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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고급제품 수입'…재벌 후계자들 새로운 화두인가

[취재파일] '고급제품 수입'…재벌 후계자들 새로운 화두인가

아침부터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외손녀, 그러니까 신영자 롯데쇼핑 사장의 차녀인 장선윤 씨와 장 씨의 남편인 양성욱 씨가 모두 유통업에 종사한다는 짤막한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양성욱 사장은 지난해 9월 '생활문화전문기업'을 표방한 '브이앤라이프(V&Life)'란 회사를 세웠는데, 속을 들여다보니 외국 생활용품을 직수입해서 판매하는 사업체라고 한다. 독일 알바트(Albaad) 사가 출시한 유아용 고급 물티슈 '포이달(feudal)'의 아시아 지역 독점 판매권을 확보해 다음 달부터 시중에 유통할 방침이고, 후속 제품으로는 생리대를 비롯한 여성용 위생용품을 구상 중이라고 한다.

장선윤 씨도 빵 제조와 유통, 와인수입 사업을 하는 '블리스'를 설립했다. 블리스는 프랑스 식품업체 '포숑'을 들여와 고급 베이커리를 지향하며 사업을 확장해가고 있다.

'브이앤라이프'는 수입생활용품을 롯데마트와 롯데슈퍼 등 롯데 계열사의 유통라인을 통해 우선 공급하면서 판매망을 늘려갈 계획이라고 밝혔고, 블리스란 빵집은 전국 롯데백화점 12곳에 지점을 내 매출을 늘려가고 있다. 물론 나름대로 고민이 없지 않겠지만, 재벌 2~3세가 가족이나 인척이 기반을 다진 회사를 바탕으로 사업 확대를 꾀한다는 비판이 나오는 대목이다.

재벌가 자녀들이 손쉬운 사업에만 몰두한다는 논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특히 재벌 딸들이 너도나도 난데없이 빵집 사업에 열을 올리는 것에 대해 시선이 곱지 않다.

이건희 삼성 회장의 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은 신라호텔이 100% 지분을 보유한 계열사 보나비를 통해 커피전문점 '아티제'를 운영하고 있고, 이명희 신세계 회장의 딸 정유경 신세계 부사장은 프랑스 유명 베이커리 '달로와요'를 들여왔다. 현대차그룹 정몽구 회장의 딸 정성이 전무도 '오젠'이라는 브랜드를 달고 베이커리 사업을 하고 있다. 아티제 커피는 전체 커피전문점 가운데 가장 비싸고, 일본 유명 디자이너가 매장 디자인을 했다며 고급화 전략을 펼치고 있다. 다른 빵집들도 조각케이크 하나에 5000원씩 할 정도로 비싼데 고급이미지를 등에 업고 매출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중소기업 중앙회는 재벌가 딸들이 커피전문점과 제과점을 결합한 형태의 '럭셔리 베이커리' 사업에 진출한 것이 동네 빵집들의 입지를 더욱 좁히고 있다고 반발하고 있다. 동네 빵집이 8년 만에 78%나 사라진 것과 무관치 않다는 입장이다.

그 부분에선 생각이 약간 다르다. 동네 빵집이 무너진 건 파리바께뜨, 뚜레주르 등 대기업 계열 프랜차이즈가 너무 빠른 속도로 확장된 영향이 크다. 가격대가 다르고 입점 위치가 다르기 때문에,  '고급빵집 때문에 동네 빵집이 사라진 것이다'는 이분법적인 대결구도로만 비판할 수는 없는 문제다.

문제의 핵심은 이들이 사업을 확장해나가는 방식이 다분히 불공정하다는데 있다.

아티제는 삼성본관을 비롯해 삼성계열사를 중심으로 입점하며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고, 정유경 신세계 부사장이 운영하는 빵집은 신세계 백화점과 이마트에 빵과 피자를 납품하고 있다. 입점 한 번 하는데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부어야 하는 일반 브랜드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처럼 불공정한 '일감몰아주기'가 없을 것이다. 공정위가 이들 회사가 입점과정에서 계열사의 특혜를 받았는지 조사 중인 것도 그런 맥락이다.

