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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일본 미야코(宮古) 취재기

쓰나미 이후, 그들은…

[취재파일] 일본 미야코(宮古) 취재기

"오늘 낮에도 몇몇 외국 방송사가 취재협조를 요청했습니다만, 저희로서는 이렇게 자료를 드리고, 보내드리는 것이 최선입니다. 24시간 속보체제에서 손을 놓을 수가 없어서요."

3월 14일 월요일 오후 5시, 일본 이와테현(岩手縣)의 현청 소재지 모리오카시(盛岡市). 이와테현 NTV 계열사인 'TV이와테' 보도국 회의실에서, 키가 껑충한 후치사와 보도제작국장은 이와테현의 전체 지도와 쓰나미 피해가 특히 심한 동쪽 해안지역의 상세 지도를 취재진에게 건네주며 이렇게 말했다.

"현장 중계를 위해 파견된 우리 중계차도 미야코 근처에서는 머물 수가 없어요. 급한대로 모리오카와 현장을 왔다갔다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만, 휘발유를 구하기가 어려워서 그마저도 쉽지 않습니다."

일요일 밤 출장 결정, 월요일 새벽 출발…말 그대로 서울에서 '급파'된 취재진이 TV이와테를 찾은 것은 급한대로 북부 아키타(秋田) 공항을 통해 일본에 들어온 뒤, 출국 직전 수십 통의 국제전화를 통해 간신히 섭외한 미니버스로 4시간을 달려 모리오카에 도착한 직후였다. 현장 상황이 급박한데다 물자 부족으로 취재는 커녕 이동마저 제한되고 있다는 1차 출장팀의 보고를 이미 접한 터라, 나를 포함한 2차 출장팀은 현지 방송기자들의 '동료애'에라도 기대고 싶은 절박한 심정이었다.

후치사와 국장은 말을 이어나갔다. 11일 오후 이후, 거의 잠을 자지 못해 푸석해졌다는 얼굴 위로 깊은 주름이 내달리고 있었다.

"고속도로는 일단 폐쇄됐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위(관청)에서 지정한 긴급차량이 아니면 통과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현장에서 관리들과 마주쳤을 때, '말이 잘 안통하는 외국 취재진'이라는 점을 어필하시면 통과될 가능성은 없지는 않아요."

TV이와테측의 조언은, 요약하면 '알아서 잘 하시라'는 것. 그렇다고 해서 24시간 재해 생방송에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그들을 원망할 수는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서툰 일어를 그러모아 후치사와 국장에게 말을 건넸다.

"혹시 저희가 TV이와테에서 협력을 받는 취재진이라는 일종의 '증표'라도 구할 수 있을까요?"
"아, 그런 거라면 도움을 드릴 수 있을지도……."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온 후치사와 국장은 'TV이와테'의 '취재 완장'을 건네주었다.  지진 해일 이후 개인 적이 없었을 것 같은 칙칙한 모리오카의 하늘색에 선명한 대비를 이루는 '개나리빛' 완장.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지만, 이거라도 받은 게 어디냐는 생각에, 지도와 완장을 소중히 끌어안고 숙소로 이동했다.

***

"산불은 더 번지지는 않았어요. 더이상 탈 게 없는 게 아닐까요…….  참, 오늘 아침에 호주 방송사가 하나마키(花卷)로 가면서 고속도로를 타는 데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러분도 건투를 빕니다."

다음날(3월 15일) 아침, 동쪽 해안도시 미야코(宮古)로 출발하면서 미야코 남쪽 야마다마치(山田町)의 산불 상황을 묻는 취재진의 전화에, 후치사와 국장은 어제보다는 살짝 밝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단지, 현장에서 밤새 머물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숙소도 없을 뿐더러 필요한 만큼의 전기, 식수, 식량 등을 구하기가 어려워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연료를 확보하는 일입니다. 그게 안되면 아무것도 안될 겁니다."

차량 한 대당 20리터. 지진해일 이후 우선적으로 내려진 연료 재고 통제조치로 일본 동북지역은 조금 과장하면 연료를 확보하는 자가 그나마 정상에 가까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매드 맥스'같은 세계가 되어 있었다.  지진해일의 직접 피해가 없는 내륙 안쪽 모리오카 시내에서도 대부분의 주유소는 영업 중단 상태였고, 문을 연 극소수의 주유소에도 운전자들이 몰려들어 오전을 넘기기 전에 이미 정해진 판매량을 넘기기 일쑤였다. 

