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즉석 만남의 명소, 경포의 변신 ?

경포 해변 음주 규제 효과는?

[취재파일] 즉석 만남의 명소, 경포의 변신 ?
scene # 1

“밤이 되면 해수욕장은 어느새 삼삼오오 짝을 지어 몰려다니는 청소년들로 북적거리기 시작합니다 ... 같이 놀 이성을 찾는 이른바 부킹을 하려는 청소년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닙니다  ... 이미 짝을 이룬 남녀 학생들이 백사장에서 술판을 벌이는 모습이 여기 저기 눈에 띕니다 ... 한껏 분위기가 고조되자 여기저기서 밤하늘을 찌를 듯한 폭죽과 괴성이 쏟아집니다 ... 만취한 한 여학생은 몸조차 가누지 못한 채 남학생의 부축을 받으며 어디론가 가고 있습니다. ”

scene # 2

“ 발디딜 틈 없이 젊은이들의 술판이 벌어졌습니다 ...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해변을 걷고, 물속으로 뛰어들어 위험한 장난도 벌입니다. 만취한 여성은 남자친구 등에 업혀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폭죽은 밤새도록 시끄럽습니다 ... 백사장은 온통 쓰레기장으로 변했습니다. ”

두 장면이 너무도 비슷하다. 둘 모두 같은 장소인 경포해변의 피서철 밤풍경. 그러나 첫 번째 장면은 2000년 8월 1일에 방영된 SBS 8뉴스의 한 장면이고 두 번째는 정확히 10년 뒤인 2010년 8월 1일에 역시 같은 SBS 8뉴스를 통해 방영된 뉴스 기사의 일부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경포의 여름 밤 문화는 10년이 지나도 바뀐 게 전혀 없다. 젊은이들이 모여 술 마시고, 노래하고, 쓰레기를 버리는 그들만의 흥청망청식 피서 말이다. 가족단위 피서객들이 감히 끼어들기 어려운, 끼어들어도 그들의 놀이 형태와 소란을 견뎌내기 힘든 상황 말이다.

다른 해변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부산의 해운대는 강릉 경포와 더불어 인터넷 상에서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이른바 ‘물 좋은 장소’, ‘즉석만남의 명소’로 유명해져 있다. 해마다 여름철이면 이런 분위기를 기대하고 전국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소위 ‘명소’를 찾아 경포와 해운대로 몰려들고 있는 게 엄연한 사실이다.
이미지

피서철 해변의 이런 밤 문화를 바꿔보겠다며 경찰이 나섰다. 강릉 경찰서는 젊은이들의 그들만의 ‘밤 문화’를 개선하기 위해 올여름부터 경포 해변에서의 음주를 규제하기 시작했다. 젊은이들이 점령해 버린 해변을 가족과 어린이 피서객들에게 돌려주기 위해서다. 술에 취해 벌어지는 각종 충돌과 안전사고, 쓰레기 문제도 함께 해결해 보겠다는 기대를 걸고서 말이다.

과연 효과는 있을까? 주말인 지난 21일 밤 경포해변을 찾아갔다. 밤 9시, 어깨띠를 두른 경찰과 민간단체 회원, 시청 공무원들이 해변과 주변 송림 사이를 누비며 젊은이들에게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었다. “해변에서 음주를 하지 말자”는 내용의 전단지다. 비닐봉지에 술과 안주를 사서 해변으로 들어오는 젊은이들에게도 술을 자제해달라며 금주 분위기를 조성했다. 며칠 전부터 뉴스와 소문을 통해 이런 소식을 접하고 있던 터라 젊은이들의 반발은 거의 없었다. 해변에서 술을 마시려는 젊은이들은 아주 소수에 불과했고 그 소수의 젊은이들도 가볍게 맥주 캔을 놓고 있거나, 소주 한 병을 두고 여러 명이 조금씩 나눠 먹고 있었다. 자정을 지날 때까지 수많은 젊은이들이 “즉석만남”의 기회를 찾으려고 해변을 드나들었지만 선뜻 “금주 분위기”를 깨뜨리려는 시도는 좀처럼 목격되지 않았다.

새벽 2시, 경포 해변의 청소가 시작되는 시각. 경포 해변 전용 청소차인 비치클리너(beach cleaner)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해변에 버려진 것이라곤 술병 몇 개와 먹다 남은 약간의 안주, 돗자리 3~4개, 모래 속에 묻힌 무수한 담배꽁초 정도 ... 10년 가까이 경포 해변을 청소해온 비치클리너 운전기사는 “올해처럼 쓰레기가 줄어든 것은 처음 본다”고 했다. “아직 최대 성수기가 아닌데다 부슬비가 오락가락했던 것을 감안하더라도 예년의 쓰레기 량보다 절반 이상 줄었다”고 말했다. 아직 8월 중순까지 피서 절정기가 남아있어 더 두고 봐야 알겠지만 변화의 움직임은 분명 보이기 시작했다.
이미지

사실 경찰의 규제는 말뿐인 헛구호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해변에서 음주를 강제로 규제한다’는 것은 우리나라 어느 법조항에서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법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당연히 강제할 수 없는 것이다. 경찰이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법적 무기는 "청소년보호법“과 “경범죄 처벌법”, “경찰관 직무집행법”, “폐기물 관리법”정도이다. 즉, “청소년에게 술을 판매했을 때나(청소년 보호법), 담배꽁초나 휴지, 쓰레기를 해변에 버리고 갈 경우(경범죄처벌법, 폐기물관리법), 술을 먹고 소란을 피우거나 크게 떠들 경우(경범죄 처벌법) 벌금을 부과 하고, 주변 사람들의 생명이나 신체, 재산에 위해를 가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 제지”하는(경찰관직무집행법) 수준이다. 해변에서 음주 자체를 금지시킬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의 의지는 단호하다. 잘못된 문화는 분명 개선해야겠다는 것이다. 경찰은 ”해변에 쓰레기를 버리고 갈 경우에는 과학수사대를 동원해 지문을 채취해서라도 반드시 당사자를 찾아내 처벌 하겠다‘고 밝힐 만큼 의지를 보이고 있다. 젊은이들의 반발과 특히 손님 감소를 우려하는 경포 주변 상인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금주 분위기를 계속 이어가겠다는 입장이다.

여론은 경찰에 상당히 우호적이다. 경포를 방문해 본적 있는 전국의 가족단위 피서객이나, 강릉 지역 시민들 대다수 그동안 젊은이들에게 빼앗겼던(?) 경포를 되돌려 받고 싶어 한다. “여유롭고 운치 있는 여름 밤바다를 감상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시민들의 이런 반응에 힘입어 강릉시와 시의회도 해변과 문화재보호구역 내에서 음주를 규제하는 조례안을 제정하기로 했다. 빨라야 9월 중순에나 제정이 가능하지만 시와 의회도 경찰의 조치에 힘을 보태겠다는 뜻이다.

경포 해변에서의 음주 자제 문화가 제대로 정착될 수 있을지 지금으로서는 장담할 수 없다. 그럼에도 경포의 이런 신선한 도전은 부산과 제주 등 전국의 유명 피서지 지자체로부터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저마다 비슷한 속병을 앓고 있었지만 선뜻 바꿔보려 시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강력한 규제 수단 없이 계도만으로 변화가 가능할까? 국민적 공감대만 있다면 자발적 참여만으로도 가능하지 않을까?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