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영화 "범죄와의 전쟁"과 강력 검사들

[취재파일] 영화 "범죄와의 전쟁"과 강력 검사들

주말에 영화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를 봤습니다. 최민식·하정우, 두 배우의 조합은 기대만큼 좋았습니다. 시사회 이후 입소문이 난 신인배우 김성균씨의 악역 연기도 볼만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가장 인상적으로 본 캐릭터는 강골 검사 '조범석'이었습니다. 조폭 피의자를 윽박지르고, 외압에 흔들리지 않고 거침 없이 수사를 전개하는 모습에서 그 동안 직간접적으로 접해왔던 여러 검사들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정확히 영화 제작진에게서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조범석 검사 '라는 캐릭터는 실존하는 강력 검사들의 실화에 근거를 두고 창작한 것이 틀림없어 보였습니다.

영화 감독이 가장 많이 참조한 실제 강력 검사는 지금은 검찰을 떠난 조승식 변호사인 것 같습니다. 조승식 변호사는 80년대 최대 폭력조직 서방파의 두목 김태촌씨를 구속하고, 가는 곳마다 토착 조직들을 와해시켜 조폭들에게 '해방이후 최고 악질 검사'로 불렸던 인물입니다. 조 변호사의 캐릭터나 수사 에피소드는 이미 여러 언론에서 보도한 바 있어, 아마 감독이 영화 제작과정에서 참고자료를 구하기도 쉬웠을 것입니다.

단적인 예로  영화에서 조범석 검사가 등장하는 인상적인 첫장면부터 실제 '조승식 검사'의 그림자가 엿보입니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조범석 검사는 죽도를 들고 구속 피의자 최민식씨를 사정 없이 폭행합니다. 아마 이 장면은 조승식 변호사가 실제로 검도 5단이었다는 점에서 모티브를 얻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조승식 변호사는 피의자를 폭행한 적이 없습니다. 폭행 장면은 순수한 영화적 허구이자 창작입니다. 다만 '검도를 잘 하는 검사'라는 캐릭터를 조승식 변호사로부터 차용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영화의 다른 장면들에서도 '조승식 검사'의 영향이 느껴집니다. 조폭 두목으로 분한 하정우가 일본인 가네야마와 형제의 결의를 맺는 의식을 치르는 장면, 야쿠자 보스 가네야마가 88올림픽에 기여한 공로로 정부로 부터 훈장을 받는 장면도 모두 조승식 검사의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조승식 검사는 부산의 폭력조직 칠성파를 수사할 당시 칠성파 두목과 일본 야쿠자 보스 가네야마가 형제의 결의를 맺는 장면이 촬영된 비디오 테이프를 찾아냈습니다. 또, 가네야마는 실제로 당시 한국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일본 폭력 조직과 한국 폭력 조직의 유착을 밝혀낸 조승식 검사의 수사 결과는 당시 큰 반향을 불러오기도 했습니다.

얼마 전 모 종편 방송국이 개국 특종이라며 보도한 한 운동선수 출신 연예인의 야쿠자 행사 참석 비디오는 조승식 검사가 발견해 이미 언론에 공개됐던 동영상입니다. 2003년 4월 6일 방송된 KBS 스페셜을 제작한 취재팀은  조승식 변호사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이  비디오를 공개한바 있습니다. 다만 KBS스페셜팀은 모 연예인이 이 자리에 참석한 장면을 공개하지는 않았습니다. KBS취재팀이 과연 이 장면을 못 보고 지나쳐서 공개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당시 19살이었던 모 연예인이 이 자리에 참석한 사실을 보도하는 것은 공익성과 아무 관련이 없다고 판단해 '보도'하지 않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영화를 보며 떠오르는 또 한명의 검사는 얼마 전 한화 김승연 회장의 횡령 및 배임 의혹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검찰을 떠난 남기춘 변호사입니다. 남 변호사도 이른바 '강력검사'의 맥을 잇는 정통파 수사 검사 출신입니다. 남기춘 변호사는 검사 시절 조승식 검사의 뒤를 이어 서방파 김태촌 수사를 마무리하고 구속 기소했습니다. (당시 남기춘 검사가 작성한 공소장은 서울중앙지검 청사에 있는 검찰 역사관에 전시돼 있습니다. 공소장 첫 장 서명란에는 조승식, 남기춘 두 검사의 이름이 모두 들어가 있습니다.) 또 교도소에서 출소한 후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영화까지 제작했던 양은이파 두목 조양은씨를 다시 구속하고 사형까지 구형하면서 조폭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인물도 남기춘 검사입니다.

이 영화 제작진과 배우는 '조범석' 검사의 외형적 측면을 구성하면서 남기춘 검사의 캐릭터를 의식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두꺼운 안경을 쓴 점이나, 강골 검사다운 풍채, 그리고 무엇보다 목소리나 딕션에서 배우가 남기춘 검사의 캐릭터를 참조한 부분이 엿보였습니다. 물론 그저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지만요. (남기춘 변호사 역시 앞에서 언급한 KBS 스페셜에 주요 인물로 등장합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조범석 검사의 캐릭터와 실제 남기춘 검사의 캐릭터를 비교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강력검사'는 검사들이 선망하는 인기 보직은 아닙니다. 법무부나 대검에서 정책적 과제나 인사행정을 담당하는 '기획 검사', 고위공무원이나 정치인의 비리를 수사하는 '특수 검사', 금융사건이나 대기업의 회계 부정 등을 파헤치는 '금조부(금융조세조사부) 검사'에 비해 화려한 조명도 덜하고, 대하는 피의자들은 더 거칠고 다루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끊이지 않는 위협과 흑색선전도  강력부 검사가 감당해야 할 과제입니다. 그러나 남들이 기피하는 일을 맡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강력부 검사들도 사명감이 남 다르고, 강력검사들끼리의 우정도 더 돈독하다고 합니다.  사회부 기자와 닮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또 이 글을 쓰기 위해 강력부 검사들에 대한 각종 자료를 찾아보면서, 지금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정치적 중립성과 공정성에 대해 검찰이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는 요즘과 달리 검사들이 조직폭력배를 대대적으로 소탕하던 당시, 국민들은 검찰에 박수를 보냈습니다. 꼭 조폭이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평범한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구체적인 거악'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검찰이 국민의 신뢰를 되찾기 위해서는 제도나 문화의 개선보다, 국민이 부여한 칼을 공정하고 성역 없이 휘두른다는 '본질의 회복'이 더 중요할 것입니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