다만 취재진에게 행운이 있었다면, 첫 날 아키타에서 섭외한 미니버스의 운전자가 버스 화물칸에 아껴쓰면 2~3일 정도는 운행할 수 있는 상당량의 연료를 담아 왔다는 것.

모리오카 시내를 벗어나 미야코를 향하는 106번 지방도로 입구에서, 취재진이 탄 미니버스는 길을 막아선 경찰과 조우했다. 경광봉을 세로로 흔들며 차량을 세운 그들에게 TV이와테의 노란색 완장과 취재용 ENG 카메라를 보여주니, 잠시 상의하더니 통과. 다행히 미야코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106번 지방도로는 모리오카에서 미야코까지 상당부분 해발 1000m대의 산지 사이를 통과하는 길이었다. 아침부터 잔뜩 흐려있던 하늘에서는 눈발이 희끗희끗 날리기 시작했고, 기온도 영하에 가까울 정도로 떨어졌다.

산악지역을 통과하자 잠시 평탄한 도로가 강과 함께 동쪽으로 내달렸고, 이내 미야코 시내에 접어들었다.

"……."

눈 내리는 산길을 천천히 달리며, 이번 출장이 재난지역 취재라는 사실을 아직까지는 실감하지 않았던 취재진은 눈앞에 서서히 펼쳐지는 참혹한 광경에 그만 할 말을 잊었다.

미야코 시청사 근처는 이미 TV 화면에서 보던대로 쓰나미의 직격탄을 맞아 한마디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고기잡이배와 항구의 컨테이너가 육교에 처참하게 걸려 있었고, 해안에서 가까울 수록 집들은 원래의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소금기와 진흙을 가득 머금은 나무판자와 해초더미가 눈에 보이는 땅 위에 어지럽게 올라앉아 있었고, 그 사이로 새로 낸 좁은 이동로로 구조대와 생존자들이 간신히 오가고 있었다.

그들은 집과 거리, 항구가 흙과 바닷물에 한데 섞여 무너지고 쓸려가 쌓인 거대한 잔해 더미 앞에 서서 가는 막대와 삽으로 곳곳을 천천히 찌르고 파헤치고 있었다. 생존자를 찾는 것이 목적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 속에서 아직 쓸만한 가재도구 같은 물건들을 끄집어 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확실한 것은, 본격적으로 잔해를 치우는 이른바 '복구'를 위한 작업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어보였다는 것이다.

"일단 구급 환자만 받고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벅찬 상황입니다. 언제 어디서 뭐가 부족해 질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물류부터 복구되는 게 가장 시급합니다."

미야코시에서 규모가 가장 큰 현립병원. 오쿠구치 응급의학과장은 상황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이렇게 답하며 눈으로는 병원 로비에 급히 마련된 임시진료소를 훑어보고 있었다. 이미 치바현 등 일본 각지의 소방구급대가 지원을 위해 도착해 있었고, 그들이 타고 온 구급차량은 피해지역과 피난소 등에서 긴급 진료가 필요한 환자들을 병원으로 실어나르는 중이었다.

"쓰나미를 맞은 시내 민간병원은 진료를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급한 환자들은 여기서 더 큰 병원으로 보내야 하는데, 차로만 두 시간이 걸려요. 갈 수만 있다면 상관이 없는데, 구급차량도 연료가 풍족한 상황은 아니라서……."

현립병원은 지진해일 직후의 부상자들을 일단 수용해 치료를 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집이 쓸려가면서 평소 복용하던 약들도 함께 떠내려가버린 노령 환자들이 약을 받기 위해 병원으로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비축해 둔 의약품이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는 게 병원측의 가장 큰 걱정이었다.

병원을 빠져나온 취재진은 언덕 아래쪽의 미야코 제2중학교로 향했다. 중학교 운동장에는 시청에서 출동한 긴급 급수차가 음용수를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급수차라고는 하지만, 소형 트럭 뒤의 짐칸에 물탱크를 살짝 얹어놓은 게 전부. 물탱크 안에 들어있는 음용수는 얼핏 보기에도 1톤을 넘지 않을 것 같았다.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줄을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10리터들이 물통을 두어 개 들고 온 사람부터, 500ml 정도 용량의 음료수 페트병을 손에 잡히는 대로 잔뜩 챙겨온 사람까지 구성이 다양해 개인당 급수 용량의 제한은 특별히 없는 것처럼 보였다.

