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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일본, '쓰나미 영상' 보고 우승?

[취재파일] 일본, '쓰나미 영상' 보고 우승?

일본 축구 여자대표팀이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월드컵에서 우승했습니다. 독일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일본팀은 그간 상대 전적 3무 21패를 기록하던 '세계 최강' 미국팀을  만나 전·후반 1:1, 연장 1:1의 접전 끝에 승부차기에서 3:1로 극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대망의 우승컵을 차지했습니다.

결승전은 우리 시간으로 월요일 새벽에 있었습니다. SBS를 비롯한 각 방송은 월요일 아침부터 저녁뉴스까지 이 이웃나라의 경사를 전했고, 신문은 하루 지난 오늘(화요일)자 조간에 조금 늦게 관련 기사를 쏟아냈습니다. 오늘 아침 사무실에서 신문을 통해 다시 한 번 일본팀의 우승 기사를 훑어보다가 눈길을 끄는 부분을 발견했습니다.

"일본 선수들은 주요경기를 앞두고 대지진 피해 영상을 보며 '국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자'고 결의를 다졌다."(C일보 기사)
"(전략) 그때마다 그들은 대지진 피해 영상을 함께 보며 결의를 다졌고, 인터뷰에서 '결코 포기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H신문 기사)
"쓰나미 영상 보며 이 악문 그들…포기란 없었다"(D일보 4면 제목)

제가 가진 의문의 핵심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일본 선수들은 정말로 바닷물이 제방을 넘고, 도시가, 거리가 사정없이 물에 휩쓸려가는 '쓰나미 영상'을 보면서 전의를 다졌던 걸까요?  아무리 피해가 크고 해당 지역 주민들의 절망감이 만연했다고 해도, 말 그대로 '쓰나미 영상'만으로 전의를 다지는 게 가능했을까요? 어쩌면 '쓰나미 피해 지역'의 주민들이 '우리 선수들, 힘내세요!'라고 하는 일종의 '영상 편지'를 보면서 힘을 낸 건 아니었을까요? 언론이 '쓰나미 지역 피해 주민들의 응원 영상'을 앞뒤 다 잘라내고 '쓰나미 영상'으로 보도한 건 아니었을까요?

약간의 검색, 그리고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외신을 살펴보며 상황을 파악해 본 결과, 제 뜬금없는 의심은, 현재로서는 결국 틀린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 선수들은 정말로 '쓰나미 영상'을 보면서 '피해 주민들에게 힘을 주자!'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일본 대표팀이 준준결승에서 개최국 독일을 격파한 지난 11일 일본 아사히 신문의 기사(http://www.asahi.com/sports/fb/TKY201107110017.html)를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미력하나마, 번역은 제가 했습니다.)

"(전략) 시합 직전의 미팅. 기분을 고조시키고, 전술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일본 대표팀의 사사키 노리오 감독은 대표팀이 4강에 들었던 2008년 베이징 올림픽과 이번 대회의 득점 장면과 함께 동일본 대지진의 영상을 틀었다. 그리고 선수들에게 말했다. "우리들의 플레이가 지진 피해자들의 힘으로 이어진다. 고통스러울 때는 그 분들을 생각해 힘을 내자."

준준결승에서 강호 독일을, 준결승에서 우승후보 스웨덴을 제친 일본팀을 다룬, 미국 ESPN의 기사(http://espn.go.com/sports/soccer/news/_/id/6771891/women-world-cup-underestimate-japan-your-own-risk)에서도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팀의 가장 큰 자산은 '동기 부여'였다. 미국팀이 1999년의 영광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군분투할 때 일본팀은 지난 3월 동부 지역을 강타한 지진 해일을 딛고 일어나려는 조국에 기쁨을 가져다 주겠다는 의지로 가득했다. (중략) 독일전에 앞서 (사사키 감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선수들에게 일본 동북지역의 파괴된 이미지들을 보여줄 뿐이었다."

우승 직후 일본 언론의 보도를 보면, '국민에게 힘을 주겠다'는 선수들의 기특한 소망은 다행히 효과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쓰나미 피해 지역의 주민들이 "축구선수들의 선전에 힘입어 (피해 복구에) 자신을 갖게 됐다"고 말한 인터뷰 내용이 곳곳에서 터져나왔기 때문입니다. 참 다행스럽고, 잘된 일입니다.

결국 저는 이웃나라의 경사에 의심을 한 줄기 걸친 셈이 됐습니다. 마음속으로나마 재를 뿌려 미안한 마음입니다. 그냥 스쳐지나갈 수도 있는 표현에 끝내 눈길을 준 것은,그저 기사를 쓰는 사람으로서의 호기심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스포츠와 연결된 국가주의를 무조건 나쁜 것으로 비난하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저도 우리 선수들이 올림픽에서, 월드컵에서 선전을 펼치면 열을 올리며 응원하는 평범한 국민의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조금 변명을 하자면, 축구선수들의 선전을 바라보는 개개인의 시선이, 개개인의 시선으로 머물지 않고 무차별적으로-즉 국가 전체로-확대되는 것에는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개 미디어와, 정부의 시각에서 이뤄지는 그런 식의 '확대 재생산'은 오히려 선수-관중의 순수하고 소박한 커뮤니케이션을 정치적으로 왜곡시킬 우려가 크기 때문입니다. 1936년의 베를린 올림픽이 그랬고, 박찬호-박세리선수의 선전을 접했던1997-8년의 우리나라도 이제와서 돌이켜보면 솔직히 그런 측면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박-박 선수의 선전은 축하할 일이었고, 힘든 IMF 구제금융 시절에 청량제는 됐지만, 그걸로 금융사태를 일으킨 집단에 대한 책임 추궁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처럼요.)

덧붙여 저는 훌륭한 운동선수들이 일구어낸 결과가 국민 모두에게 동일한 효과를 준다고 '확신'하거나, 좋은 소식을 접한 국민 모두가 동일한 생각을 가질 거라고 '기대'하는 일방적인 시선에는 의심을 표하고 싶습니다. 선수들의 선전에는 마음껏 박수를 보내고, 그 응원과 감사의 마음을 적어도 '일단은' 개인의 차원에서 감상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 결과가 제 개인의 인생과 세계관에 어떤 좋은 영향을 가져올 수 있을지를 스스로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이건 제가 얼마전 이 자리를 통해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소식에 기뻐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 국민이 아니"라고 트위터에 올린 어떤 고위 공직자의 생각을 비판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저도 지난 3월 쓰나미 직후 일본 이와테현에 취재를 다녀왔습니다만, 그곳에서 만났던 현지의 주민들이 모쪼록 힘을 내서 삶의 터전을 다시 일으켜 세웠으면 합니다. 부쩍 더워진 날씨에, 앞으로 빨라야 3년 걸린다는 잔해 제거를 하던 그들이, 비록 몸은 힘들더라도 월드컵 우승에 대한 감상으로 잠시나마 웃음꽃을 피우면서 단 며칠이나마 고단한 하루하루를 견디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월드컵에서 우승했다고 누군가 그들이 치워야 할 쓰나미 잔해를 대신 치워주는 것은 아니듯, 때로는 가혹한 현실을 '그저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왜곡하고 정당한 불만과 문제제기를 노랫가락에 덮어 무마하려는 누군가의 시도에는 늘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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