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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블레이드 러너': '만들어진 영웅'의 비극

[취재파일] '블레이드 러너': '만들어진 영웅'의 비극
지난달 세계를 떠들석하게 했던 남아공의 '의족 러너' 오스카 피스토리우스의 여자친구 총격 사건 다들 기억하실 겁니다.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가 자기 집에서 여자친구를 총으로 쏴서 사망하게 한 사건 자체도 충격적이지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진행중인 진실게임 때문에 더 이목을 끌고 있는 사건입니다. SBS는 이 사건을 8뉴스에서 두 번 다뤘는데 우연히도 관련 기사 두 건을 모두 제가 썼습니다. 방송된 기사는 두 건이지만, 방송에 나가지 못한 '1보'까지 포함하면 사실 제가 쓴 기사는 모두 세 건입니다.

사건 발생 당일, 그날 방송될 뉴스의 얼개가 이미 다 정해진 오후 5시 쯤이었습니다. 사무실 한 켠에 켜져 있는 CNN 화면에 피스토리우스 집에서 웬 여자가 총에 맞아 숨졌다는 '속보'가 떴습니다. 현지 경찰은 가해자의 신원을 확인해 주지 않은 채 "피스토리우스의 집에서 26세 남성이 총을 쏴서 한 여성이 숨졌다"고만 밝혔습니다. 그러나 가해자의 나이가 피스토리우스와 일치하고 사건 발생 시간이 새벽인 점 등 정황을 종합하면 가해자가 피스토리우스인 점이 분명해 보인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현지 언론 역시 피스토리우스가 총으로 사람을 죽였고 피해자는 여자친구라는 보도를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인간 승리의 표본'으로 불리며 타임지가 뽑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도 선정된 대스타가 연루된 총격 사망 사건은 그 자체로 빅뉴스입니다. 더구나 정황상 '남아공판 O.J. 심슨 사건'이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날 뉴스에 추가하기로 하고 부랴부랴 기사 작성에 들어갔습니다.

첫 기사는 아주 '담담한' 내용이었습니다. 직접 취재가 불가능한 가운데 외신들의 보도에만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정확한 사건 정황 조차 공식적으로 확인된 게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피스토리우스가 자택에서 총을 쏴서 여자친구가 여러발을 맞고 숨졌는데, 강도로 오인해서 실수한 것으로 보인다고 현지 언론이 보도했다'고 보도된 내용만 그대로 인용해서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그러나 현지 언론의 보도를 무조건 사실로 단정할 수는 없는 만큼 혹시나 싶어서 마지막에 "조사 결과 만일 실수가 아니라 의도된 살인으로 확인된다면 세계는 또 한 명의 영웅을 잃어버린 충격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으로 보입니다." 한 줄을 추가했습니다.

그런데 기사 작성을 막 끝낸 직후, '실수'를 뒷받침하는 증거로 볼 수 있는 사망자의 트위터 멘션 관련 외신 보도가 추가로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바로 기사를 새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트위터 화면 캡쳐해서 컴퓨터 그래픽도 맡겨야 하고, 외신을 뒤져서 사망한 여자친구 얼굴도 찾아야 하고, 8뉴스 방송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제작시간이 빠듯했습니다. SBS 국제부원이 거의 다 달려들다시피 해서 콩볶듯이 새 기사를 제작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게 바로 대한민국 대부분 언론이 쏟아낸 '발렌타인 데이의 비극' 기삽니다.

그런데 며칠 뒤 경찰이 사건을 '계획된 살인'으로 규정했다는 내용과 함께, 사건을 실수로 보기 어려워 보이는 정황들이 하나씩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당초 알려졌던대로 '발렌타인 데이의 비극'이라고만 단정하기는 어려워 보인다"는 내용의 '업데이트' 기사를 썼습니다. 방송에 나간 건 여기까집니다. 다른 국내 언론들도 마찬가지지요.

