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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태국 반정부 시위사태가 던지는 질문들

[취재파일] 태국 반정부 시위사태가 던지는 질문들
한달 넘게 계속되고 있는 반정부 시위 상황을 취재하기 위해 태국에 다녀왔습니다. 태국에서 잉락 총리의 사퇴를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가 시작된 건 지난달 초부터 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격화하던 시위는 지난달 30일과 이달 1일 유혈충돌로 번지면서 5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2010년의 악몽이 떠오르는 순간이었습니다.

태국은 지난 2010년에도 반정부 시위가 두 달 넘게 이어졌습니다. 결국 군과 경찰이 총을 들고 진압에 나섰습니다. 그 과정에서 92명이 숨지고 1,700명 넘게 다쳤습니다. 사망자 발생 소식이 전해진 1일 오후 급하게 출장이 결정됐고, 2일 아침 첫 비행기로 태국으로 향했습니다.

1일 저녁, 휴일 근무를 마치고 퇴근해서 새벽까지 짐을 싸면서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또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는 비극이 발생하는 건 아닌지, 취재환경이 위험하지나 않을지 이런 저런 걱정도 많이 들었습니다. 출장 기간 동안도 가족은 물론 회사 동료들과 지인들이 전화와 SNS를 통해 참 많이들 걱정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 보니 방콕 시내 대부분 지역의 분위기는 한국에서 예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염려했던 것 보다 너무 조용하고 평온(?)하기까지해서 당혹스러울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연일 반정부 시위가 격화하고 있다는 한국 언론의 보도는 사실이 아니었던 거냐고요? 물론, 그런 건 아닙니다.

SBS 취재진이 방콕에 머무르던 기간이나 철수한 지금이나 정부와 반정부 시위대는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연일 시위가 이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 과정에서 5명이나 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재무부를 비롯한 주요 정부 청사는 반정부 시위대에 점거당한 상탭니다. 지난 월요일에는 10만 명이 넘는 시위대가 거리로 쏟아져 나와 잉락 총리 퇴진을 외쳤습니다. 제1야당은 의원직을 총사퇴했고 총리는 의회를 해산해 버렸습니다. 잉락 총리는 2월에 조기 총선을 하겠다고 밝혔지만 야권은 하나마나한 선거라며 총선 자체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정치 공백, 총체적인 혼란 상태 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건 이 모든 혼란과 대립, 갈등, 시위, 다툼이 방콕 시내에 10곳 쯤 되는 주요 정부 청사 건물 주변 수백미터 안에서만 벌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현장'만 벗어나면 평온하기 그지없는 일상입니다. 공항은 여전히 해외에서 온 관광객들로 북새통입니다. 시내 거리엔 온종일 흥겨운 캐롤이 울려퍼지고 백화점과 상점들은 쇼핑객들로 가득합니다. 동네 음식점과 주점에선 현지인들과 관광객들이 섞여서 벽 한구석에 달린 TV로 스포츠 중계를 보거나 웃음꽃을 피우며 얘기를 나눕니다. 한국을 비롯한 해외 언론들이 연일 걱정스럽게 보도하고 있는 '정국 혼란' '고비' '유혈충돌 우려' 같은 게 대체 어디 있느냐고 비웃기라도 하듯 일상적인 모습입니다.

정권의 운명이 벼랑끝에 서 있고 자칫하면 유혈 충돌이 벌어질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 속에서도 국민 대부분이 별다른 변화 없이 조용하고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는 건 한편으로는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실은 이 아이러니한 상황이야말로 태국의 정정 불안이 2~3년에 한번 씩 반복되고 그때마다 극단으로 치닫는 배경입니다. 말하자면, 지난 80년 사이 군부의 쿠데타만 18번 일어났던 나라 태국의 아킬레스건이기도 한 거죠.

태국 반정부시위 캡


절대왕정 국가였던 태국은 1932년에 입헌군주국이 됐습니다. 태국은 국토 면적이 남한의 다섯배나 되고 평야가 많아서 예로부터 쌀 생산이 풍요로웠습니다. 고무와 석유, 광물 같은 자원도 비교적 풍족합니다.
그러나 20세기 초·중반 산업화를 이루는데 실패하면서 2차산업인 제조업이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농업 같은 1차산업과 3차산업인 관광업 등에만 의존하는 기형적인 산업구조를 갖게 됐습니다. 이 때문에 1인당 GDP는 지난 2011년 기준 4천달러 정도에 머물고 있습니다.

역사가 짧은 만큼 민주주의는 아직 성숙하지 못했습니다. 정치권의 부패가 극심하고 정치 세력간의 반목과 대립, 정쟁도 심합니다. 정치가 제 역할을 못하니 도시와 농촌, 부자와 가난한 이들의 경제적 격차가 극심하고 이 때문에 국민들 사이에 지역간 계층간 갈등의 골이 깊습니다.

문제는 이런 현실 속에서 먹고 살기 급급한 국민들 대부분이 정치에 매우 무관심하다는 점입니다. 한쪽에선 반정부 시위대와 정부가 돌을 던지고 최루탄을 쏘며 격하게 대치하고 있지만, 시민 대부분은 시위 현장 근처에만 가지 않으면 된다는 식으로 방관만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출장중에 만난 일반 태국 국민들은 대부분 시위 사태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누가 이기든 그냥 빨리 시끄러운 혼란이 끝나기만 하면 좋겠다는 분위기였습니다.

