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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소리 내어 읽는다"…'낭독'의 매력

[취재파일] "소리 내어 읽는다"…'낭독'의 매력
*장면1. 
 
“오늘이 몇 일이지? 3일? 그럼 출석번호 3번 일어나 첫 페이지 읽어보자. 다음은 13번, 23번, 33번, 43번이 읽고.” 요즘 학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 또래라면 익숙할 풍경이다. 국어시간, 그 날짜 출석번호대로 책을 읽는 광경.


*장면2.
 
 퇴근하고 집에 가면 빼먹을 수 없는 일과가 있다. ‘책 읽어주기’. 다섯 살 딸아이가 들고 오는 책을 읽어주다 보면, 신기하게 내용이 오래 기억된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어느 날, 너무 피곤해 나는 침대에 널부러지고, 친정엄마가 나 대신 책을 읽어주시는데, 오랜만에 ‘독자’에서 ‘청자’가 돼 들어보는 이야기가 여간 감칠맛나는 게 아니다. ‘아, 남이 읽어주는 걸 듣는 게 왜 이리 좋지.’


*장면3.
 
 작가와 출판사들이 잇따라 내놓고 있는 ‘팟캐스트’에 대한 기사를 쓰려고 하루 종일 팟캐스트를 듣던 올해 초 어느 날, ‘문학동네 채널1’에 게스트로 출연한 소설가 김영하씨의 얘기가 귀에 꽂혔다. (김영하씨는 책 팟캐스트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책 읽는 시간’이라는 팟캐스트를 운영하고 있다.) 내용은 옮기면 다음과 같다.

"저는 늘 그 전부터 책을 읽는 것에 대해서 좀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낭독을 제가 하는 거잖아요, 책을. 그런데 이것도 독서의 한 방법이잖아요. 우리가 보통 이제는 묵독이 일반화돼서 사람들이 눈으로 책을 읽는 것이 너무 당연하게 생각되지만, 몇 백 년 전만해도 눈으로, 말 없이 소리 내지 않고 책 읽는 것을 보고, 중세 사람들은 악마를 봤다고도 이야기했다고 해요. 너무나도 무서운 광경을 봤다. 그건 뭔가 은밀한 것, 남에게 말할 수 없는 금지된 것을 읽고 있는 것을 봤다고 생각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만일 홍대 앞 카페에서 누가 소리 내 책을 읽고 있으면 사람들이 다 또 미쳤다고 그러겠죠. 그런데 저도 묵독을 오래 해오다 보니까 좋은 점도 있지만 좀 관습화된 독서 같기도 했던 거예요. 그리고 너무 빨리 읽고요. 그래서 제가 좀 좋아했던 책을 한 번 천천히 읽어보자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래서 낭독하면 천천히 읽게 되잖아요…또 인류의 역사에서도 낭독이 더 오래된 것이고, 개인의 역사에서도 낭독은 어렸을 때 다 했던 것이잖아요. 어렸을 때 학교에서 소리 내어 읽어보기도 했고, 엄마 아빠가 읽어주는 동화 같은 걸 들으면서 잤던 경험이 있잖아요. 어쩌면 원초적으로 우리에게 낭독이 내면화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해서, (팟캐스트를) 시작했어요. "


 그랬다, 내가 읽을 땐 그냥 휘리릭 넘기며 봤던 책도 팟캐스트에서 천천히 읽어주는 걸 들으면, 마치 처음 보는 책인 듯 새로웠다.


*장면 4.

 “월요일 저녁 7시쯤 신촌 책다방으로 오세요.”
그래서 ‘낭독의 매력’에 대한 기사를 쓰기로 하고 낭독모임 ‘북코러스’ 회원들을 만나러 갔다. 약속한 시간에 카메라 기자와 신촌 기차역 근처 ‘문학다방 봄봄’에 도착했다. 해가 지자 회원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제일 처음 도착한 사람은 할리 데이비슨을 타고 나타난 백발 성성한 노신사. (나중에 인터뷰를 하고 보니 나이가 예순 일곱.) 이어서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연령의 회원 10여명이 도착했다.

 이들이 펼쳐든 책은 ‘생각에 관한 생각’ 이라는 5백페이지가 넘는 행동경제학과 인지심리학 서적. 이들은 이렇게 ‘두껍고 어려운’ 책을 ‘모여서 낭독’한다. 혼자 읽으면 책장 쉽게 안 넘어가고, 5분의 1쯤 읽다가 그냥 덮어버리기 제격이지만, 여럿이 모여서 한 장씩 돌아가며 읽다 보면 어느새 다 읽게 된다고 한다. 낭독 모임 ‘북코러스’는 지난 4년 7개월동안 그렇게 18권을 읽었다. ‘내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으로 가볍게 시작해, ‘화폐전쟁’과 ‘부의 미래’ ‘권력 이동’, ‘총,균,쇠’, ‘월든’, ‘서양 미술사’, ‘코스모스’, ‘신화의 이미지’ 등이다.
 
