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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신호등이 남녀 차별 조장?

탁상 행정이 빚은 촌극...서울시 방침 백지화

[취재파일] 신호등이 남녀 차별 조장?

27일 아침 평소처럼 경찰청의 일정을 체크하다가 눈에 띄는 회의 일정을 발견했습니다. 교통안전시설 심의위원회라는 게 열리는데, 안건이 "LED 보행 신호등 남녀 병렬 이미지 적용 도입 여부" 였습니다. 교통안전시설 심의위는 신호등 같은 교통 안전 시설을 개선하기 전에 경찰과 민간 전문가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고 안건을 심의하는 기구입니다.

담당 과에 확인했더니 "한 지방자치단체가 현재 쓰는 신호등의 이미지가 남성으로 보여 양성 평등에 맞지 않으니 남성과 여성이 함께 있는 모습으로 바꿔보자고 제안했다"고 했습니다. 이 지자체는 바로 서울시였습니다.

신호등이나 비상구 같은 표지판에 쓰이는 형상을 '픽토그램'이라고 합니다. 그림을 뜻하는 픽토(Phicto)와 전보를 의미하는 (Telegram)의 합성어로, 사물이나 시설, 행위 등을 알기 쉽게 표현한 이미지를 말합니다.

◇ "상부의 오더가 있었다"

서울시가 신호등 픽토그램을 남녀가 함께 있는 모습으로 바꾸겠다는 발상이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서울시에 전화를 걸어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서울시 설명을 그대로 옮기겠습니다.

질문: "남녀 이미지 신호등을 도입하자는 취지가 무엇인가?"
답변: "우리는 원래 대학로와 홍대 등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곳 4군데에 시범 설치만 할 생각이었다. 상부에서 오더가 와서 한 것이다. 4군데 설치해봤자 비용은 400만 원도 안 된다. 그런데 어제 보도가 나와서 아예 안 하기로 했다."

질문: "상부가 어디인가?"
답변: "디자인 본부에서 여러가지 다양한 픽토그램 시안을 보내주고, 제안을 해왔다. 젊은이들이 많이 다니는 거리에 남녀 이미지를 함께 넣으면, 함께 걸어가는 모습이 좋기도 하고, 젊은 여성들도 흡족해하지 않겠냐고 했다. 우리는 시행 부서여서 경찰에 공문 보낸 것 뿐이다."

질문: "해외 사례도 보내왔나?"
답변: "나라별로 한 것은 아니고, 다양한 예시 픽토그램을 보내왔다."

질문: "오세훈 시장의 결재가 있었나, 디자인 본부장의 전결 사항인가?"
답변: "그건 나도 모르겠다. 어쨌든 어제 보도로 안 하기로 했다"

◇ 시민들·여성단체, "뜬금없다"

거리로 나가봤습니다. 사람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의견을 물었더니 모두 부정적인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예산 낭비 아니냐", "현재의 픽토그램이 성차별적이라고 느끼지 않는다"고 시민들은 답했습니다.

여성단체들에게도 의견을 물었습니다. "뜬금없다"는 반응이 역시 대다수였습니다. 물론 표지판이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긴 했습니다. 어린이 보호구역에서 어린이를 데리고 가는 성인은 치마를 입은 여성의 모습입니다. 이런 논란 때문에 새로 도입된 노인 보호구역 표지판은 남녀 노인이 함께 서 있는 모습이 채택됐습니다.

하지만 신호등 픽토그램이 성차별적이라는 지적에 전문가들, 여성단체들도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런 픽토그램을 고친다고 성차별 의식이 개선되겠냐는 차가운 시선이 많았습니다. 보다 근본적인 의식을 개선해야지 표지판, 신호등 바꾼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는 겁니다.

도로교통공단의 신호등 연구자도, 심의위에 참여한 한 대학 교수도 같은 의견이었습니다. 해외 어느나라에서도 신호등 픽토그램에 두 사람을 표시한 곳도 없고, 통일성이 가장 중요한 교통 표지판을 특정 지역만 다르게 나타내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설명했습니다.

◇ 보여주기 행정이 빚은 촌극

오세훈 시장의 서울은 '디자인 도시'과 '여성이 행복한 도시'를 모토로 내걸고 있습니다. 칭찬받을 정책들도 많겠지만 종종 이렇게 어처구니 없는 발상은 시민들을 어리둥절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번 사안도 해프닝으로 끝나긴 했지만, 유리지갑 털어 지방세를 꼬박꼬박 내온 시민들은 허탈함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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