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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X파일 판례'를 바꿔야 하는 이유

한 건의 기소보다 더 중요한 것

[취재파일] 'X파일 판례'를 바꿔야 하는 이유
검찰이 정수장학회 최필립 이사장과 이진숙 MBC 본부장 등의 대화를 엿듣고 녹음한 혐의로 한겨레신문 최성진 기자를 불구속기소했습니다. 검찰이 재구성한 당시 상황은 이렇습니다. 최성진 기자가 최필립 이사장과 통화를 했습니다. 대화를 마친 최 이사장이 스마트폰 조작 미숙으로 전화를 미처 끊지 못했습니다. 전화가 연결된 상태에서 최 이사장은 MBC 이진숙 본부장 등과 정수장학회 관련 대화를 나눴고, 전화기를 통해 대화 내용을 '엿들은' 최성진 기자가 스마트폰 녹음 기능을 이용해 대화를 녹음했다는 것입니다. 최성진 기자의 행위는 타인의 대화비밀 침해를 금지한 통신비밀 보호법 14조 1항을 위반해 죄가 된다는 것이 검찰의 판단입니다.

통신비밀보호법 제14조(타인의 대화비밀 침해금지)
(1) 누구든지 공개되지 아니한 타인간의 대화를 녹음하거나 전자장치 또는 기계적 수단을 이용하여 청취할 수 없다.

[*최필립 이사장이나 이진숙 본부장과 달리 최성진 기자는 '공적인 인물'로 보기는 어려우나, 본인이 실명을 밝혀달라고 공개적으로 요구하고 있어 실명을 적시합니다.]


핵심 논점은 최성진 기자의 보도가 '위법성 조각 사유'에 해당 하느냐 입니다. '위법성 조각사유'는 위법성을 배제하는 특별한 사유를 뜻하는 데요, 형벌을 규정한 조문에 해당하는 행위가 일단 위법한 것(형식적 위법)으로 판단되더라도 행위가 실질적 사회적으로 상당한 것으로 인정될 경우에는 위법성을 배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도해법률용어사전, 조상원, 현암사, 2000]

쉽게 말해 법률을 위반했더라도, 그 행위가 사회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 인정될 때는 처벌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최 기자를 기소한 검찰도 이 점을 충분히 의식한 것으로 보입니다. 기소 이유를 밝힌 브리핑에서 위법성 조각 사유 논란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고, 검찰 역시 이에 대해 힘주어 설명했습니다.

검찰이 '위법성 조각이 안된다'고 본 근거는 "X파일 판례"였습니다. 'X파일 판례'란 삼성 그룹의 정관계 로비 정황을 보여주는 안기부 도청 테이프 를 MBC 이상호 기자가 보도한 사건에 대해 대법원이 유죄를 확정한 판례입니다.[이상호 기자에 대해 징역 6개월 및 자격정지 1년형을 선고유예]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언론의 자유가 중요하지만 개인의 통신 비밀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만 인정된다"고 전제하고 "개인대화를 언론을 통해 보도하려면 공공이익 및 공중의 정당한 관심이 있어야 한다"며 "이번 경우는 정당행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도청의 결과물을 이용한 보도는 '위법성 조각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판례를 확립한 것입니다.

검찰관계자는 '정수장학회 관련 대화내용 보도'에 대해 위법성 조각 사유를 고려해야 하지않냐는 기자의 질문에 'X파일 판례'를 근거로 대며 답합니다.
"충분히 고려해볼 소지도 있는데. 지난번 X파일 사건이나 이번것도 비슷한데 설사 공익성이 인정된다 하더라도  기자가 직접 소위 도청에 직접 적극적으로관여를 한 것이 때문에.. X파일은 감청은 다른 사람이 하고 받아서보도한건데 대법원 판례 보더라도 (이번 같이 본인이 직접) 적극적으로 (도청)한 경우는 공익성 정도도 약하게 볼 수밖에 없다고 하기 때문에..그래서 기소하기로 (했습니다.)"

'정수장학회 대화 보도'가 정당 행위에 해당하는지 고려해보았지만, 이번 경우보다 도청의 가담 정도가 약하고, 공익성 또한 가볍지 않은 'X파일'의 경우에도 대법원이 유죄를 선고했기 때문에, 검찰로서는 이번에도 기소하지 않을 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검찰의 판단에 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법률가로서 대법원 판례에 따라 기소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검찰의 주장이 논리적으로 타당한 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소 편의주의'를 통해 기소권을 독점하고 있는 검찰은 '정당행위'를 적극적으로 판단해 불기소할 수 있는 재량권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정수장학회 관련된 최성진 기자의 '대화 내용 보도'는, 대화 내용에 대한 최성진 기자의 해석이 타당하느냐와는 별도로, 사회적으로 보도할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재화 변호사가 트위터에 밝힌 의견, "검사에게 기소여부에 대한 재량권을 둔 취지는 형식상 범죄가 성립하나 처벌의 필요성이 없을 때 기소유예하라는 것. 최성진 기자의 정수장학회 보도는 전형적인 기소유예 사안. 검찰, 죄가 성립하는지도 논란있고 처벌필요성도 없는 이 사건 기소유예했어야."에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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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검찰은 정당행위에 대해 적극적 해석을 하지 않고, 대법원 판례에 따라 기소할수 밖에 없다는 보수적 태도를 선택했습니다. 검찰이 이런 태도를 선택한 이상, 이제 관심은 법원이 과연 다시 불거진 이 사건에서 대법원 선례를 따를 것이냐, 아니면 새로운 판단을 내릴 것인가 입니다. "X파일 판례"가 깨지지 않는한 제2, 제3의 '정수장학회 대화 보도' 'X파일 사건'이 발생했을 때, 기사를 쓴 기자는 또 다시 검찰에서 기소되고, 법원에서 또 다시 유죄판결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번 한 번의 경우에 대해 검찰이 기소를 하느냐 마느냐 보다, "X파일 판례"가 변경되느냐 마느냐가 더 중요한 이유입니다.

"X파일 유죄" 선고 때도 모든 재판관이 유죄 의견을 낸 것은 아닙니다. 재판관 12명 가운데 5명은 무죄 의견을 냈습니다.(당시 1명 공석) 박시환, 김지형, 이홍훈, 전수안, 이인복 대법관은 “도청 자료에 담긴 대화 내용이 여야 대통령 후보 진영에대한 정치자금 지원과 정치인·검찰 고위관계자에 대한 추석 떡값 지급 등의 문제로서 매우 중대한 공공의 이익과 관련돼 있어 보도는 정당행위"라며 무죄에 해당한다는 소수의견을 판결문에 남겼습니다. 과연 법원이 기존의 '다수 의견'을 따를 지, 아니면 소수 의견을 새로운 판례로 채택할 지 지켜 볼 일입니다.

글을 마치기 전에 마지막으로 상상해봅니다.

거물급 취재원에게 전화를 겁니다. 취재원이 별 내용 없는 답변을 하고 전화를 끊습니다. 낙담해서 휴대전화를 집어 넣으려는데 갑자기 취재원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옵니다. 사회적으로 중요하고 의미 있는 내용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자, 기자인 나는 "공개되지 않은 타인간의 대화를 녹음하거나 전자장치 또는 기계적 수단을 이용하여 청취할 수 없다."는 통신비밀보호법을 준수하기 위해 전화를 스스로 끊어야 할까요? 아니면 공익적 목적을 위해 대화 내용을 듣고 보도해야 할까요?

어느 편이 더 상식과 공익에 부합한다고 보십니까? 이제 공은 법원으로 넘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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