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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멧돼지 응급실 습격 사건

도심 병원에서 멧돼지 난동

[취재파일] 멧돼지 응급실 습격 사건
저돌적(猪突的) “앞뒤를 생각하지 않고 내닫거나 덤비는, 또는 그런 것”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저돌적”의 의미를 이렇게 정의했다. 말 그대로 멧돼지(猪)가 뭔가를 향해 부딪히는(突) 형상. 그처럼 거침없이 강력하게 힘으로 밀어붙이는 모습. 그래서 다소 미련하게 느껴지기까지는 하는 단어. 멧돼지는 그 만큼 저돌적이다. 지난 18일 강원도 강릉에서 사람을 향해 이렇게 저돌적으로 달려든 멧돼지가 있었다. 그 것도 한 가운데 있는 병원에서 말이다.

강릉의료원에 멧돼지가 처음 나타난 건 18일 오전 7시 20분쯤, 응급실과 본관 사이 출입구를 통해 건물 안으로 들어간 멧돼지는 응급실 뒷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응급실에서 나온 간호사를 보자마자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다. 간호사들이 놀라 혼비백산하듯 달아났고 멧돼지는 40초 남짓 응급실 구석구석을 휘젓고 다니며 간호사들을 위협한 뒤 유유히 밖으로 사라졌다. 이어 멧돼지가 두 번째로 찾은 곳은 지하 장례식장이었다.

계단을 통해 지하로 내려간 멧돼지는 복도에 있던 8살짜리 남자 아이에게 달려들었다. 놀란 아이가 미처 달아나지 못하고 넘어지자 멧돼지는 아이의 옆구리를 물었다. 2벌의 옷을 뚫고 파고든 멧돼지의 어금니가 아이의 옆구리를 스쳤다. 아이는 비명을 지르며 허우적거렸고 주변의 조화 10여개가 넘어졌다.

멧돼지 캡쳐_500


아이의 비명 소리에 사무실에 있던 장례식장 직원이 뛰쳐나와 멧돼지와 맞섰다. 멧돼지를 향해 발길질을 하고 사무실에서 망치를 가져와 멧돼지를 공격했다. 다행히 아이는 멧돼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고 멧돼지는 계단으로 올라가 1층으로 달아났다. 멧돼지와 맞서는 과정에서 이 직원은 다리를 다치고 손가락이 부러지는 큰 부상을 입었다.

멧돼지가 다시 1층으로 올라왔을 무렵, 직원들이 응급실 뒷문과 건물 본관으로 향하는 옆문, 건물 출입문까지 3곳을 재빠르게 차단했다. 멧돼지는 이중으로 된 현관 유리문 사이에 갇히게 됐고 때마침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바로 사살됐다. 불과 10분 남짓. 멧돼지가 응급실과 장례식장을 설치고 다니는 동안 2명이 물려 다치고 수십 명이 불안에 떨어야 했다. 이 멧돼지는 어디에서 나타난 걸까?

이날 이 멧돼지가 강릉 도심에서 처음 발견된 것은 아침 7시쯤, 강릉의료원에서 북쪽으로 1.3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주택가 골목에서다. 이 주택가 뒤편에 얕은 구릉성 산지의 도심 녹지가 있는데 경찰과 전문가들은 이곳을 통해 멧돼지가 주택가로 내려온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이 멧돼지는 왜 산을 내려왔을까?

사살된 멧돼지는 무게 70킬로그램 정도로 아주 어린 개체였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지난해 봄과 여름 사이쯤 태어나서 이제 만 1살을 조금 넘긴 개체다. 국립생물자원관 한상훈 동물자원과장은 이 난동이 어린 멧돼지가 어미로부터 독립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것이라고 설명한다. 새로운 서식지를 찾아 도심 외곽의 산지에서 도심 녹지를 따라 이동했다가 호기심, 또는 다른 어떤 이유에 의해 주택가로 내려온 멧돼지가 이곳저곳 기웃거리다가 길을 잃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과정에서 무언가에 자극받았거나 또는 길을 헤매다가 판단력을 잃고 점점 불안해지면서 더욱 난폭해졌다는 것이다. 멧돼지는 특히 신변의 위협을 느꼈을 때 아주 공격적으로 변하는데 특히 새끼를 키우는 동안에는 가장 난폭해진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멧돼지와 마주했을 때 가능하면 멧돼지를 자극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섣불리 멧돼지를 제압하려는 것은 금물이요, 사람이 필요 이상으로 먼저 흥분해 소리를 질러서도 안 된다고 한다. 멧돼지가 달려들기 전에 가능하면 움직임을 적게 해 주변 장애물로 몸을 피하고 경찰이나 소방서에 신고하라고 조언한다.

멧돼지에 의한 피해는 이미 오래전부터 다양한 형태로 존재해왔다. 농작물은 물론 묘지까지 심하게 훼손해 퇴치의 대상이 된지 오래다. 엽사를 동원하는 것은 물론, 밭 주변에 전기 철책을 두르기도 하고, 심지어 호랑이 똥을 구해 밭가에 뿌리기도 했다. 그러나 농촌에 국한됐던 이런 멧돼지 피해가 이제는 도심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우리나라 숲에서 멧돼지의 천적이 사라져 서식밀도가 높아진 것도 한 이유겠지만, 개발에 의해 도시가 확장되면서 멧돼지 서식지가 축소 단절된 것도 주요 이유일 것이다. 멧돼지의 도심 습격은 어쩌면 우리 스스로가 초래한, 앞으로 더 자주 겪게 될 대가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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