"뒷산에서 물을 구할 수는 있는데, 지진 이후라 수질이 나빠졌을 가능성이 있어요. 그 물은 생활용수로 밖에는 쓰지 못하니까, 마실 물은 이렇게 공급을 받아야 합니다."

뒷줄에서 만난 중년 남자는 연신 줄 앞쪽의 급수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약 1톤 남짓한 물탱크가 떨어지면, 다음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

아니나다를까, 남자의 차례가 돌아오기 전, 몇 사람 앞에서 음용수가 바닥을 드러냈다. 남자를 비롯해 줄 뒤에 섰던 사람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앞줄의 사람들이 지나치게 큰 물통을 들고와서 물이 금방 떨어졌다며 고함을 치거나, 시청 직원들에게 물을 더 가져오라며 화를 내는 사람은 없었다. 급수차를 몰고 온 시청 직원 세 명은 곧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운동장을 빠져나갔고, 물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조용히 흩어졌다.

지진해일로 보금자리를 잃은 이재민 203명이 수용된 '미야코 제2중'은 겉에서 보기에는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공용 실내화인 듯한 슬리퍼로 갈아 신고 안으로 들어가니 약간의 음식냄새와 함께 식사를 정리하는 사람들의 분주함이 느껴져 이제 막 점심시간이 지난 듯했다.

체육관 한가운데 간이책상을 연결해 만든 '피난소 지휘본부'에 가서 취재진임을 밝히자 담당자는 '지금 이재민들이 다소 예민해서 취재는 가능한 한 받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곳에는 주로 노인과 아이들이 대부분'이라며, '청·장년 어른들은 걸어서 30분 거리의 마을에서 잔해를 수습하고 있다'고 했다. 취재진은 보호자의 허락을 받지 않은 인터뷰나 취재는 자신들도 감당할 수 없다며, 완곡하지만 분명하게 거절 의사를 밝혀오는 담당자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피난소 취재는 미야코 북 고등학교(宮固北高) 피난소로 출발한 다른 팀에게 기대를 걸기로 했다.  그쪽에는 이곳에는 없는 시신 안치소도 있으니, 취재에 응할 수 있는 어른들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실제로 다른 취재팀이 이곳에서 만나 인터뷰한 가족의 기사가 하루 뒤인 16일 방송을 탔다.  ☞방송보기)

취재진은 미야코 취재를 마친 뒤 기사와 영상 전송을 위해 다시 숙소인 모리오카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본 것, 들은 것, 느낀 것들이 머릿속에서 엉켜들면서, 오전에 미야코를 향해 출발할 때와는 사뭇 다른 착잡한 심정에 사로잡힌 취재진 모두는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

1994년 [만년 원년의 풋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일본 전후문학의 대표주자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는 1990년작 [치료탑]에서 환경오염때문에 소수 엘리트가 전 지구의 자원을 그러모아 새로운 이주 행성을 찾아 떠난 뒤 지구에 남은 이른바 '2등 지구인'들의 삶을 담담하게 묘사했다.

그들은 이전과 같은 고도 기술사회에서 통용되던 '성장, 개발' 중심의 이념 대신 얼마 남지 않은 자원을 효율적으로 절약하는 새로운 시대 정신을 모토로 삼았는데, 주창자인 야나키타 시게의 이름을 따서 'YS 시스템'으로 명명된 이 시대 정신은 이렇게 요약된다.

<고도한 것은, 보다 고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어려운 것은 보다 쉬운 방향으로>
<세련은 적(敵)>
<목표는 원시적인 유용성>
<장래 희망은 소규모 수공업으로 분산화하는 것>

일본은 지진 피해를 딛고 다시 일어날 것인가?

전세계가 얽혀 돌아가는 고차원적인 정치와 경제 논리는 잠시 접어두고자 한다.

다만 적어도 이와테현 미야코에서 만난 차분한 피해 주민들은 이 소설을 접했든, 그렇지 않든 이 모토에 담긴 행간의 의미를 당분간은 몸으로 느끼며 고난을 헤쳐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시간이나마 그들의 곁을 스쳐간 이웃 나라의 기자로서, 이 자리를 빌어 그들에게 깊은 위로와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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