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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고발장과 '검찰공화국'

문제 해결을 검찰에 맡기는 후진적 정치 관행

[취재파일] 고발장과 '검찰공화국'
서울중앙지검 민원실 앞에선 간간이 기이한 광경이 펼쳐집니다. 양복을 입은 남성 또는 정장을 입은 여성들이 서류 봉투에 흰색 A4 용지를 붙이고 ENG 카메라 앞을 행진하는 모습입니다. 서류봉투에 붙인 흰 종이에는 보통 '000 사건 고발장'이라는 글자가 커다란 폰트로 적혀있기 마련입니다. 엄숙한 표정으로 민원실에 서류를 제출하고 나면 몰려든 취재진 앞에서 몇 마디를 남기고, 검은색 에쿠스를 탄 뒤 사라집니다.

정치인들이 검찰청에 고발장을 제출하는 모습입니다.(뉴스에서 자주 보셔서 낯설지 않은 장면일 겁니다.) 여의도에서 예민한 쟁점이 불거지면 얼마 안 있어 사건은 서초동으로 넘어옵니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보수든 진보든, 상대방에게 치명적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사건이라고 판단하면, 검찰청에 와서 진위와 형사처벌 여부를 판단해 달라고 서류를 제출하곤 합니다. 우리 정치의 오랜 관행입니다.

정치인들은 말합니다. "법과 원칙에 따라 처리해달라" 그러나 법과 원칙, 형법과 형사소송법이 개개의 사건마다 처리 방향에 대한 구체적 지침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법은 사건을 객관적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포괄적 언어로 기술돼 있고, 결국 법에 입각해 증거를 수집하고 법조항을 해석하고 적용해 기소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선 오롯이 검사에게 맡겨져 있는 역할입니다.

해석과 적용이 문제입니다. 어떤 쪽으로 법을 해석 하든 한 쪽은 불만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검찰이 결론을 내리는 순간, 한 편은 축배를 들고, 다른 한 편은 비난을 퍼부으며 나중에 손봐줘야 할 검사들 이름을 가슴 깊이 새깁니다. 멀리 김태정 前 검찰총장의 'DJ 비자금 수사 연기'부터, 이른바 병풍 사건, BBK 사건 등 결정적인 계기마다 검찰이 내린 사건 판단을 놓고 정치권의 진보와 보수는 입장을 바꿔가며 환영과 비난을 되풀이해왔습니다.

이런 구도 속에서 검찰은 결국 사법적 판단이 아니라 정치적 판단을 해야 하는 난처한 처지에 몰립니다. 물론 사법적 진실이 아니라 정치적 해법을 추구하는 검찰의 행위는 마땅히 비판받아야 합니다. 특히 실체적 진실 앞에서 눈을 감거나, 더 나아가 은폐까지 한다면 용서받을 수 없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검찰의 행동을 비판하기에 앞서, 검찰을 둘러싼 정치적 환경이 검사들에게 사법적 진실보다 정치적 해법을 추구하도록 압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과거 검찰의 여러 판단 사례가 정치권 눈치를 본 수세적 결론인지, 아니면 일부 검사들이 정치적 상황을 출세에 활용한 것인지는 건마다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치권이 입을 모아 비판하는 검찰의 비대한 권력도 상당 부분은 정치권의 후진적 관행 탓입니다. 나라를 뒤흔드는 쟁점만 생기면 검찰에게 판관 역할을 요청하니, 검찰의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이 줄어들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일전에 어떤 선배 기자가 검찰청에 이렇게 많은 기자들이 출입하고, 검찰이 브리핑 할 때마다 이렇게 많은 취재진이 몰리는 나라는 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정치권이 예민한 논쟁을 검찰보고 해결해달라고 요구하는 한 이런 풍경은 앞으로도 서초동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검찰공화국이고, 검찰의 권력이 너무 비대한 것이 문제라면, 예민한 문제일 수록 서초동에 와서 해결을 요구해 버릇한 정치권도 책임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른바 '사초(史草)게이트'가 곧 여의도에서 서초동으로 넘어온다고 합니다. 혹자는 또 다시 '검찰의 계절'이 올거라고 합니다. 정치적 쟁점이 서초동에서 판가름 나는 후진적 관행은 언제쯤 사라질까요? 검찰청을 출입하는 기자로서, 그리고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우울한 일이 끊이질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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