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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자꾸 바뀌는 사면의 논리

청와대의 앞뒤 안맞는 특별사면

[취재파일] 자꾸 바뀌는 사면의 논리
이명박 대통령이 새해를 맞아 55명을 특별 사면했습니다. 이번 사면의 잘못된 점에 대해선 많은 매체들이 이미 지적하고 있으니 하나 하나 따지진 않겠습니다. 다만 청와대가 스스로 내건 약속을 지켰는지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분석해보겠습니다.

재임 중 비리, 사면은 없다?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초인 2008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재임 중 비리에 사면은 없다'는 원칙을 천명합니다. 당시 이 대통령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보겠습니다.

"건국 60주년의 새로운 출발과 국민 통합을 위해 사면을 단행했습니다만, 이제 제 임기 동안 일어나는 비리와 부정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지 않을 것입니다."

- 이명박 대통령 2008년 광복절 경축사, "위대한 국민, 새로운 꿈" 중에서 -


광복절 경축사는 대한민국 대통령이 국정의 핵심 과제를 제시하는 중요한 연설입니다. 미국으로 치면 대통령의 '국회 시정 연설'(State of Union)에 해당합니다. 역대 대통령들은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대담한 대북 제안, 과감한 경제 개혁 조치를 발표했습니다. 청와대 참모들과 대통령 본인이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연설이기도 합니다. 별 생각 없이 단어를 고르고, 책임감 없이 큰 소리를 치는 자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바로 그 광복절 경축사에서 이 대통령은 "이제 제 임기 동안 일어나는 비리와 부정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분명히 약속했습니다.

'재임 중 비리' 저지르고도 사면된 사람만 8명 이상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이번에 발표된 임기 말 특별 사면 명단을 보니 이명박 대통령 재임 중 저지른 비리로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된 인물들이 8명 이상 포함돼 있습니다.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
이명박 대통령 재임 중인 2008년 건설사 대표 로부터 워크아웃 관련 청탁을 받고 10억원 이상 수수  혐의 유죄(혐의 내용 가운데 이 대통령 재임 중 비리 부분)

2. 박희태 전 국회의장:
이명박 대통령 재임 중인 2008년 한나라당 전당대회 돈봉투 살포 혐의 유죄

3. 김효재 전 청와대 정무수석:
이명박 대통령 재임 중인 2008년 한나라당 전당대회 돈봉투 살포 혐의 유죄

4. 현경병 전 한나라당 의원:
이명박 대통령 재임 중인 2008년~2009년 골프장 대표로부터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 유죄

5. 서청원 전 친박연대 대표:
이명박 대통령 재임 중인 18대 총선 과정에서 공천 헌금 수수 혐의 유죄

6. 장광근 전 한나라당 의원:
이명박 대통령 재임 기간이 포함되는 2005년~2010년 불법 정치자금 5784만원 수수 유죄

7. 이해수 전 한국노총 부산본부 의장:
이명박 대통령 재임 중인 2009년~2011년 보조금 횡령 혐의 유죄

8. 남중수 전 KT 사장:
이명박 대통령 재임 중인 2008년 KT 하청을 관련 청탁을 받고 금품 수수 혐의 유죄((혐의 내용 가운데 이 대통령 재임 중 비리 부분)

자꾸만 바뀌는 '재임 중 비리'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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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광복절 경축사 약속을 정면으로 뒤집은 이 같은 사면 결과를 발표하면서, 청와대는 2008년과는 사뭇 다른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국무 회의 발언을 박정하 청와대 대변인은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재임 중 발생한 권력형 비리에 대한 사면은 하지 않겠다고 발표한 적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번 사면도 그 원칙에 입각해서 실시했다"

"제 임기 동안 일어나는 비리와 부정"이란 워딩에 아무런 설명 없이 '권력형'이라는 수식어가 첨가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축은행 비리 사건'이나 '민간인 사찰 사건' 등 '권력형 비리' 연루자는 제외했다고 청와대는 자평했습니다. 즉, 위에서 열거한 천신일 회장, 서청원 전 친박연대 대표, 박희태 전 국회의장 등은 청와대의 권력을 이용해 비리를 저지른 것은 아니기 때문에, 재임 중 권력형 비리 사범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논리입니다.

이건 국어 해석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2008년 8월 15일 이명박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를 들었던 수많은 국민들 가운데 "제 임기동안 일어나는 비리와 부정"이라는 말을 저축은행 사건이나 민간인 사찰 같은 청와대 전현직 직원이 직접 개입한 비리 사건으로 축소해 이해한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요? 그렇다면 대통령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작성한다는 광복절 경축사 연설에서 왜 '권력형'이라는 단어를 생략했을까요? 단순한 실수일까요? 국민들과 청와대의 국어 실력 차이인가요? 

