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사려깊은(?) 일본인들이지만, 배신이나 모욕을 당했다고 느꼈을 때는 반드시 복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복수는 미화되고 칭송된다. 우리나라의 '춘향전' 같은 일본의 대표적 고전문학, '주신구라(忠臣藏)'는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다. 사무라이 47명이 죽은 주군을 위해 복수하는 내용인데, 일본의 국민성과 문화속에 숨어있는 무사도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연말이 되면 '주신구라'에 관한 이야기가 각 미디어를 통해 쏟아져 나온다.
내용은 이렇다. 도쿠가와 막부 전성기인 1701년 3월 14일, 일본 중부의 작은 지방 '아코'의 젊은 영주 아사노 다쿠미노카미가 거물급 영주인 기라 고즈케노스케에게 칼을 휘두른다. 이로 인해 아사노는 할복의 명을 받게 되고, 주군을 잃은 그의 부하들은 1년 뒤 그 복수를 하고 전원이 할복자살한다. '주신구라'는 복수를 금한 체제에 대한 반역의 드라마이기도 하고, 주군의 원수를 갚는 충성스런 부하들의 드라마이기도 하며, 체제에 대한 충성심이 투철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칼의 문화'에 담겨진 일본의 정신을 그대로 재현한 '주신구라'가 일본인의 정신 형성에 끼친 영향력은 실로 대단하다. 종전 후 맥아더는 일본 땅에서 '주신구라'의 상연을 금지시켰다. '주신구라'를 민주주의에 반하는 위험사상으로 받아들였던 것인데, 미 점령군은 일본인들이 자신들을 욕보인 맥아더 장군에게 복수할 지 모른다고 우려했을 정도다.
아직까지도 최고의 일본문화론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은 일본인들의 이런 복수관을 '기리(義理)'라는 용어로 정리했다. 일본인들은 무사도와 천황제에 '기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를 모욕하지 말 것을 루스 베네딕트는 충고했다. 전후 미 점령군이 천황제를 존속시킨 것도 이런 영향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