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이 나오기 전 세상에선 연말마다 새해 달력을 구하려고 분주했습니다.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건 은행 달력이었습니다. 달력 찾는 사람이 드물어진 요즘에도 ‘재물운’을 부른다 해서 인기라지만 발행량이 줄어들며 구하기 어려워졌습니다.
기업이나 기관, 단체가 판촉용으로 만들어 뿌리던 무료 달력엔 저마다 색깔이 있었습니다. 조부모 댁에서 마주친 사찰 달력에선 동자승이 미소 지었고, 동네 호프집 구석에 붙어 있던 주류회사 달력에선 반라의 외국 여성이 육체미를 뽐냈습니다. 해외 미술관에서나 볼 수 있던 명화나 멋진 사진이 있는 달력은 거실을 꾸며주었죠. 연말 화랑가는 대기업 판촉 달력에 어느 화가의 작품이 실리는지 촉각을 곤두세웠습니다. 작품 값의 바로미터였던 겁니다.
삼성도 과거엔 판촉용 달력을 만들었습니다.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삼성이 만든 달력을 선물 받았다는 건 사회에서 소위 힘깨나 쓰는 지위에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문서보관용으로 썼다는 프랑스산 최고급 종이에 첨단 인쇄기술로 찍어낸 삼성 달력엔 김홍도 같은 전통 화원부터 천경자·이우환 같은 당대의 화가 작품이 실렸습니다. 말 그대로 VIP 달력이었죠. 비매품이지만 리움에서도 소량 판매했는데 품절 되기 일쑤였고 그 가격이 10만 원에 육박했습니다. 소장 하려는 사람들이 많아 고가에 거래되기까지 했지만 2016년 이후 제작이 중단됐습니다.
이젠 삼성 달력도 없고, 은행 무료 달력도 선착순으로 받아야 하는 세상입니다. 모바일에 밀린 달력은 꼼짝 없이 사라져가는 걸까요? 아닙니다. 2030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달력이 다시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단순히 날짜를 확인하던 생활필수품이 아니라 자신의 개성을 뽐내는 수단이 된 것입니다. 내 방을 꾸미는 인테리어 소품이며, ‘가치 소비’를 위한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한 사회적 기업은 형편 어려운 노인들이 그린 그림으로 달력을 만들어 2년 째 ‘완판’에 성공하기도 했습니다. 삼성 VIP 달력에서 오늘날 달력 불황도 이겨낸 ‘할매 달력’까지, 비디오머그에서 소개합니다.
(취재 노동규 / 취재작가 김유미 / 영상취재 서진호 / 편집 홍경실 / 구성 박주영·노동규 / CG 안지현 권혜민 / SBS Digital 탐사제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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