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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인자한 바다' 이해인 수녀 시전집 출간

[취재파일] '인자한 바다' 이해인 수녀 시전집 출간
* ‘소금 같은 시’ 쓰는 ‘인자한 바다’, 이해인 수녀

     수녀님은 도착하자마자 꾸러미를 하나 꺼내 들었습니다. 안에선 예쁜 꽃을 그린 조개껍데기가 나옵니다. 바닷가 수녀원에 사시는 수녀님은, 바다의 선물을 주고 싶어 작은 조개껍데기 선물을 서울까지 챙겨왔다고 하십니다. 수녀님의 시 전집 출간 기자간담회는 그렇게 모두가 예상치 못했던 조개껍데기 하나씩을 받아 들고 시작됐습니다.

     수녀님은 ‘이명숙’이란 본명보다 ‘해인’이란 필명으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40년 전 처음 시를 쓰며, ‘바다 해’자와 공자의 인 사상을 생각하게 하는 ‘어질 인’자를 합쳐 만든 ‘해인’이라는 필명은 이제 전국민이 아는 이름이 됐습니다. 그 이름 석자 ‘이해인’을 내건 시전집 두 권이 나왔습니다. 권 당 8백 페이지가 넘는 상당한 두께입니다. 이번 전집에는 그동안 펴낸 시집 가운데 기도시집과 동시집을 뺀 10권이 담겼습니다.  문학사상사가 내년 지령 500호를 앞두고, 상징적인 출판을 생각하다 이해인 수녀님의 시전집을 간행하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작은 소망
         - 이해인

내가 죽기 전
한 톨의 소금 같은 시를 써서
누군가의 마음을 하얗게 만들 수 있을까
한 톨의 시가 세상을 다 구원하진 못해도
사나운 눈길을 순하게 만드는
작은 기도는 될 수 있겠지
힘들 때 잠시 웃음을 찾는
작은 위로는 될 수 있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여
맛있는 소금 한 톨 찾는 중이네



     ‘한 톨의 소금 같은 시’를 쓰고 싶다는 수녀님, 그녀의 시는 쉬운 말로 읽는 사람의 마음을 쓰다듬어줍니다. 전 힘든 일이 있어 마음이 땅 속으로 꺼지는 것처럼 괴로울 때면 수녀님의 시를 읽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포근한 담요를 덮은 것처럼 따뜻해지는 느낌이 듭니다.

    권영민 문학사상 주간은 “지난 40여년동안의 시의 역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가져, 문학 연구자로서 가슴 설레는 경험이었다”며, “다만 아쉬운 것은, 우리 문단이 매우 좁아서, 한국 문학사 전체에서 이해인 수녀님의 시가 차지하는 위상이나 비중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를 제대로 못했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수녀님은 친숙한 언어와 깊은 서정성, 이 두 가지에 있어서 누구도 따르기 어려운 경지에 이른 분"이라고 평했습니다.

     이해인 수녀님은 “단 한 번도 훌륭한 시인이라거나 문학적 평가를 받을 문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전집 출판 제의를 받고 당혹스러웠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난 기간 오랫동안 독자들에게 이렇게 사랑받은 시인이 또 있을까 싶을만큼 사랑받았고, 독자들에게 받은 사랑을 돌려주려면 더 사랑하고 희생적인 봉사의 삶을 살아야겠구나. 큰 일은 하지 못해도, 기쁨 천사, 위로 천사의 역할을 할 수 있겠구나, 시 한 톨로 기쁨을 줄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대장암은 완치?

     지난 2008년 7월에 대장암 수술을 받은 수녀님은, 아직 완치 판정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더욱이 같은 해에 수술을 받은 작가 최인호씨가 돌아가셨을 땐, 슬픔을 주체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앞서 법정스님과 김수환 추기경, 장영희 교수, 김점선 화백 등 가까운 사람들이 모두 세상을 떠 슬픔이 더욱 컸다고 합니다. 그러나 암 투병 이후 수녀님은 아픈 사람의 입장, 죽은 이의 입장을 생각하게 되고, 동시대 아픈 사람들의 마음을 대신 표현해 주고 싶은 갈망이 더 많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 명 한 명 사인해 달라는 요청에는 힘들어도 웬만하면 다 응해주고, 독자들이 보내오는 편지에는 단 한 줄이라도 친필로 답장을 보내려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수녀 이모 천사’가 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는군요.

     마음에 드는 시 하나를 낭송해 달라는 요청에, 수녀님은 ‘단추를 달듯’이라는 시를 골랐습니다. 저는 예전에 미처 몰랐던 시였는데, 이번 기회에 알게 되어, 곱씹어 읽을수록 행복해지는 기분이 드는 시입니다.


단추를 달듯
          - 이해인

떨어진 단추를
제자리에 달고 있는
나의 손등 위에
배시시 웃고 있는 고운 햇살

오늘이라는 새 옷 위에
나는 어떤 모양의 단추를 달까

산다는 일은
끊임없이 새 옷을 갈아입어도
떨어진 단추를 제자리에 달듯
평범한 일들의 연속이지

탄탄한 실을 바늘에 꿰어
하나의 단추를 달듯
제자리를 찾으며 살아야겠네


보는 이 없어도 함부로 살아버릴 수 없는
나의 삶을 확인하며
단추를 다는 이 시간

그리 낯설던 행복이
가까이 웃고 있네



* 수녀님은 인세 부자?

수녀님의 시집은 그동안 500만부 정도가 팔렸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돈 좀 빌려 달라는’ 어려운 분들의 편지도 끝없이 온다고 하네요. 하지만 수녀님은 가난한 수도자입니다. 개인 통장도 신용카드도 없습니다. 모든 수익은 수녀회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수녀회에 소속된 성직자이다 보니,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언론의 조명을 받는 게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젊을 때는, 책이 좀 덜 팔리기를 기도하기도 했다는군요.

* 먹고 살기 바쁜데, 시는 배부른 소리?

“누군가를 흉보고 싶을 때, 조용히 시를 읽어보세요.” 수녀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가방속에 시집 하나 넣고 다니다가, 누구 흉보고 싶은 미운 마음 들 때 꺼내서 읽어보고, 시를 읽음으로써 이웃을 용서하라고요. 또 시는 읽을 때마다 다른 감동이 있어서, 그 어떤 책보다 오래 두고 읽을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물리적 폭력, 언어 폭력이 난무하는 시대에 아름다운 시를 더 많이 찾아 읽어야 한다는 게 수녀님의 생각입니다. 저 역시 문화부 기자로 돌아온 요즘, 오히려 책 읽을 여유가 더 없어진 느낌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금방 읽을 수 있고, 여운이 오래 가는 시에서 큰 위안을 얻게 됩니다. 이 시처럼 말이죠.

행복의 얼굴
       - 이해인


사는 게 힘들다고
말한다고 해서
내가 행복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내가 지금 행복하다고
말한다고 해서
나에게 고통이 없다는 뜻은

정말 아닙니다

마음의 문
활짝 열면
행복은 천개의 얼굴로

아니 무한대로
오는 것을
날마다 새롭게 경험합니다

어디에 숨어 있다
고운 날개 달고
살짝 나타날지 모르는
나의 행복

행복과 숨바꼭질 하는
설렘의 기쁨으로 사는 것이
오늘도 행복합니다. 



※ 알립니다. 

‘수녀님’이란 호칭에 대해 일부 시청자께서 특정 종교 편향적이라는 지적을 하셨습니다. 저는 가톨릭신자는 아니지만, 사회의 큰 어른께 존칭을 쓰는 의미에서 ‘수녀님’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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