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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17년 전 '고베 대지진'의 기억

[취재파일] 17년 전 '고베 대지진'의 기억

오늘 날짜가 눈에 익어 생각해보니 17년 전 오늘, 즉 1995년 1월 17일은 일본에서 고베 대지진이 일어난 날입니다.

한신·아와지 대지진, 혹은 고베 대지진으로 불리는 이 지진으로 일본에서는 6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숨지고 당시 일본 국내 총생산의 2.5%에 해당하는 10조 엔의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특히 고베 도심을 강타한 직하형 지진으로 철도와 도로 등 사회간접자본의 피해가 심각해 복구에 많은 인력과 재화가 투입됐습니다.

지진이 일어난 날은 제게도 좀 특별한 날이라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저는 당시 고등학교 졸업을 한 달도 남겨두지 않은 고3 수험생이었는데요, 당시에는 수능과 내신 외에도 일부 대학들에 한해 본고사를 시행하고 있었습니다. 크게 '가-나-다' 3개 군으로 나뉘어 본고사를 치렀는데, 지진이 일어난 1월 17일은 마지막 '다 군'의 시험날이었죠.

'다 군'에서 제가 본고사를 치른 학교는 외국어로 유명한 H대학교였습니다. 이미 '나 군'의 K대학 본고사를 봤고, 확신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시험에서 좋은 예감을 받은 터라 마지막 날의 H대학교 시험이 큰 부담은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 일단 시험 정도는 봐 두자.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새벽에 인천 집에서 서울행 국철을 타고 거의 2시간에 가까운 먼 거리를 이동해 회기역에 내려서 털레털레 오래된 상점가를 지나 외대 어딘가의 교실에 들어가 묵묵히 시험을 보고 나왔습니다. 과목도 영어 하나라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고 기억합니다. 나름 영어는 자신있는 과목이었지만 시험과목이 하나라서 오히려 여러 과목일 때보다 합격권에 들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후회해도 아무 소용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저 눈 앞에 펼쳐지는 지문을 읽고, 적당한 답을 찾고, 마킹을 확인하고, 다음 문제를 풀어 나갔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먼저 말을 걸어오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시험 시간을 제외하고는 포터블 레코더의 이어폰을 늘 꽂고 있었습니다.

시험이 끝나고 다시 온 길을 되짚어 회기역으로 향하다가, 문득 배가 고파졌습니다. 점심시간이었거든요.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H 대학의 교문을 나와 횡단보도를 건넌 뒤 회기역으로 향하는 길은 3~4층 정도 되는 낡은 상가 건물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다닥다닥 붙어 있는 구도심의 전형적인 역세권 상가지역이었습니다. 구멍가게와 화장품가게, 문구점, 레코드샵, 선물가게 같은 이런저런 소규모 점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판매대를 인도에까지 내놓고 영업을 하고 있었고, 그 사이사이에 분식집과 고깃집 들이 끼어있었습니다. 두 집 건너 하나 꼴로는 2층의 호프집과 술집, 노래방으로 올라가는 계단들의 입구가 인도에 바싹 붙어 검은 입을 벌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길의 중간쯤에 있는 한 분식집을 골라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만두를 찜통째 찌는 곳이 인도 쪽으로 살짝 나와 있었고, 찜통의 열기인지, 주방의 불 때문인지 내부는 따뜻하다 못해 후텁지근했습니다. 안경이 금세 뽀얗게 변했습니다. 자리가 다 차봐야 스무 명 정도 앉을 수 있는, 그다지 넓지 않은 분식집이었습니다.

구석에 앉아 라면과 김밥 한 줄을 주문하고, 외투를 벗어 옆의 의자에 걸치면서 주변을 살짝 둘러봤습니다.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입구를 바라보는 자리에 앉았는데, 시야의 오른쪽 위에 작은 TV 수상기가 들어왔습니다. 가만히 보니 모두들 TV를 보거나, 음식을 먹으면서도 TV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고 있는 눈치였습니다. TV에서는 뭔가 거대한 구조물을 위에서 촬영한 듯한 부감샷이 흐르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건 부서진 '도시'의 모습이었습니다. 그제서야 귀에서 이어폰을 뽑았습니다. 그때 TV에서 '특별방송' 형식으로 보여준 것이 바로 '고베 대지진'이었습니다.

                   



그때 TV에서 흘러나오던 기자나 아나운서의 보도 내용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어조나 목소리에서는 어렴풋하게 '이건 그래도 큰 일이니까 이렇게 보도하고는 있지만, 우리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잖아. 왜 이런 걸 해야 하지?' 하는 무관심(혹은 외면이나 안도)이 느껴졌습니다. 편견이라면 편견이고, 사실이 아니라면 그 역시 어쩔 수 없습니다만, 제게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역시 지진이나 화산 폭발은 한국에 살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웬만하면 직접 경험할 일이 없는 일이니까요. TV에서 흘러나오는 심드렁한(그렇게 들렸습니다) 목소리가 묘하게 마음의 표면을 긁었습니다.

