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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NLL 대화록 : 법률, 정치, 상식의 싸움

[취재파일] NLL 대화록 : 법률, 정치, 상식의 싸움
법은 참 묘합니다. 송사를 한 번이라도 치러본 사람은 압니다. 상식적으로 옳은 것이 반드시 법적으로 옳은 것은 아닙니다. 거꾸로 법적으로는 처벌할 수 없는 일이 상식의 차원에서는 용서받지 못할 일이 되기도 합니다. 법률 싸움에서 승소한 사람이 반드시 정치적 논쟁에서 승리하는 것도 아닙니다. 서로 무관하다고 말 할 수는 없지만 법과 정치 그리고 상식 차원의 옳고 그름의 기준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습니다. 지금 검찰에 넘어와 있는 NLL 대화록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건 역시 법률적 차원, 정치적 차원, 그리고 상식적 차원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법률적 쟁점: '초본'인가 '완성본'인가

현재까지 드러난 사실을 놓고 볼 때, NLL 대화록 사건의 법률적 쟁점은 한 가지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삭제된 (그리고 수사 과정에서 검찰이 복구한) 대화록이 '초본'이냐  아니면 '완성본'이냐"는 문제입니다.

검찰은 10월 2일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검찰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재임 중에 대화록이 청와대이지원에서 삭제된 흔적을 발견했다고 밝혔습니다. 청와대이지원을 그대로 복사한 봉하이지원(노무현 전 대통령이 복사해 퇴임 후 봉하마을로 가져 갔다가 2008년 국가기록원에 돌려 준 이지원)을 분석해보니, 삭제된 대화록이 나왔고 이를 복원했다는 겁니다. 검찰은 이 대화록이 일종의 초고 형태라고 말했다가, 나중에는 "'초고' 또는 '초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했죠. 그 이유는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또 검찰은 이와 별도로 봉하이지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좀 더 수정된 형태의 대화록이 삭제되지 않고 저장돼 있는 걸 확인했다고 발표했습니다. 현재 국정원이 보관하고 있는 대화록까지 합치면, 대화록은 모두 3가지가 있고, 3가지 모두 각각 완결성을 가진 완성본이라고 검찰관계자는 말했습니다. 3가지의 내용에 큰 차이는 없지만 "'의미 있는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도 했죠.

그러니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대화록 1: 참여정부 당시 청와대이지원에서 삭제됨. 봉하이지원을 통해 복구. 가장 최초에 작성된 '초본' 형태
대화록 2: 봉하지원에 저장돼 있던 판본. 초본을 수정한 형태
대화록 3: 국가정보원이 보관하고 있는 판본.

검찰관계자: "대화록1, 대화록2, 대화록3은 모두 각각 완성본이다.  내용상 큰 차이는 없다. 다만 '의미 있는 차이'는 있다."

법률적으로 문제가 되는 사실은 대화록1의 삭제입니다. 검찰의 관심사는 '대화록1을 삭제한 행위'를 대통령기록물 파기로 볼 수 있느냐는 겁니다. 애초부터 대통령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14조의 위반 여부를 규명하기 위한 수사이기 때문입니다.(이 수사는 새누리당이 대통령기록물관리법 위반 혐의에 대해 고발장을 제출하면서 시작됐습니다.)
대통령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제14조(무단파기ㆍ반출 등의 금지) 누구든지 무단으로 대통령기록물을 파기·손상·은닉·멸실 또는 유출하거나 국외로 반출하여서는 아니 된다.

