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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혈흔은 알고 있다

[취재파일] 혈흔은 알고 있다

지난해 12월 9일 밤 9시쯤 경기 수원 권선구의 한 연립주택에 살던 40대 여성 A씨가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 함께 살던 내연남 B씨가 슈퍼마켓을 가려고 대문을 열고 걸어가는 순간, 누군가 흉기를 휘둘렀다는 신고였다. A씨는 "'B씨가 머리와 목 등을 다친 채 대문과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왔다'며 B씨를 부축해 허둥대면서 119에 신고하고 바로 병원으로 후송했다"고 진술했다.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그러나 이상한 정황을 여럿 발견했다. 단서는 현장에 남은 핏자국이었다. 신고자는 피해자가 외부에서 흉기에 찔린 뒤 집으로 돌아왔다고 했지만, 혈흔의 방향은 안방에서 거실, 다시 현관 및 도로변까지 이어져있었다. 신고 대로라면 핏자국은 도로변에서 집 안으로 향해야 하지만 그 반대였다. 신고자 진술과 달리 피해자의 동선이 안방-거실-도로 밖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또 피해자가 흉기에 찔렸다고 진술된 장소에서 핏방울이 상처 부위에서 그대로 떨어졌을 때 생기는 '낙하혈흔'과 고인혈흔이 발견됐지만 흉기를 휘두를 때 핏방울이 튀면서 생기는 '비산 혈흔'이 없는 것도 경찰의 의심을 샀다. 적어도 누군가 흉기를 휘둘렀다면 '튄 핏자국'이 어딘가 존재했어야 했다.

경찰은 이런 점을 토대로 신고자를 추궁했고, 결국 신고자는 "내연남이 다른 여자와 찍은 사진을 보고 다투다가, 방 안에서 내연남을 흉기로 찔렀다"고 털어놓았다.

◇ 'DNA'만 있냐, 우리도 있다

과학수사의 대표 주자는 DNA다. 범행 현장에 남은 피나 머리카락, 살점 등을 통해 DNA를 분석하면 '누가' 범행했는지 파악할 수 있다. 용의자가 누구인지 식별하는 데 결정적인 요소다.

반면 혈흔 형태로는 누가 범행했는지 파악할 수 없다. 혈흔 형태는 다만 범죄 현장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범행에 어떤 도구가 쓰였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어떤 방향으로 움직였는지를 알 수 있다. 피는 중력의 작용을 받기 때문에 바닥으로 떨어지거나 흉기에서 튀어오르면서 독특한 자국을 남긴다. 이런 혈흔 형태는 범죄를 재구성하는 데 가장 중요하게 쓰이는 현장 증거인 셈이다.

물론 혈흔 형태만으로 한 사람에게 유죄를 선고할 수는 없다. 증거로 채택되는 경우도 많지 않다. 하지만 사건 현장의 혈흔이 수사 상황과 맞지 않으면 이는 피고인의 방어에 유리한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경찰대 유제설 교수의 설명은 이렇다. "우리나라는 초기 수사 서류에 혈흔 형태 분석을 넣는 란이 없다. 혈흔 형태 분석이 의무화돼 있지 않은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다른 증거를 다 갖춰놓고도, 상대편이 혈흔을 갖고 여러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전문 수사 요원 입장에선 말도 안되는 주장이라도, 재판부가 이를 다시 검증하라고 검찰에 요구한다.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검증을 해야하는데 이게 쉽지 않다. 따라서 사건 초기부터 혈흔 형태 분석을 꼼꼼히 해놓을 필요가 있다."

◇ 혈흔 형태 분석, 우리는 아직 초창기..투자 필요

국내에선 아직 혈흔 형태 분석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는 단계는 아니다. 2008년도에 경찰을 주축으로 혈흔 형태 분석 학회가 창립됐고, 매년 세미나가 열리는 정도. 대구경찰청과 경찰 수사연수원에 혈흔 형태 실험실이 있을 뿐 이 부분을 특화한 전문가 양성 과정도 없고 관련 교육 프로그램도 많지 않다. 경찰청에서 올해 '혈흔 형태 용어집'을 펴내고 혈흔  형태 분석에 쓰이는 용어를 통일한 것 정도가 지금까지의 성과다.

우리나라 혈흔 형태 분석 연구를 도입한 경찰청 최용석 과학수사계장은 "현장 감식이나 화재 감식, 최면 수사 등 분야별로 전문가들이 산재해 있는데, 이들의 역량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 수사요원 교육과 현장 감식, 법정에서의 공소 유지까지 적용될 수 있는 일관된 기준과 지침을 마련하기 위한 최고 전문가 연구 그룹을 빨리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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