선의를 최대한 발휘해, 2008년 약속 당시에도 '권력형'이라는 의미가 담겨있었다고 칩시다. 그런데 2009년에 이명박 대통령이 사면을 단행할 때, 정부가 기자들에게 제시한 논리는 또 다릅니다.

2009년엔 또 다른 논리

2009년 광복절 특별 사면 당시 법무부는 기자들을 상대로 브리핑을 진행했습니다. 당시에는 18대 총선 과정에서 공천 비리 혐의로 형이 확정된 서청원 전 친박연대 대표에 대한 '감형'이 논란이 됐습니다. 불과 1년 전에 약속한 '재임 중 비리 사면안 한다'는 약속에 정면으로 위반되는 사례 아니냐는 지적이 많았습니다. 이에 대해 당시 최교일 법무부 검찰국장(現 서울중앙지검장)의 설명은 아래와 같습니다.

기자: 서청원 전 친박연대 대표의 구체적인 사면 이유는?

최교일 법무부 검찰국장: 재임 중 비리를 저지른 사람은 사면하지 않는다는 게 원칙이지만 서 전 의원의 경우 심근경색증과 돌연사 위험, 디스크 등의 지병으로 작년 7월30일 형집행정지를 받았으며, 현재도 건강이 좋지 않은 점 등을 고려했다. 그러나 사면을 하더라도 남은 형기의 절반을 감형하는 것일 뿐 나머지 형기는 채워야 하며, 선거에 출마할 수 있는 권리를 회복시켜주는 것도 아니다.

- 2009년 8월 13일 법무부의 특별사면 관련 브리핑 중에서 -


최교일 당시 검찰국장의 말은 결국 서청원 대표의 경우도 이명박 대통령 이 약속했던 '재임 중 비리'에 해당한다고 볼 수는 있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건강이 크게 악화돼서 형을 줄여주기는 하되, 바로 풀어주지도 않고 복권도 시켜주지 않는다는 취지입니다.

그런데 청와대는 이번엔 서청원 전 대표에 대해 '측근의 권력형 비리'가 아니라는 이유로 특별 복권시켜줬습니다. 2009년엔 '재임 중 비리'에 해당한다는 취지였다가, 2013년에는 '재임 중 권력형 비리'가 아니라 '특별 복권'을 해줬다? 자꾸만 말이 바뀌는 게 아무리 살펴봐도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재임 중 권력형 비리' 제외한 건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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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번을 양보해, 2008년 광복절에 한 이 대통령의 약속이 '측근들이 권력을 이용해 저지른 비리'에만 국한된다고 이해하더라도, 여전히 문제가 있습니다. 적어도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의 경우는 '재임 중에 측근이 권력을 이용해 저지른 비리'의 유형에 완벽하게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일단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이 이명박 대통열의 최측근이라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저도 구구히 천 회장과 이 대통령이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지에 논하지 않겠습니다.

천 회장의 죄명은 '알선수재'입니다. 적용 법조는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7조입니다.

[제7조(알선수재의 죄) 금융회사등의 임직원의 직무에 속하는 사항의 알선에 관하여 금품이나 그 밖의 이익을 수수, 요구 또는 약속한 사람 또는 제3자에게 이를 공여하게 하거나 공여하게 할 것을 요구 또는 약속한 사람은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천 회장의 혐의는 한 건설사의 워크아웃을 막아주는 대가로 건설사 대표로부터 거액을 돈을 수수한 것입니다. 채권자였던 산업은행이 실제로 결정을 미뤄주면서 해당 건설사는 회생할 수 있었고, 천 회장은 거액을 챙겼습니다.

천 회장이 산업은행의 워크아웃 결정을 미뤄주는데 어떤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부도 위기에 처한 건설사 대표의 눈에 천 회장이 '워크아웃을 막아줄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으로보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으로 인식됐던 것이죠. 천 회장의 그 힘은 어디서 나왔나요? 천 회장의 인격과 사업적 능력 때문이라기 보다는, 대통령과의 관계 때문입니다. 전형적인 '측근 권력'인 것이죠. 사정이 이런데도, '측근의 권력형 비리'는 사면 대상에서 제외했다고 어떻게 말할 수가 있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이번 특별 사면에 대해 청와대도 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 지난 정부도 다 했다. 그 때는 재벌도 해줬다. 우리는 종전보다 규모도 작다. 그러나 이런 저런 변명을 하기에 앞서,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한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단순한 사실부터 되돌아봤으면 좋겠습니다. 자꾸만 말을 바꾸고, 이치에 닿지 않는 변명으로 일관하는 태도는 5년 정권의 아름다운 마무리보다는, 마지막까지 이해 관계자들을 챙겨주는 구질구질한 퇴각에 가까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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