제30조(벌칙) ①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1. 제14조를 위반하여 대통령기록물을 무단으로 파기한 자
2. 제14조를 위반하여 대통령기록물을 무단으로 국외로 반출한 자
②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자는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1. 제14조를 위반하여 대통령기록물을 무단으로 은닉 또는 유출한 자
2. 제14조를 위반하여 대통령기록물을 무단으로 손상 또는 멸실시킨 자

'대화록1의 파기행위=대통령기록물 파기행위'로 보려면 결국 '대화록1=대통령기록물'이라는 전제가 필요합니다. 검찰이  "대화록1도 완결성을 갖춘 완성본이다. 오히려 대화록1이 완성본에 더욱 가깝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검찰의 주장대로 대화록1이 완성본이라면, 그 자체로 한 건의 대통령기록물로 볼 수 있고, 따라서 대통령기록물 파기 행위가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친노 진영은 당연히 검찰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초본은 초본일 뿐"이라는 것이 친노진영의 입장입니다. 초본을 다듬은 수정본을 만들고 나면 초본을 삭제하는 것은 당연한 일처리라는 주장입니다. 다시 말해 대화록1은 그 자체로 완결된 완성본이 아니고, 따라서 대통령기록물도 아니라는 것이죠.

앞으로 NLL 대화록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와 재판에서도 결국 대화록1의 성격 규정(완성본 vs 초본)이 가장 중요한 쟁점일 것입니다. 그러나 법률적 진실 규명은 이 사안에 대한 절반의 설명에 불과 합니다. 이 사안은 처음부터 정치적인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정치적 쟁점: 대화록1은 왜 삭제됐나? 또는 대화록1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 있는가?

대화록1이 그 자체로 완결된, 완성본이냐(따라서 대통령기록물이냐) 아니면 말 그대로 작업용 초본에 불과하느냐를 법률적으로 규명하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대화록1에 대해 최종결재권자가 결재를 했는지, 공용 문서를 분류하는 대장에 적절한 방식으로 등록됐는지, 대화록1의 삭제를 지시한 사람이 이를 일종의 완성본으로 인식하였는가 등등....  검찰과 이에 맞서는 친노 진영이 앞으로 수사 과정과 공판 과정에서 앞으로 치열하게 공방을 주고 받을 사안입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차원에서 더 중요한 문제는 "도대체 대화록1은 왜 삭제되었는가?"입니다.

친노진영의 주장은 기본적으로 동일합니다. 대화록1은 초본에 불과하고, 수정본이 만들어지면 초본을 삭제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입장입니다. 애초에 대화록1은 대통령기록물이 아니라 작업용 초본에 불과하므로, 그것을 삭제한 이유는 중요하지 않고, 오히려 삭제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게 친노진영의 말입니다.

이에 반해 새누리당은 대화록1에 무엇인가 중대한 내용이 있었기 때문에 삭제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애초에 문제가 됐던 NLL 포기 발언은 물론이고, 그 보다 더 의미심장한 '무언가'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를 삭제하고, 표현과 내용을 애써 다듬은 수정본만 국정원에 남겨둔 것이라고 새누리당은 의심하고 있습니다.(새누리당은 수정된 판본 조차 참여정부가 국가기록원에 이관하지 않았다는 점도 비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올해 초 검찰 수사 과정에서 조명균 전 청와대 안보정책 비서관이 했다는 진술 때문에 상황이 좀 더 복잡해졌습니다. 조 전 비서관은 검찰 조사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화록을 청와대에 남겨두면 '대통령지정기록물'로 묶어야 하는데 그러면 다음 대통령이 보기 어려우니, 녹음 파일을 가지고 국정원에 대화록을 새로 생산해 국정원에서 보관하고 청와대에서 대화록을 삭제해라'고 지시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대통령지정기록물
대통령지정기록물은 대통령기록물과는 다른 것입니다. 대통령기록물 가운데 일정 조건에 해당되는 기록물은 '대통령지정기록물'로 분류돼야 하는데, 대통령지정기록물이 되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오랜 기간 동안 열람할 수 없습니다.