재벌가 여성들이 먹는 것에 관심이 많다면 남성들은 자동차 수입에 열을 올리고 있다. 국내 대기업들이 운영하는 주요 수입차 딜러는 오너 가문 2~4세들이 사업을 벌이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두산은 혼다 재규어 랜드로버 등을, GS는 렉서스, 효성은 메르세데스벤츠와 도요타를, 코오롱은 BMW를 수입해 파는 등 유별난 수입차 사랑을 수년째 이어오고 있다.

벤츠 딜러인 더클래스효성은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의 아들인 현준·현문·현상 씨 3형제가 각각 3.48%씩 총 10.44% 지분을 갖고 있다. 옛 두산모터스 DFMS는 박정원 두산건설 회장을 비롯해 박지원 두산중공업 사장,박진원 두산인프라코어 부사장,박석원 두산엔진 상무 등 창업 4세들이 지분을 나눠 보유하고 있다.

"남자가 돈이 있으면 자동차에 대한 관심이 생긴다."는 분석도 있고, 초기에 높은 투자비용만 부담하면 꾸준히 수익을 창출하기가 상대적으로 쉽다는 수입차 딜러 사업의 특징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협력업체가 많고 거액자산가들이란 인맥을 활용하면 영업에 유리할 것이라는 짐작도 가능하다. 여하튼 수입차 업체들의 한국시장에서의 달라진 마케팅 전략에다 소비자들의 인식변화, 여기에 재벌 3~4세들의 공격적인 수입차 영업까지 더해지면서 국내 수입차 시장 점유율은 날로 확대되고 있다.

물론 재벌 3~4세도 자신이 꾸려갈 사업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하지만 기존에 가족이나 인척이 보유한 유통망을 사세 확장에 버젓이 이용하는 것은 비판받을 소지가 분명히 있다. 최근 4대 그룹 부회장들이 공정거래위원장을 만나 시스템관리, 광고, 건설, 물류 등 4개 분야에서 '일감 몰아주기'를 자제하고 경쟁시스템을 도입하겠다고 말했다. 스스로 잘못된 관행을 인정하고 바뀌겠다는 것, 그 자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일감몰아주기가 이 4개 분야에 집중돼 있다는 것이지 다른 분야가 괜찮다는 뜻이 아님은 빵집의 예에서 금방 알 수가 있다.

무엇보다 ‘기업가 정신’의 실종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아기 물티슈와 여성 위생용품을 수입해서 유통시킨다는 게 국민 삶의 수준을 높이는 걸까? 기업에 새로운 부가가치 창출일까? 묻고 싶다. 재벌가가 할 일이 과연 외국제품 수입하는 것 밖에 없을까 하는 회의적인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국내 재벌 1~2세대가 일부 비판 속에서도 공을 인정받는 것은 적어도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 국가경쟁력을 키운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재벌 3~4세대들은 위험을 감수하고 도전하는 기업가 정신을 발휘하고 있는가? 의문이 드는 대목이다.

진념 전 경제부총리가 최근 한 세미나에서 "경쟁력 강화를 위해 규제를 풀었더니 대기업이 커피숍이나 입시학원을 경영한다."고 꼬집었던 말이 큰 화제가 됐다. 대기업들의 무차별적 영역확장이 좀 도를 지나친다는 인식이 사회적으로 퍼져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자신의 분야에서 묵묵히 노력하는 재벌 후계자들도 여럿 있다는 것 알고 있다. 그들을 싸잡아서 비판하려는 의도는 아니지만, 전반적인 사회인식을 보면 그 집단에 대한 공통의 사회적 평가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아직도 '재벌'하면 긍정적 이미지보다 '부의 편법승계' '일자리 몰아주기' 등 부정적인 생각이 더 많이 지배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를 개발하고 미지의 가능성 있는 시장을 개척하려는 도전적 시도가 이어진다면 재벌 3~4세가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 편하게만 사는 사람들'이라는 인식보다 '젊은 시절부터 많은 고민을 하고, 국가 경제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란 생각으로 점차 바뀔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지금으로 봐서는 희망이 밝진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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