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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투캅스와 피의자, 고깃집에서 만난 이유

부패 근절 없는 수사권 조정 논의는 공염불

[취재파일] 투캅스와 피의자, 고깃집에서 만난 이유

18년 전 개봉한 강우석 감독의 영화 '투캅스'는 부패한 고참 형사와 정의감에 불타는 신참 형사가 좌충우돌 갈등을 겪으며 명콤비가 돼가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성기가 연기한 부패 고참 형사의 이미지가 워낙 강해 '투캅스'라고 하면 비리 경찰을 가리키는 대명사처럼 여겨졌습니다.

28일 8뉴스에서 보도한 "수사 대신 수뢰 투캅스"는 서울 강남권의 노른자위로 여겨지는 서초경찰서 '투캅스'의 이야기입니다.

신모 경사와 윤 모 경사는 서초경찰서 지능1팀 소속 형사들이었습니다. 조장과 조원으로 팀을 이뤄 1년 가까이 호흡을 맞춰온 사이였죠. 이들은 지난 6월 불법 대부업자 이모 씨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습니다. 무허가 대부업자인 이 씨는 돈이 필요한 사람들과 전주들을 연결해 사채를 빌리도록 해주고 중간에서 수수료로 36억 원 정도를 챙긴 혐의를 받고 있는 피의자 신분이었습니다.

범죄 혐의를 밝히고 이 씨를 처벌하고 끝냈으면 그만일텐데 수사가 희한한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두 형사 가운데 조원인 윤 형사가 이 씨에게 은밀한 제안을 한 것입니다. "5천만 원을 주면 혐의를 깎아주겠다"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하기에 따라서 세게 처벌할 수도, 봐줄 수도 있으니 요구를 들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던 이 씨는 그러겠다고 약속했지만, 수중에 돈이 없었습니다. 5천만 원은 없고 1천만 원으로 하자고 제안했는데, 이 과정에서 이 씨와 윤 형사 사이에 전화 통화가 수 차례 이뤄졌습니다. "왜 약속한 액수와 다르냐, 우리 부장님(신 형사)과 상의해보겠다. 그렇다면 3천만 원으로 하자" 같은 말이 윤 형사 입에서 나온 걸로 알려졌습니다. 이런 통화 내용을 피의자 이 씨가 휴대전화로 녹취한 것입니다.

결국 6월27일 세 사람은 서울 서초동의 유명한 한우 고깃집에서 만나 점심을 먹습니다. 물론 계산은 이 씨가 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피의자 이 씨가 형사들에게 작은 쇼핑백에 5만원권 200장, 현금 1천만 원을 건넸습니다. 뇌물죄가 성립한 순간입니다.

윤 형사는 지난 4월 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에 단속된 불법 카지노바와도 관련이 있었습니다. 카지노바를 보호해주는 명목으로 400만 원 이상 금품을 받은 혐의로 입건돼 수사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이번 수뢰 사건도 윤 형사의 비위 사실을 캐던 과정에서 드러난 걸로 알려졌습니다.

두 형사는 어제(28일) 구속됐습니다. 경찰은 이들이 받은 뇌물 액수를 1천만 원으로 산정했지만 법원은 5천만 원으로 판단했다고 합니다. 처음 요구한 액수를 범죄 사실로 받아들이겠다는 의지입니다.

올 여름 검찰과 수사권 조정을 놓고 치열한 다툼을 벌인 경찰은 몇 가지 큰 소득을 얻었습니다. 그동안 법에 명시되지 않았던 수사 개시권을 인정받았고, 형사소송법도 법무부와 다시 논의해 대통령령으로 수정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놨습니다. 아직 논의가 시작되지 않았지만 어떤 방향이든 경찰의 권한은 지금보다 훨씬 커질 것이 명백한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터져 나오는 경찰의 내부 비리를 보면 경찰에 지금 보다 더 많은 수사권을 주고 힘을 실어주는 게 타당한 것인가하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구성원이 15만 명이나 되니 극히 일부 경찰관의 비위가 없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건 변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극히 일부에서 일어나는 비리라고 해도 그 피해는 형사 사법 체계 전반에 불신을 불러오고, 피해는 온 국민에게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조현오 청장은 틈만 나면 내부 비리를 척결하겠다고 약속했고, 실제로 그런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서울 강남권에 오래 근무한 형사들을 물갈이하기로 하는 등 부패를 막기 위한 조치들을 잇따라 내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게 경찰청장 혼자만 발로 뛴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구속된 투캅스가 피의자에게 돈을 요구해서 받은 시점은 수사권 조정 논의 과정에서 전국의 경찰들이 집단 행동을 불사하며 국회와 정부를 상대로 전의를 불사르던 때입니다. 검찰에 모든 권한이 집중되는 쪽으로 수사권 논의가 진행되는 데 강력히 반발하던 시점이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일선서 형사들은 뇌물을 받아 챙긴겁니다. 보다 강력한 부패 통제 시스템이 정착되지 않고서는 이렇게 겉다르고 속다른 경찰 조직의 모습은 사라지기 어려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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