이 진술을 두고도 새누리당과 친노진영의 입장은 엇갈립니다. 새누리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화록 삭제를 지시한 사실이 밝혀졌다고 공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친노진영은 이 진술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이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선의善意'를 보여줄 뿐, 잘못된 건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삭제된 대화록1에 과연 무슨 내용이 담겼는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 떠오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삭제됐던 대화록1과 대화록2, 대화록3 사이의 '차이점'에 관심이 모이는 것이지요. 만약 새누리당이 의심하는 것처럼 대화록2,3에는 없는 '무언가'가 대화록1에 들어있고, 그것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감추고 싶었던 '무언가'라면, 진실 은폐를 위해 대화록을 삭제했다는 새누리당의 주장이 힘을 얻을 것입니다. 새누리당이 아예 국정원이 보관하고 있는 정상회담 대화 녹음파일을 공개하자고 주장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대화록1이 아니라 국정원 보관 녹음파일을 공개하자는 이유 중에는 대통령기록물과 공공기록물의 공개 범위 차이라는 기술적 문제도 있는데, 일단 이건 넘어가겠습니다.)

반면 대화록1과 대화록2,3의 차이가 거의 없거나, 있어도 무시할만한 것이라면, '은폐를 위한 삭제'라는 새누리당의 주장은 힘을 잃겠죠. 대신 작업용 초본 삭제에 불과하다는(또는 조명균 전 비서관 진술대로라면 다음 정부를 위한 기술적 배려) 친노진영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을 것입니다.

NLL 대화록 사건에 대한 상식적 해석

서두에 이야기한 것처럼 법률적 승패와 정치적 논쟁의 승패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대화록1이 완성본이라고 재판에서 인정되고 따라서 대통령기록물 파기죄로 누군가 처벌을 받을 수도 있지만, 막상 녹음파일을 공개하고 보면 대화록1에(또는 실제 정상회담 대화에) 특별한 내용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대화록1은 완성본이 아니라고 재판부가 판단해 무죄를 선고하더라도, 정치적으로 문제가 될만한 표현이 실제 대화에 들어있다면 정치적 논쟁의 결과는 소송의 승패와는 정반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식적인 차원에서 이 사건을 보면, 정치적 논쟁의 승패가 과연 분명하게 판가름날지 의문입니다. 대화록1이 공개되든, 녹음 파일이 공개되든,  각자의 진영에서  각자 속한 진영의 논리에 맞게 사실을 해석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국정원이 NLL 대화록 발췌본을 공개했을 때를 돌이켜 보면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진행될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똑같은 글을 보고도 보수진영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NLL 포기 발언'을 했고 김정일에게 '굴종적 태도'를 보였다고 비판했습니다. 친노진영에서는 정반대로 NLL 포기 발언은 없는 것으로 드러났고,  노 전 대통령의 표현 역시 외교적 수사 수준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똑같은 글을 보고도 정반대 이야기를 내놓으니 아예 국가기록원에 있는 대화록 전문을 보자는 주장이 나왔고, 결국 여야가 함께 기록원에 갔지만 대화록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끝내 고발장이 검찰에 접수된 것이죠.

앞으로 정상회담 대화의 녹음 파일이 공개되어도 아마 마찬가지 상황이 벌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보수진영은 보수진영의 시각에서 문제되는 발언을 찾아 공격할 것이고, 친노진영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되받아치겠죠. 어떤 언급, 어떤 표현이 나올지에 따라 논쟁의 수준이 좀 달라 질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사실에 대한 객관적 해석보다는 정파적 분석과 주장이 부각될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NLL 대화록이 있다 없다, 누군가 감췄다 아니다 보다도, 이 사안을 둘러싼 정치적 논쟁의 수준이 우리 사회의 더 큰 문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같은 문서, 같은 사실을 보고도 상식의 눈으로 살피지 않고,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왜곡해 해석하고, 끝이 없는 정쟁을 이어가는 태도말입니다. 민주주의의 존재 이유는 모두 구성원이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체제이기 때문입니다. NLL 대화록을 둘러싼 정치적 논쟁의 양상은 민주주의의 존재 이유에 정확히 반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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