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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영국 '로열 베이비' 열풍의 '불편한 진실'?

[취재파일] 영국 '로열 베이비' 열풍의 '불편한 진실'?
요즘 세계 각국의 내로라 하는 언론사의 취재진들이 영국의 한 병원 문앞에서 '뻗치기'를 하고 있습니다. '뻗치기'는 '상황이 발생할 때를 대비해서' 현장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일을 가리키는 기자들 사이의 은업니다. '현장'은 런던의 세인트 메리 병원, 이들이 혹시라도 '물 먹을까' 노심초사하며 대비하고 있는 '상황'은 '로열 베이비'의 탄생입니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손자인 윌리엄 왕자와 아내 케이트 미들턴 사이에 태어날 아기죠. '로열 베이비'는 원래 지난 12일이 태어날 예정일이었는데, 웬일인지 여태 태어나질 않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수많은 취재진이 기약 없이 병원 문앞에서 온종일 진을 치고 있는 진풍경이 일주일째 계속되고 있는 겁니다.

저도 해 봐서 아는데, 이 '뻗치기'라는 게 참 피곤하고 힘든 일입니다. 자리를 비울 수 없으니 화장실 한 번 맘 편히 갈 수 없고, 끼니는 매번 배달음식이나 패스트푸드로 때워야 하기 일쑵니다. 게다가 날씨라도 궂으면 한데서 꼼짝없이 비바람을 맞아야 합니다. 보통 고역이 아니죠. 오죽하면 취재진들은 병원 맞은편 건물 벽에 커다란 시계까지 걸어놓고 한시라도 빨리 '로열 베이비'가 태어나 주기만 염원하고 있습니다.

'로열 베이비'는 태어나는 순간 할아버지인 찰스 왕세자와 아버지인 윌리엄 왕세손에 이어 영국의 왕위 계승 서열 3위가 됩니다. 딸이든 아들이든 성별도 상관없습니다. 게다가 한때 뭇 세계인의 '로망'이었던 고 다이애나 황태자비와 어머니 케이트 미들턴의 미모를 닮았다면 외모 또한 출중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그러니 영국인들이 '로열 베이비'의 탄생을 앞두고 설레는 건 충분히 이해할만한 일입니다. 하지만 왜 다른 나라 사람들과 세계 유수의 언론들까지 이렇게 '난리'인 걸까요?

'로열 베이비' 열풍이 얼마나 뜨거운가 하면, '로열 베이비' 때문에 요즘 영국 뿐 아니라 이웃 나라들에서까지 영국과 왕실을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진 아기용품이 불티나듯 팔리고 있다고 합니다. 예비 엄마들이 케이트 왕세손비 따라 하기에 나서면서 케이트 왕세손비가 입었던 임부복들이 없어서 못 팔 만큼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 한 유모차는 '윌리엄 왕자 부부가 사용할 것'이라는 소문만으로도 평소보다 10% 넘게 매출이 늘었다고 합니다. 이렇다보니 심지어 '로열 베이비' 출산에 따른 경제효과가 우리 돈으로 4,300억 원에 달할 것이라는 통계까지 나왔습니다.
영국 로열베이비 특
그런데 이 와중에 CNN이 로열 베이비 열풍과 관련해 재미있는 보도를 했습니다. '로열 베이비' 열풍이 없었던 지난해에도 미국의 유아용품 시장이 무려 490억 달러에 달했다는 내용입니다.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55조 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액수입니다. 이상한 건, 다들 아시다시피 지난해 미국 경제는 좋지 않았습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계속되고 있는 침체의 늪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가는 오르고 실업률은 치솟고, 연준이 끊임없이 달러를 찍어내서 다 죽어가는 경기를 억지로 부양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유독 유아용품 시장만 호황을 누린 겁니다.

