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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전수안 前 대법관의 '우아한 경고'

▲ 전수안 전 대법관의 퇴임사 전체 영상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언젠가 유시민 전 의원이 "우리 사법부에는 왜 교과서에 실릴 만한 명판결문이 없느냐?"고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평론가 진중권 교수도 비슷한 말을 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거의 매일 판결문이나 공소장을 접하는 저도 비슷한 생각입니다. 정확할지는 모르지만 '아름답지 않은 문장'.. 법조인들의 글을 보며 항상 드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어제 전수안 전 대법관의 퇴임사를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사실 취재파일을 쓸까 말까 고민할 정도로 전수안 전 대법관의 퇴임사는 더하거나 뺄 것이 없는 명문이기 때문입니다. 구차하게 졸문을 더해 퇴임사의 빛을 바래게 하는 게 아닐까 걱정이 들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너무도 공감한 한 가지가 있어서 굳이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퇴임사의 압권은 역시 마지막 부분, 여성 법관들에게 드리는 당부입니다. 어제 열린 퇴임식에서 준비된 원고를 감정을 억제한 목소리로 또박 또박 읽어나가던 전수안 전 대법관은, 이 부분에 이르러서는 고개를 들고 추상같은 목소리로 당부의 말을 이어갔습니다. (동영상을 통해 직접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끝으로, 여성 법관들에게 당부합니다.
 
언젠가 여러분이 전체 법관의 다수가 되고 남성 법관이 소수가 되더라도, 여성대법관만으로 대법원을 구성하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전체 법관의 비율과 상관없이 양성평등하게 性比의 균형을 갖추어야 하는 이유는, 대법원은 대한민국 사법부의 상징이자 심장이기 때문입니다. 헌법기관은 그 구성만으로도 벌써 헌법적 가치와 원칙이 구현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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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안 전 대법관의 말은 단순한 가정이 아닙니다. 신임 법관 가운데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지난 2006년에는 36.4%였고, 지난 2009년에는 무려 47.8%로 절반 가까이 됐습니다. 지난 해에도 37.1%였습니다. 엘리트 법관으로 가는 상징으로 여겨지는 사법연수원 수석도 몇년 째 여성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언젠가 여러분이 전체 법관의 다수가 되고 남성 법관이 소수가 되더라도"라는 전수안 전 대법관의 말은 근거 없는 '협박'이 아니라, '우아한 경고'인 셈입니다.

전수안 전 대법관이 경고를 한 이유는 우리 사회가 곧 13명 모두 남성으로 채워진 대법원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대법관을 할 만한 연차에 적절한 여성 후보가 없다는 대법원의 설명에 여성 법관들은 오히려 더 분노하고 있습니다. 전체 9명의 대법관 가운데 2명이 여성이고, 인종과 정치적 성향이 임명의 주요한 고려 요소가 되는 미국 대법원과 굳이 비교하지 않더라도, 대법관 13명 모두가 남성인 대법원은 전체 국민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들에게 모욕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전수안 전 대법관의 퇴임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기념비적인 소수 의견과 명문장으로 빛나던 여성을 최고 법원의 법관으로 다시 임명하려면 얼마나 많은 사회적 자원이 투입되야 할까요? 실력과 인품을 갖춘 여성 인재가 수십년 법조계 생활을 거치며 공정성과 도덕성을 스스로 증명해야 하고, 또 적절한 정부와 여론과 국회의 지원이 뒷받침 되야 비로소 한 명의 대법관이 탄생할 수 있을 겁니다. 매해 연수원 수석을 차지하는 건 여성들이지만, 지금의 현실을 보면 유리천장이 결코 낮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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