현재 태국 반정부 시위사태의 본질은 2006년 쿠데타로 실각한 뒤 망명중인 탁신 전 총리를 지지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간의 대립입니다. 재벌 출신인 탁신 전 총리는 권력을 이용한 탈세와 비리 혐의가 드러나 실각한 뒤 2008년 실형을 선고받고 현재 해외에 도피중입니다. 그런데 농어촌 주민들과 도시노동자들 사이에선 여전히 엄청난 인기와 지지를 누리고 있습니다. 재임 시절 국가 재정을 지방정부에 나눠줘서 빈민 지원 사업을 벌이는 등 저소득층을 위한 정책을 많이 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탁신 전 총리 실각후 민주당이 정권을 잡자 탁신 전 총리를 지지하는 이른바 '레드셔츠' 들이 반정부 시위를 일으켰습니다. 두 달 넘게 방콕 시내 곳곳을 점거하고 시위를 벌인 끝에 의회 해산과 조기총선을 이끌어 냈습니다. 그 결과 도피 중인 탁신 전 총리의 여동생인 잉락 현 총리가 정권을 잡게 된 거죠. 바로 92명의 목숨을 앗아갔던 2010년 사탭니다.

탁신 전 총리는 여동생이 총리에 오른 후 해외에 체류하면서도 인터넷 화상채팅으로 집권당 회의에 참여하는 등 '배후 정치'를 해 오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반 탁신파의 반발을 사고 있었는데 잉락 총리와 집권당이 최근 한 발 더 나아갔습니다. 탁신 전 총리를 포함한 정치사범들을 모두 사면하는 법안을 추진하고 나선 겁니다. 내놓고 탁신 전 총리를 불러들이겠다는 겁니다. 결국 반정부 진영이 폭발했고 현재의 시위사태에까지 이르게 됐습니다.

반정부 진영은 대부분 기득권층이나 방콕에 거주하는 중산층 이상 국민들입니다. 이번 사태가 방콕을 제외한 지방도시에선 거의 일어나지 않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죠. 반정부 진영은 겉으로는 부패정치 해소를 주장하며 '탁신 체제'를 반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탁신 전 총리를 반대하는 배경에는 자신들의 '계층적 이해'가 단단히 한몫을 하고 있다는 게 많은 이들의 분석입니다. 실제로 반정부 진영을 이끌고 있는 민주당 역시 부패 측면에선 집권당인 푸어 타이당과 다를바 없다는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반정부 시위 사태가 발생한 뒤 태국에선 시위대 뿐 아니라 많은 학자와 언론, 전문가들도 현 정권의 무능과 부패를 질타하며 개혁을 요구해 왔습니다. 이들은 여러 경로로 총리 사퇴와 의회 해산을 요구했습니다. 그 결과 의회 해산까지는 이미 이끌어 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후입니다.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선 가장 먼저 해산된 의회를 새로 구성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당이든 야당이든 정치권은 어차피 비슷하게 부패한 상황에서 계층적 이해에 의해 친탁신파와 반탁신파가 극명히 갈려 있는 현재의 태국 상황에선 이게 참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잉락 태국 총리


잉락 총리 측은 2월에 총선을 실시하자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라면 선거를 통해 의회를 새로 구성하는 건 당연한 방식입니다. 하지만 극심한 빈부 격차로 노동자와 농민, 도시 빈민들의 표가 훨씬 많은 태국 상황에선 선거를 치를 경우 탁신파인 여당이 다시 집권할 게 불을 보듯 뻔한 상황입니다. 선거가 현 정권의 재집권을 위한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는 거죠.

이렇다보니 반정부 진영에선 '국민회의' 구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선거 없이 적당한 사람들을 뽑아서 임시 의회를 만들고 이들이 헌법도 고치고 개혁안도 만들고 총리 후보도 결정해서 왕이 임명하자는 요구입니다. 일부 현지 전문가도 선거가 사실상 해법이 될 수 없는 상황에서 현 정권을 물러나게 할 방법은 국민회의 구성 뿐이라고 편을 듭니다.

하지만 이 방식엔 아주 치명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국민의 손으로 뽑은 대표들이 정치를 한다는 민주주의의 근본 원칙을 훼손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반정부 시위대를 비롯한 일부 극단적인 진영은 국민의 정치적 역량과 관심이 성숙하지 못한 현재의 태국 현실에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팽팽히 맞서 있는 양측의 주장은 지켜보는 우리에게도 몇 가지 오래된 질문들을 다시 던져 줍니다.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것은 시스템일까요 아니면 사람일까요? 한 나라의 민주주의가 위협받을 때 그 책임은 정치인, 혹은 소수 엘리트들에게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일반 국민들에게 있는 것일까요? 시스템과 '민도'가 성숙하지 못한 상황에서 민주주의 발전을 이루기 위해 비민주적인 절차와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필요악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일까요?

하나같이 어려운 질문이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에게도 이런 질문들이 몹시 치열했던 시절이 그다지 먼 과거가 아닙니다. 이 때문에 좀처럼 해법을 찾기 힘든 태국의 상황을 보면서 마음이 몹시 착잡한 건 저 뿐만은 아닐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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