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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당신의 어머니가 급발진 추정 사고를 냈다면…

급발진 인정받으려면 운전자 스스로 입증해 내야

[취재파일] 당신의 어머니가 급발진 추정 사고를 냈다면…
이번 달 초에 급발진 연속 기획을 보도했던 시민사회부 김학휘 기자입니다. 여러 급발진 추정 사고를 취재하는 동안 계속 한 가지 상황을 가정해보게 됐습니다. 운전 경력이 20년이 넘는 저의 어머니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와 차량 급발진 사고가 났다고 말한다면, 차량이 갑자기 돌진해 인도로 올라갔고 어머니뿐만 아니라 길을 걷던 보행자도 크게 다쳤다면, 제가 뭘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니 제가 뭘 할 수 있을까요. 급발진 관련 취재를 하면 할수록 제가 할 수 있는 게 딱히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단 경찰이 교통사고 조사를 시작하겠죠. 어머니는 가속 페달을 밟지 않았는데 차가 돌진했고 그 과정에서 브레이크 페달을 계속 밟았지만 제동이 걸리지 않았다고 진술을 하시겠죠. 그러면 경찰은 다음 단계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사고에 대한 감정을 의뢰할 겁니다. 국과수는 사고가 차량 결함에 의한 급발진 때문에 발생했는지 여부를 명확하게 가려주지 못할 겁니다. 아래는 지난해 발생한 급발진 추정 사고의 실제 국과수 감정 내용입니다.

“제동 및 조항 장치는 작동이 가능한 상태임을 확인할 수 있으나, 파손상태가 심하여 사고 당시의 제동 성능을 추정하기 곤란하고, 전선 및 전자부품의 손상이 심하여 사고 당시 오작동에 대한 검사도 불가능한 상태임.”

차량 제조사는 차량 결함을 확인하지 못했으며 운전자 조작 미숙으로 사고가 발생했다고 주장할 겁니다. 자 이제 어떻게 될까요. 경찰은 사고의 원인을 운전자 과실로 판단할 겁니다. 어머니는 사고로 다른 사람까지 다치게 했으니 형사 처분까지 이어질 겁니다. 경찰은 이 사건을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할 것이고, 재판에 가게 되면 대부분 운전자 과실이 인정됩니다.

아들인 저는 너무 억울할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일관되게 급발진을 주장하고 계시는데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사고 당시 블랙박스를 인터넷에 올릴 것 같습니다. 인터넷에서 반응은 뜨거울 겁니다. 네티즌들은 댓글로 ‘급발진으로 밖에 설명 안 된다고’ 저를 편들어 줄 겁니다. 각종 언론 매체에서 급발진 추정 사고라고 보도 하겠죠. 하지만, 그뿐. 상황이 쉽게 바뀌지는 않을 겁니다. 차량 제조사는 계속 차량 결함은 확인하지 못했다고 말할 것이고 수사당국은 여전히 운전자 과실로 사고가 났다고 판단할 겁니다.

정부가 나설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지난해 급발진 추정 사고로 인터넷과 각종 언론 매체에서 많이 접할 수 있었던 6건의 사고에 대해서 정부가 민관합동조사반을 꾸려 조사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급발진 민관합동조사반의 최종 결론은 뭘까요. 지난 6월 윤영한 급발진 추정사고 민관합동조사반장 브리핑 내용입니다.
급발진 캡쳐_500


“자동차 결함 때문에 급발진 현상을 현재 우리 기술로서는 찾아낼 수 없었고 존재할 수 없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운전자가 급발진 때문에 사고가 났다는 걸 입증하지 않는 이상 억울해도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한국소비자원에는 매년 2백에서 3백 건의 급발진 추정 사고 관련 상담이 접수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피해구제로 이어진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습니다.

취재를 하면서 급발진 추정 사고 운전자를 많이 만났습니다. 다들 억울한 건 기본이고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해 형사 처분을 받은 운전자, 과속에 신호위반으로 벌점을 받아 면허가 취소된 운전자, 치료비에 보상비에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운전자 등 급발진 추정 사고의 책임을 대부분 운전자가 지고 있었습니다.

미국은 어떨까요. 지난 10월 말 미국 법정이 토요타 차량에서 발생한 사고 원인이 급발진이라는 평결을 내놨습니다. 차량 결함에 의한 급발진이 미국 법정에서 인정된 건 사상 처음입니다. 운전자의 과실이 아닌 차량의 전자장치 불량 때문에 사고가 났다며 토요타사는 피해자들에게 우리 돈 31억 8천만 원을 배상하도록 했습니다. 토요타 사는 평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서도 평결 직후 서둘러 피해자들과 합의했습니다. 전문가를 만나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대림대 자동차학과 김필수 교수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미국 법정에서는 급발진 추정 사고가 나면 입증의 책임을 차량 제조사와 운전자가 동시에 지게 한다. 급발진이 아니라는 것을 제조사도 명확하게 입증하지 못했고, 운전자도 급발진 때문에 사고가 났다는 것을 명확하게 입증하지 못했으니까 양 측이 서로 합의하게 유도하거나, 제조사가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보상하게 유도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급발진 입증의 책임이 오로지 운전자에게만 있다.”

급발진 추정 사고는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차량 결함에 의한 급발진 때문에 사고가 났다는 것을 인정받으려면 차량 제조사도, 국과수도, 정부 민간합동조사반도 입증하지 못한 걸 운전자 스스로 입증해내야만 합니다. 뭔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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