CNN은 그 원인으로, 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 아끼지 않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능력이 닿는 한 '최고'의 용품들로 입히고 신기고 씌우고 싶어 하는 부모들의 과열 경쟁을 꼽고 있습니다. 결국, '로열 베이비'의 경제적 효과는 타고난 혈통이야 어쩔 수 없지만 유모차만큼은 영국 왕세손 못지않은 걸 태워주고 싶어 하는 '부모 맘'이 투영된 거라는 거죠. 방송에 소개된 어머니들은 당연한 것 아니냐며 입을 모아 얘기합니다: "어느 부모에게나 자식은 모두 '공주'이고 '왕자'잖아요!"

하지만 CNN은 부모들의 이런 헌신적인 자녀 사랑 뒤에는 '아이를 자신의 연장선'에서 바라보는 부모들의 왜곡된 '꿈'이 숨어있다는 일침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자신의 아이를 '로열 베이비'처럼 키우고 싶어하는 부모들의 경쟁은 아이의 미래가 아닌, 자신의 과거 속에 있는 '로열'에 대한 환상과 동경이 드러난 거라는 분석입니다. 마치 운동선수가 되고 싶었던 부모가 아이에게 운동을 가르치고 화가가 되고 싶었던 부모가 아이에게 미술을 가르치듯이 말이죠. 옷이나 신발이나 유모차, 금으로 만든 공갈젖꼭지 등과 달리 혈통이라는 것은 돈으로는 절대 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로열'에 대한 판타지는 더더욱 강렬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진짜 '로열'인 사람들은 '로열 베이비'의 탄생을 앞두고 어떨까요? 어제(17일) 영국 일간지 데일리메일에 이런 기사가 실렸습니다. 한 지역을 방문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 10살짜리 소녀가 당돌하게도 이렇게 물었답니다: "태어날 아기가 아들, 딸 중 어느 쪽이길 바라세요?" 그랬더니 여왕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성별은 상관없는데, 휴가 전에는 태어났으면 좋겠다."

이 답변은 듣기에 따라 '출산 예정일을 넘긴 증손자의 탄생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할머니의 간절한 심경'이 담긴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들이든 딸이든 간에, 아... 참... 빨리 휴가 가야 하는데 얘는 왜 여태 안 태어나는 거니?"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너무 삐딱한 해석일까요? 꼭 그렇게만 여길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크리스티안 아만푸어라는 유명한 CNN 앵커가 '로열 베이비' 열풍을 취재하면서 여왕의 가까운 사촌을 만나서 단독 인터뷰를 했습니다. 마거릿 로즈라는 분인데, 엘리자베스 여왕과 불과 몇 달 차로 태어나서 어릴 때부터 가장 가깝게 지낸 사촌이자 친구입니다. 여왕의 결혼식 땐 신부 들러리를 서기도 했고 요즘도 일요일마다 교회에서 여왕을 만나고 인터뷰 전날도 자기 집에 여왕을 초대해서 함께 차를 마셨다고 합니다.

이 마거릿 여사에게 아만푸어가 물었습니다: "전 세계가 로열 베이비의 탄생을 학수고대하고 있는데 여사님도 설레세요?" 마거릿 여사는 뜻밖에 이런 대답을 내놨습니다: "별로..." 깜짝 놀란 아만푸어가 다시 물었습니다: "왜요?" 그러자 마거릿 여사가 아주 '쿨~하게' 대답했습니다: "애는 누구나 낳는 거 아냐?"

마거릿 여사의 답변을 듣고 한참 웃다가 깨달았습니다. 사실, 깨달을 것도 없이, 따지고 보면 아주 당연한 얘기입니다. 애당초 '로열'인 사람들에겐 태어날 아이는 그저 '베이비'일 뿐이었던 거죠. 그리고 "누구나 낳는" 그 '베이비'를 '로열 베이비'로 만드는 건 '로열'이 아닌 우리들 '평민'들이고요. '로열 베이비' 열풍의 '불편한 진실'이라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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