이후 피스토리우스는 1심에서 일단 보석으로 풀려났습니다. 불구속 상태에서 계속 조사를 받고 있지만 조사 내용이 공개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다음 재판이 열리는 6월 이전엔 사건의 최종 결과를 미리 점치기 힘든 상황입니다. 그러다보니 외신들 역시 대부분 촉각을 곤두세운 채 6월만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가운데 어제 CNN이 상당히 재미있는 보도를 했습니다. 보석된 피스토리우스가 매주 2번씩 경찰에 나가서 조사를 받아야 하지만 실제로는 거꾸로 경찰이 '가끔 한번 씩' 피스토리우스의 집을 찾아서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사실이라면 경찰이 공정하지 못하게 '피의자'인 피스토리우스를 '받들어 모시고' 있다는 얘깁니다.

CNN은 또 피스토리우스 지인들과 현지 언론인 인터뷰를 통해 피스토리우스가 실은 걸핏하면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어서 다투는 '문제아'였고, 언제나 어딜 가든 총기를 들고 다녔고, 법에 허용된 4자루보다 더 많은 총기를 구입하기 위해 총기 수집가 자격증까지 신청했었던 사실 등을 폭로했습니다. 그러면서 피스토리우스의 이런 '어두운 이면'들을 가까운 이들은 물론 경찰이나 언론까지도 모두 알면서 그동안 내내 '쉬쉬했다'고 보도했습니다.

구체적인 예도 들었습니다. 피스토리우스는 지난 2009년 보트를 몰다가 사고를 낸 적 있는데, 직접 언론 인터뷰에서 "죽을뻔 했다"고 밝혔을 만큼 큰 사고였습니다. 그런데 사고 직후 경찰은 피스토리우스의 보트에서 술병이 나와서 음주사고 여부를 조사중이라고 밝혔다가 이 사실이 보도되자 바로 다음날 "그런말 한 적 없다"고 말을 바꿨습니다. 경찰은 심지어 보트를 운전한 사람이 피스토리우스였다는 사실 조차 확인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운전 실수로 사고를 낸 데 대해서도 아무 책임을 묻지 않고 사건을 접었습니다. 피스토리우스를 치료한 의사 역시 "별 사고 아니었고 경미한 부상이었다"며 사고 규모를 축소하는데 거들었습니다.

이런 폭로가 연일 쏟아져 나오고 있는 가운데, 평소 피스토리우스에게 비판적인 '소수' 가운데 한 명이었다는 한 현지 언론인은 피스토리우스는 사실 '영웅'이 아니라 '말썽꾸러기 운동선수'였지만, 대부분 언론이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피스토리우스를 떠받들기에만 급급해서 일부러 모른척 했다고 고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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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격 사건과 관련된 법원의 최종 판결이 어떻게 날 지는 예측할 수 없지만, 이런 폭로들을 감안하면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한 것 같습니다. 피스토리우스가 트랙에서는 세계를 감동시킨 인간승리의 주인공 '블레이드 러너'였지만, 트랙 밖에서는 그다지 훌륭한 '인간'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 말입니다. 결국, 이번 사건이 '계획된 살인'이든 과실치사든 간에 방송에는 나가지도 못하고 사라졌던 제 '원래 기사'의 마지막 문장처럼 세계는 이미 또 한 명의 영웅을 잃어버린 겁니다.

그렇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걸까요? 물론, 일차적인 책임은 '쉬쉬하기에 급급했던' 경찰이나 언론, 주변인들에게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뿐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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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이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영웅에 목말라합니다. 대상이 운동선수가 됐든 정치인이 됐든 연예인이 됐든, 언론이(부끄럽게도, 저와 SBS를 포함해서!) 기회만 있으면 영웅 만들기에 급급한 건 사람들의 이런 갈증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변명합니다. 팍팍한 세상을 살아내는데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고 희망을 주기 위해서 어떻게든 영웅을 '발굴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대충 알면서도 모르는 척 속아줍니다. 이런 현실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일까요? CNN 카메라 앞에 직접 나서서 피스토리우스의 '이면'을 폭로한 어떤 이의 인터뷰가 오늘 귀에 날카롭게 꽂혔습니다: "우리(모두)가 이런 일이 일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던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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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을 찾을 수 없는 갈증과 영웅을 잃어버린 상실감은 어느 편이 더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걸까요? 무엇보다, '영웅'이라는 게 꼭 그렇게 필요한 걸까요? 그렇게 만들어진 영웅들은 과연 정말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걸까요?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진 이 사건이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화두가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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