가 2009년이었으니까 길게는 10년, 짧게는 6년이 지난 후였는데, 그때까지 연락처가 바뀌지 않은 사람들 중에 조심스럽게 다시 연락해, 언론과의 취재 경험에 대해 이야기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당시 왜 제보했는지, 혹은 왜 인터뷰에 응했는지, 취재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는지, 방송 이후 달라진 것은 없었는지, 취재진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없는지 등 이번에는 저에게 조언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심층인터뷰를 허락해준 사람은 모두 10명. 그들이 전해준 귀한 경험담을 통해 저는 기자가 취재를 어떻게 하고 보도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지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증언과 그 동안에 공부한 내용을 토대로 ‘심리적 외상’을 입은 취재원을 탐사보도 할 때의 단계별 가이드라인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5년이 지난 지난 금요일, 방송학회와 방송기자연합회 세미나 때 공식적으로는 처음으로 학계에 그 가이드라인을 발표할 수 있었습니다. (자세한 가이드 라인 내용은 다음 편에서 전해드리겠습니다)

‘저널리즘과 트라우마’ 는 미국에서 1990년대, 기자 출신 교수들이 뉴스에서 ‘심리적 외상’을 가진 취재원을 어떻게 취재해야 하나 하는 윤리적인 관점에서 관심을 가졌던 것이 그 시초였습니다. 하지만 정작 미국에서 조차 ‘심리적 외상’이 미디어학계의 큰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9.11테러’ 였습니다. 그 전까지는 종군기자 정도는 되어야 ‘심리적 외상’에 대해 얘기할 수 있다 여겼는데 9.11테러 현장을 취재한 많은 기자들이 심리적 외상을 호소하면서, 상대적으로 ‘심리적 외상’을 입은 피해경험 취재원에 대한 관심도 같이 높아졌습니다. 심지어 시청자들의 심리적 외상에 대한 관심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미국에서는 ‘9.11테러’가 미디어 계의 ‘심리적 외상’ 과 관련한 전환점이 됐다면, 국내에서는 ‘세월호’ 참사가 그 전환점이 되고 있습니다. 
   
‘세월호’ 사건이 나고 얼마 안돼, 미국에서 ‘저널리즘과 트라우마’에 대해 연구하는 컬럼비아 대학 부설의 비영리 단체 ‘다트센터’에서 ‘세월호’ 관련 글을 하나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세월호'사건은 심리적 외상의 관점에서 봐도 너무나 쉽지 않은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보통 자연재해가 아닌 인재의 경우 피해자나 생존자가 자신이 특정됐다고 느끼거나 자신의 잘못으로 발생하다는 죄책감에 시달릴 확률이 높은데 세월호 사건은 인재였습니다. 또 심리적 외상을 입었을 때의 나이가 18세 이하인 경우 '세상은 안전하지 않다'. '어른들이 나를 보호해주지 못했다'는 부정적인 인식때문에 회복이 더 어려울 수 있는데 이번 사건은 18세 이하의 학생들이 주 희생자이며 생존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취재기자들의 입장에서는 '심리적 외상에 대한 이해가 있다고 하더라도 쉽지 않았을 것이며 분명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될 수 있는 다른 기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그 부탁을 계기로 당시 ‘세월호’ 사건을 취재한 기자 10명에게 어렵게 얘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5년차 이하의 주니어 기자들도 있었고 10년차 이상의 기자들도 있었지만 모두 이번 사건처럼 힘들었던 취재는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계속된 오보에, 죄책감에 시달리고, 자괴감을 느끼고 돌아와서도 악몽을 꾸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두 본인의 심리적 외상보다는 피해경험 취재원들이 자기들 때문에 안 겪어도 되는 아픔을 더 겪게 된 것에 대해 더 힘들어하고, 이 사건이 취재보도 관행의 변화의 계기가 되기를 강하게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공유해줘 다트센터에 기고했던, 세월호 사건 취재를 통해 뼈아프게 배운 교훈과 조언을 공유해드리겠습니다. (다트센터 기고문)

1) 특보 상황에서도 끝없이 의심하고 확인된 사실만 보도하라.

