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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권기수의 '동구리'

대학 시절, 지금보다 더 그림을 모를 때, 막연하게 좋아하던 그림이 있었습니다. 날개를 활짝 핀 채 빠알간 하늘을 날아다니는 동그란 아이가 그려진 그림이었습니다. 동그란 아이는 누구보다 더 환한 미소를 띠고 있었고요. 그냥 그 미소가 너무 예뻤습니다. 당장 컴퓨터 바탕화면을 그 그림으로 바꿔 놓고 매일매일 바라봤죠. 보기만 해도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그런 그림이었습니다.

나중에서야 이 그림이 우리나라 작가의 작품이란 걸 알게 됐습니다. 권기수 작가의 ‘비상’이라는 작품이고, 미소가 예쁜 동글동글한 아이는 권 작가의 작품에 항상 등장하는 ‘동구리’라는 녀석이었습니다.

그리고 대학생 때 그렇게 좋아하던 작품을 그린 작가를 10년쯤 지난 뒤 실제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저 그림만 좋아하던 대학생이 미술을 담당하는 기자가 되어 개인전을 여는 작가를 취재하게 된 것이죠. 마치 어릴 때 동경하던 스타를 만나러 가는 기분이었습니다.

인터뷰 하러 가는 내내, 대학생 때 나의 모습도 생각이 나고 해서, 얼굴에 ‘동구리’ 미소가 저절로 생겨났습니다. 보통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과 외형적으로도 많이 닮았던데, 권기수 작가도 동구리와 얼마나 닮았을까,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펼쳤습니다. 묻고 싶은 질문도 한가득 이었고요. 무엇보다 가장 궁금했던 건,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동구리’가 어떻게 탄생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두둥…… 권기수 작가를 만났습니다. 권 작가는 동구리보다 훨씬 키도 크고, 마른 체형이더라고요. 안경을 써서 그런지, 동구리보다 더 ‘샤프’해 보이는 모습이었고요. 그런데, 인사를 주고받으면서 처음 들은 권 작가의 목소리는 딱 ‘동구리’ 같았습니다. 너무나도 밝고 유쾌한 목소리였죠.

‘팬심’으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동구리’의 정체에 대해 물었습니다.

"얘는 왜 만날 이렇게 웃고만 있나요?"

예상과는 전혀 다른 답이 돌아왔습니다.

"동구리는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에요."

엥? 이게 무슨 말일까요.......

동구리는 그림 속에 들어가 관객들을 만나는 권 작가 자신입니다. 권 작가의 경우, 겉으로는 아주 쾌활하지만, 속으로는 굉장히 내성적이고 상처도 잘 받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모든 경우에 자신의 감정을 얼굴에 다 드러낼 수는 없기에, 남들에게는 더 밝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죠. 이른바 ‘감정 노동’을 하는 것인데, 비단 권 작가의 얘기만은 아닐 겁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거의 모두 이런 ‘감정 노동’을 하고 있죠. 이렇게, 동구리는 현대인을 대변하는 1인인 것입니다.

또, 사실은 동구리의 형제자매들이 10종은 더 있었다고 합니다. 동구리는 머리카락이 10가닥인데, 머리카락이 단 3가닥뿐인 아기 동구리를 비롯해서, 얼굴이 까만 아프리카 동구리, 뱀과 합체한 뱀구리 등등....... 하지만, 그림의 주제와 소재에 맞는 ‘변형’ 동구리가 그림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너무나 직설적으로 ‘이야기’를 전달하게 되는데, 권 작가는 오히려 ‘이야기’를 숨기고 싶었습니다. 권 작가가 생각하는 ‘예술’은 직접적으로 내던지기보다-직접 보여주는 건 일종의 ‘선전 예술’로 생각 한다죠- 숨기고 숨기고 숨겨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이면을 들여다보게 하고팠던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저를 행복하게 만들었던 ‘비상’의 동구리도, 사실 권 작가가 엄청나게 ‘열이 받았을 때’ 탄생했습니다. 갤러리와 엄청난 의견 차이로 갈등을 겪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너무나 화가 나서 어디론가 뛰어내리고 싶은 기분까지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뛰어내릴 수는 없었기에, 동구리를 내세워 하늘을 날아가는 그림을 그렸던 겁니다. 그림을 그리면서 대리만족을 느꼈고, 화도 점점 식어갔고요.

                                       Time, Acyrlic on canvas, 227×540cm, 2008

호수 위에 배를 띄우고 역시 얼굴에는 미소를 띤 채 앉아 있는 동구리. 이 그림도 권 작가의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을 때 나온 그림입니다. 갤러리 사람들과 전시 문제로 다툰 뒤 그린 것인데요, 세월을 낚는 강태공처럼, 언젠가 나를 알아주는 날이 있겠지, 기다리는 마음으로 그린 그림입니다.

동구리가 들어가 있는 장소는 매화와 대나무가 빽빽한 곳인데요, ‘무릉도원’ 같은 환상적이고 행복하게만 보이는 곳입니다. 오히려 밝음 뒤에 숨겨진 어둠을 보여주는 소재들입니다. 권 작가의 뿌리(전공)가 동양화이기 때문에 이런 소재들이 등장하는 것인데, 단순히 배경으로서 뿐만 아니라, ‘죽림칠현’이나 ‘고사관수도’의 이야기도 함께 녹아있는 것이죠.

                           Black Forest-Seven, Acrylic on canvas, 227×546cm, 2006

컬러풀한 대나무 속에 일곱 명의 동구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죽림칠현’에 나오는 일곱 명의 선비가 동구리로 재탄생했습니다. 중국 위나라와 진나라의 정권 교체기, 복잡하고 지저분한 정치권력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대나무 숲에 모여 풍류를 즐겼다는 그 선비들 말입니다. 2천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복잡하고 지저분한 사회’는 어쩜 그렇게 변함이 없을까요. 동구리처럼 환하게 웃으면서 잠시 그런 세상에서 물러나보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제 휴대전화 바탕화면 입니다^^

이제는 ‘동구리가 왜 웃는 게 웃는 게 아니구나’ 이해가 갑니다. 웃는 얼굴 속에 숨겨진 아픔들이 있었던 것이죠. 어느 의미에서는 동구리가 요즘 광고에 등장하는 ‘걱정 인형’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걱정은 동구리에게 맡기고, 너는 너 가는 길이나 잘 가라." 마치 동구리가 이런 말을 건네고 있는 것 같죠? 전시 취재를 마치고 나오면서 저는 다시 동구리 그림을 휴대전화 바탕화면에 담았습니다. 동구리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매일매일 동구리를 보면서 내 걱정은 주고 웃음을 받아오고 싶은 마음에서요.

* 권기수 개인전 Reflection : 明鏡止水
- ~12월 31일까지, 갤러리현대 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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