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日 남자 유도의 몰락…'한판승' 집착 때문?

일본 남자 유도는 왜 몰락했나

[취재파일] 日 남자 유도의 몰락…'한판승' 집착 때문?
일본도 올림픽 시즌을 맞아 열기가 뜨겁다. 그러나 우리만큼 확 달아오르지는 않고 있다. 왜일까? 선진국이어서 이른바 ‘국가주의 체육’에 함몰되지 않고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서 차분한 것 아니겠냐고 점잖게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성적이 신통치 않아서’라는 것이 더 정답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기대에 못 미치고 줄줄이 나가떨어지다 보니, 올림픽이 남들의 잔치 같고 영 재미가 없는 것이다. 일본 방송들의 장기인 ‘선수들을 극적인 영웅으로 만들기’도 잘 먹히지 않는 분위기다. 동반 4강에 진출하며 선전하는 남녀 축구마저 없었다면, 일본에 ‘올림픽 열기가 있다’라고 표현하기도 어렵지 않았을까 싶다.

일본의 올림픽 열기를 결정적으로 가라앉게 만든 ‘주범’은 유도, 특히 남자 유도다. 지난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 유도가 첫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뒤 처음으로 이번 대회 일본 남자 유도는 ‘노 골드’로 마감했다. 매 대회마다 평균 3개 정도의 금메달을 따며 전통적인 ‘금메달 텃밭’이었던 남자 유도에서 처음으로 금 수확에 실패한 것이다. 그나마 여자 유도는 1개의 금메달을 따 체면치레를 했다. 유도 선수들이 줄줄이 조기에 탈락하다 보니, 중계하던 일본 방송사들이 미처 준비했던 시간을 때우지 못하고 당황해할 정도로 일본 유도는 부진했다.

일본 국민과 언론은 정말 큰 충격을 받은 것 같다. ‘노 골드’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자 ‘혹시 노 골드로 끝나는 것 아니냐’는 초조함이 방송 중계멘트 등 곳곳에서 느껴졌고, 결국 ‘노 골드’로 끝나자 방송과 신문은 낙담하며 부진한 이유에 대한 분석 기사를 쏟아냈다. 기사에 나온 ‘몰락’, ‘굴욕’ 등의 표현에는 깊은 탄식이 배어 있었다. 금메달은 없지만 은메달 2개, 동메달 2개면 그래도 위안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 일본에게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성적표인 것 같다. ‘현대 유도의 종주국’으로서 자부심이 강한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깊은 상처를 받을 줄은 몰랐다.

일본 유도의 몰락에 대한 일본 언론들의 분석은 대체로 일치한다. 일본이 현대 유도의 흐름, 특히 최근 새로 바뀐 룰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진단이다. 특히 지난 2009년 세계 유도 선수권 대회부터 도입된 포인트 랭킹제도에 대책이 없었다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지난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이 끝난 뒤 국제유도연맹은 유도의 박진감을 높이고 인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다른 종목들처럼 랭킹제와 포인트제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유도를 잘 모르는 일반인들도 편하게 볼 수 있게 점수는 ‘절반’이나 ‘유효’같은 어려운 전문 용어 대신 포인트로 표시하고, 선수들도 성적에 따라 순위를 매겨 재미를 배가시키겠다는 의도였다. 아사히신문은 이런 룰 변경을 ‘유도의 쇼 비즈니스화’라고까지 표현했다.