2) 재난재해보도, 위험 지역에 대한 취재 가이드 라인은 사전에 만들고 그 내용 중에 ‘심리적 외상’을 입은 취재원들을 어떻게 취재해야 하는지, 그리고 기자들이 입을 수 있는 ‘심리적 외상’ 에 대해서도 뭘 조심해야하는 지를 꼭 포함시켜달라

3) 피해자들에게 듣고 싶은 말만 묻지 말고, 그들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여달라. 그들의 주장이 타당한 지 탐사하라.

4) 피해자나 피해자 가족들이 심리적 외상을 입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최대한 조심하라. 그들의 슬픔을 악용하지 말라. 무리한 취재를 삼가하라. 그들이 슬퍼할 수 있게 놔둬라. 그들이 기자에게 적대적인 반응을 보일 수도 있음을 인지하라.

5) 감정 과잉을 유발하지 마라. 보도의 목적은 그 사안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과 해결책의 모색이지 분노의 유발이 아님을 잊지 마라. 시청자들도 심리적 외상을 입을 수 있음을 기억하라.

6) 직접적인 영상을 사용하지 않고도 충분히 슬픔을 전달할 수 있음을 인지하라. 심리적 외상을 입은 사람들을 배려하면서도 사안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하라.
(SBS 8뉴스 '슬픈 등굣길')
(CNN의 세월호 보도 영상)


7) 심적 외상을 입을 수 있는 현장을 취재하는 기자들끼리는 서로를 챙겨야 한다. 괜찮은지, 너무 힘들지 않은지, 그리고 데스크도 아이템만 챙기지 말고 취재기자들의 상태는 어떤지, 감정적인 상태까지 살펴야 한다. 심리적 외상은 한번 겪었다고 다음에 면역이 생기는 게 아니라 매번 새로운 외상을 입는 것이기 때문에 같은 기자가 계속 심리적 외상을 입을 수 있는 사건을 취재하고 있지는 않은지 등을 모니터 하라. 또 취재 후 비슷한 경험의 다른 동료들과 겪은 일에 대한 디브리핑 시간을 가져라.

8) 심리적 외상 피해 경험 취재원을 취재하는 것까지 경쟁하지 말자. 가능하면 심리적 외상 피해경험 취재원의 취재는 풀 단을 구성하라.

9) 미디어 빅뱅시대에는 인터뷰의 길이를 매체에 따라 다르게 활용할 수 있음을 인지하라. 방송에서는 사실 확인된 내용 위주로 짧게 쓸 수 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사이트에는 전체를 올려 정말로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가서 볼 수 있게 할 수도 있음을 생각하라. 그렇게 할 경우 취재원도 자신의 이야기가 존중 받고 제대로 전달되었다고 느낄 수 있다.

10) 세월호 사건 취재 때처럼 의도와 다르게 본의 아니게 피해자들에게 더 큰 피해를 입혔다면 진심으로 사과하라. 당장에 그들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더라도 조금씩 신뢰를 되찾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우리의 취재보도 관행은 이제 바뀌어야 하고 보완되어야 합니다. ‘삼풍 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 때부터 만들어야 한다고 외쳤던 위험지역, 재난재해 보도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이제는 정말로 만들어야 하고, 사전에 그에 대한 교육과 대비가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심리적 외상’을 입은 취재원에 대한 이해와 기자의 ‘심리적 외상’에 대한 이해가 가이드라인 안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개인적으로 더 건강하고 배려심 있는 언론인이 될 수 있고, 취재원의 심리적 외상을 더 악화시키지 않을 수 있으며, 취재원에 대한 이해를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더 잘 이끌어냄으로써 그 사건, 사고에 대해 제대로 문제를 제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언론인으로서, 또 언론사로서 신뢰를 구축하는, 다시 신뢰를 쌓아가는 발판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지난 주에 방송학회와 방송기자연합회 주최로 열렸던 ‘재난보도와 트라우마’ 의 세미나가 굉장히 반가우며, 아직 갈 길은 멀지만, 미디어 계가 ‘심리적 외상’에 대한 연구의 첫 걸음을 떼었다는데 큰 용기와 응원을 보냅니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