왜일까요. 당시에는 그저 흘려버린 감정이었지만 그건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대학 입시라는 인생의 몇 안되는 변곡점을 간신히 통과한 수험생으로서, 제 앞에는 적어도 지난 세월보다는 많은 자유와 기회의 예감이 안개처럼 펼쳐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그걸 보는 기분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습니다. 마치 힘든 항해의 막바지에 이르러, 저 멀리 수평선 너머에 어렴풋이 항구의 따뜻한 불빛이 어른거리는 광경을 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큰 이변이 없는 한, 아마도 배는 조용히 바다를 미끄러져 얼마 지나지 않아 항구로 들어갈 테고, 그곳에서는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흥미로운 삶이 시작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만약 지금 이 시점에서 한국에, 혹은 서울에 지금 저 TV에서 보여주는 것 같은 큰 지진이 일어난다면, 저는 아마도 너무 억울해서 머리가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머릿속으로 굴리고 있는 생각을 현실에서 그대로 마주했을,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저 도시의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에 마음이 쓰였습니다. 그런 건 아마도, 제가 상상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이었겠죠.

저는 그 분식집에서 라면과 김밥 한 줄을 다 먹고, 값을 치르고 거리에 나와 다시 이어폰을 귀에 꽂고, 회기역에서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도착해서 다시 TV를 켜고 묵묵히 특집보도를 지켜봤습니다. 귀가하는 도중에 다른 생각들을 하느라, 분식집에서 느꼈던 옅은 분노와 연민의 감정은 이미 사라진 뒤였습니다. 일상은 그 뒤로도 잔잔하게 흘러갔고, 며칠 뒤 H대가 아닌 K대학교에서 합격통지를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H대학의 본고사를 본 날의 우울한 기억 따위는 그냥 속으로 모두 지워버리는 게 가능했습니다.

제가 회기역과 H대 정문을 잇는 그 길을 다시 오가게 된 건 병역을 마친 뒤, 모교 근처에 비해 상대적으로 전세가 싼 H대 후문 쪽에서 자취를 시작한 이후였습니다. 그게 2000년 1월의 일이었으니, 정확하게 5년이 지난 거죠. 아무 생각없이 상가 건물들을 지나치다가도, 가끔 H대에서 본고사를 본 1995년 1월 17일의 일들이 떠오르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마음속으로 '그러면 안 되잖아'하며 비난했던 기자와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문득문득 되살아났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건조한 목소리는 저에게 어떤 의미에서는 '소식을 전하는 자'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반면교사' 역할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H대 후문 반지하의 어두운 자취방에서 하루 하루를 씹어 넘기면서 어찌어찌 언론사 시험준비를 했고, 다행히 1년 반 뒤에는 원하던 기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지난해 3월 11일에 대지진과 쓰나미가 동일본을 강타했습니다. 이번에는 고베-한신 지역이 아닌 동북지방이었습니다. 일본으로서는 고베 대지진 이후 16년만의 큰 재해였고, 저는 회사에 급히 꾸려진 특별 취재팀의 일원으로 현지에 파견됐습니다. 회기역 근처 작은 분식집에서 고베 대지진에 대한 보도를 보면서 당시 기자의 말투에 불편해하던 제가 어느덧 그 자리에 서게 된 겁니다. TV를 통해 방송된 제 목소리가, 화면 속에서의 제 움직임이, 그걸 보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느낌을 주었는지 저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만, 단 한 가지, 그 안에서 무관심이나 외면, 혹은 귀찮음의 기색이 느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어제 저는 선배 기자의 지인을 통해 우연히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일본의 한 고위직 외교관을 만나게 됐습니다. 취재가 목적인 자리는 아니었지만 식사 테이블 위에서는 후쿠시마 원전 사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책임론에 대해 상당히 논쟁적인 대화가 오갔습니다. 분위기가 애매해질 것 같아서 그 자리에서는 차마 얘기하지 못했지만, 사실 제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정부가 재해 자체를 통제할 수 없다는 건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다. 정부가 할 일은, 재해가 발생한 뒤에 가능한 한 빨리 재해 이전의 상태로 사람들의 생활을 되돌리려는 노력이고, 재해 이후 사람들의 생활이 비참하게 망가지기 전에 복구에 필요한 것들을 효율적으로 동원하기 위한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다. 만약 최악의 경우, 어떤 노력이나 궁리를 통해서도 사람들의 일상 생활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정부는 되도록이면 솔직하게 그것이 불가능한 이유를 설명하고, 사람들의 양해를 구하고,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 과연 일본 정부가 지금 그런 자세를 갖고 있느냐.

어쩌면 그때 제 마음 속에서는, 1995년 1월 17일에 어렴풋이 떠올랐다 사라졌던,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동갑내기 일본인 고등학생의 이미지가 되살아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냉정해야 할 기자의 글 치고는 지나치게 감상적이라고 비난하셔도 할 수 없지만, 지난 고베 대지진과 이번 동일본 대지진을 겪은 수십, 혹은 수백만은 될 일본의 1976년생 동갑내기들에게, 이 자리를 빌어 작은 응원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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