이미지
전문가들은 그러나 포인트제와 랭킹제가 모두 결과적으로 일본에게 큰 독이 됐다고 분석하고 있다. 먼저 포인트제의 경우 점수를 따기 위해 무엇보다 상대방의 샅바를 유리하게 잡는 것이  더욱 중요해졌는데, 외국 선수들이 월등한 힘을 앞세워 미처 잡을 틈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한판’ 같이 큰 기술을 쓰는 것보다 전략을 잘 세워 포인트를 차분히 쌓는 게 중요해져서, 일본 선수들의 장기인 기술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상대방의 전략에 말려 허둥대다 허무하게 패한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랭킹제도 불리하게 작용했다고 보고 있다.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남자는 22위 이상, 여자는 14위 이상에게만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에 랭킹을 올리기 위해서는 각종 대회에 출전해 점수를 따야한다. 따라서 국내외 많은 대회에 참가할 수밖에 없어 선수들의 피로가 쌓였고, 일본 특유의 기술을 전수하고 연마할 시간이 부족해졌다는 것이다. 특히 많은 대회 참가로 일본의 특기가 무방비로 노출돼 약점을 잡히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분석하고 있다. 일본 선수들의 약점을 파악한 상대방이 변칙적으로 나오자, 당황해 쩔쩔매다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 유도협회의 안일한 대응도 도마에 올랐다. 룰이 바뀐 뒤 일본 남자 유도는 지난 2009년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처음으로 ‘노 골드’에 그치는 등 변화가 필요하다는 사인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는데, 협회는 여전히 ‘한판승’을 추구하는 이른바 ‘아름다운 유도’에 집착했다고 한다. 다른 나라 선수들이 바뀐 룰에 적응하기 위해 땀을 흘리고 있을 때, 일본 유도는 여전히 전통만을 고집하며 옛 방식을 답습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이번 올림픽 대회 직전 가진 강화 합숙훈련에서조차 일본 코치진은 다른 나라 코치들처럼 상대방 선수에게 ‘지도’를 받도록 만드는 노림수나 등 쪽의 샅바를 잡는 변칙 기술에 대응하는 법 같은 실전 대책에 대해 전혀 가르치지 않았다고 일본 언론은 지적하고 있다.

일본 신문의 기사를 읽으면서 ‘아, 이런 사정이 있었구나’라고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왜 이번 올림픽에서 시원한 한판승이 줄었는지, 또 선수들 간의 지루한 신경전이 계속됐는지도 이해가 됐다. 하지만 무엇보다 일본 유도가 몰락한 가장 큰 이유가 ‘변화에 대한 적응 실패’라는 점이 눈에 확 들어왔다. 많은 일본 기업들-특히 전자와 IT기업들-의 쇠퇴의 원인으로 지목된 이른바 ‘갈라파고스 현상’이 유도에서도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외부의 변화에 눈을 감고 자신들만의 표준을 고집함으로써 스스로 고립되는 ‘갈라파고스 현상’은 스포츠도 예외가 아니었구나 싶었다.  

특히 ‘아름다운 유도에 집착했다’라는 표현이 눈길을 끌었다. 종목은 다르지만 일본 바둑의 몰락 이유와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바둑도 ‘현대 바둑의 종주국’을 자처하며 화려한 전성기를 구가하다 한국과 중국에 밀려 몰락했는데, 그 이유에 대해 많은 전문가들은 “전통적인 아름다운 수에 집착하다가 현대바둑의 빠른 변화를 놓치며 실전에 약해지게 됐다”라는 분석을 한다. 그런데 같은 문장에서 ‘아름다운 수’ 대신 ‘아름다운 기술’을, ‘바둑’ 대신 ‘유도’로 바꿔놓으면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두 종목의 몰락 이유는 무척 흡사하다.

물론 이번 올림픽 대회 결과만을 놓고 일본 유도도 일본 바둑처럼 몰락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아직 많이 이른 것 같다. 어찌 보면 일본 언론이 호들갑을 떠는 것 같기도 하다. 일본 언론의 분석대로 적응이 부족했고 실력은 여전히 건재하다면, 다음 대회부터 착실히 준비하면 그만일 것이다. 오히려 이번 부진을 분위기 쇄신의 기회로 삼으려 과도한 질책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이번 대회 결과가 일시적인 부진이 아닌 것 같다. 구조적인 문제에 가깝지 않나 싶다. 적응력도 실력인데, 일본이 가장 약한 것이 이 부분이기 때문이다. ‘실력은 있는데, 바뀐 환경에 적응을 못해서 실패했다’라는 이야기는 일본에서 참 많이도 들었던 변명이다. 더욱이 일본 유도는 가장 보수적인 것으로 유명하다. 하루 아침에 체질이 기민하게 바뀔 리가 없다. 일본 유도의 몰락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좋은 반면교사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