흔히 ‘독서모임’이라고 하면, 집에서 책을 미리 읽고, 모여서 토론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들은 그냥 책을 들고 만난다. 그리고 소리 내어 읽는다. 그게 전부다.

 “처음에는 부담이 없어서 좋았어요. 그냥 책을 들고 와서 같이 읽으면 되잖아요. 소리 내서 읽으니까 자기 소리도 듣고, 남들 읽는 소리도 들으니까, 저는 약간 주술적인 힘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려운 내용이 쉽게 각인이 돼요.”
(‘북코러스’ 회원 윤태웅)

 “처음에는 저도, 집에서 읽으면 되고, 묵독하면 되지, 뭣하러 여기 나와서 읽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하고 처음엔 잘 안나왔어요. 드문드문 나올 때는 책 한 권을 제대로 못 읽었어요. 그러데 어려운 책에 도전한다는 도전의식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작정했어요. 당시에 ‘신화의 이미지’라는 책을 읽었는데, 4개월 동안 완독했습니다. 낭독으로요. 마침 그 책을 읽은 뒤 앙코르와트를 여행하게 됐는데, 책에서 읽었던 것들, 신화적 이미지가 거기에 낱낱이 있어서 굉장히 마음에 와닿고, 이해가 됐어요…아이 키우고 육아 하고, 가정 살림하면서 책을 읽어도 잘 읽혀지지가 않고, 감정적인 것들을 많이 읽는가 그럴까, 오히려 저보다는 아이에게 읽힐 책을 많이 찾으러 다녔어요. 그러다 보니, ‘도대체 나는 읽은 게 뭔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북코러스’ 회원 이희복)

 “낭독을 시작한 뒤로, 신문도 낭독하고, 보는 것마다 자꾸 낭독으로 읽으려고 하는 것 같아요. 습관이죠. 자꾸 오다 보니까 이것도 중독인 것 같아요.”
(‘북코러스’ 회원 김승수)

 ‘북 코러스’를 제안해 이끌어 오고 있는 김보경씨는 올 초 ‘낭독은 입문학이다’는 제목의 책도 냈다. 김씨는 낭독의 매력으로 ‘쉽게 시작할 수 있고’, ‘내용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고’, ‘기억에, 마음에 오래 남는 것’을 꼽는다.

 “두꺼운 책은 어렵다는 선입견이 있는데, 선입견을 조금 떨치고, 한 번 소리내 읽다 보면 이상하게 내가 이런 내용을 예전에 접하지 않았는가 싶을 정도로, 기억 속에 들어와 박히는 면이 있습니다. 한 번 재미 삼아라도 한 번 낭독해보시면 ‘쉽다’고 하는 그 말 뜻을 직접 몸으로 느끼실 것 같아요. 또 일단 낭독을 하게 되면 자기 목소리를 계속해서 뿜어내요. 그 과정에서 계속해서 자기 다짐을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자기가 읽는 텍스트하고 어떤 약속 같은 걸 하게 되는 거죠. 이건, 책이 아니라 교과서나 연애편지도 마찬가집니다.
소리 내어 한 번 읽어보면 효과가 다릅니다.”
(‘북코러스’회장 겸 ‘낭독은 입문학이다’ 저자 김보경)

 김보경씨가 인터뷰에서 했던 이 말은 그의 책 ‘낭독은 입문학이다’에 더 자세히 쓰여 있다.

 “소리를 내어 글을 읽는 행위는 책 속에 갇혀 있던 활자를 일으켜 세워 공간 속으로 뛰어들게 한다. 소리가 만들어내는 입체성은 다양한 모습과 역할로 읽는 사람에게 다가간다. 그것은 단어 하나의 의미에서부터 단락과 단락 사이의 맥락에 이르기까지 긴 호흡으로 깊이 있는 독서가 되도록 돕는 안내자와도 같다.” (‘낭독은 입문학이다’ 김보경 )


*낭독, 한 번 해볼까?
 
이쯤 되면, 귀가 솔깃하다. 책만 들면 딴생각이 끼어들고, 한참 읽고 났는데, 내가 뭘 읽었더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다면, 몇 페이지라도 좋으니 일단 한 번 읽어볼까 싶다. 집에서 혼자 읽는 거라면, 길지 않아 부담이 없고 낭독에 ‘딱’인 시집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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