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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사법방해의 대중화, 시시비비 못 가리는 사회

[취재파일] 사법방해의 대중화, 시시비비 못 가리는 사회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

추억의 아이돌 그룹 ‘클릭비’ 멤버 김상혁이 지난 2005년 음주 뺑소니 사고를 저지른 뒤 내뱉어 '밈'이 된 이 말이 다시 한번 회자되고 있습니다. 어제 서울중앙지검은 음주운전을 하며 택시를 들이받은 가수 김호중 씨를 특가법상 위험운전치상·도주치상, 도로사고 후 미조치, 범인도피교사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했지만, 음주운전 혐의는 적용하지 못했습니다. 김 씨와 매니저, 소속사 관계자 등이 조직적으로 음주운전 범행을 은폐하는 바람에 수사 기관이 정확한 혈중알코올농도를 산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검찰은 보도자료를 내면서 이례적으로 이와 같은 ‘사법방해’ 행위를 상세히 지적하며, 보완 입법 필요성까지 설명했습니다.
 

사법 지연ㆍ방해의 대중화

보도자료를 읽으며 한 가지 궁금증이 들었습니다. 김호중과 주변인들은 어떻게 그 짧은 시간 내에 ‘사법절차를 방해하면 이득을 얻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공유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생각해보면 가수 김상혁이나 개그맨 이창명 사례처럼, 사고를 내고도 뒤늦게 사법 절차에 임해 음주운전 처벌을 면한 사례들은 많았습니다. 결국 이들이 언론 등을 통해 접한 과거의 ‘사법 방해ㆍ지연’ 사례들이 ‘리딩 케이스’가 되어 ‘한 번 해보자’는 생각의 밑거름이 됐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연예인 음주운전 사건 말고도 ‘사법 방해’와 ‘사법 지연’의 이점을 알게 해주는 사례는 차고 넘칩니다. 고관대작들의 수사와 재판과 관련해 거의 매일 쏟아지는 뉴스들이 바로 그것들입니다. 이 사례들은 여야와 정파를 가리지 않고 나타나고 있습니다. 벌써 3년 가까이 수사가 이뤄지고 있는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과 관련해, 국민들은 아직도 현직 대통령 부인의 처분은커녕 조사 여부가 결정되지 않았다는 뉴스를 접하고 있습니다. 검찰 안팎에서는 “차라리 정권 출범 전에 기소를 했다면 이미 판단이 나오고도 남았을 것”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그 와중에 터진 ‘김건희 여사 명품 가방 의혹 사건’은 검찰총장이 지난달 ‘이달 안으로 신속히 수사하라’는 지시까지 내렸습니다만, 어느새 계절이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는 사이 국민권익위원회는 같은 사건에 대해 ‘종결’처분을 내렸고,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습니다.

권력 최정점인 대통령 배우자 문제 처리가 한없이 늘어지다 보니, 케케묵은 야당 의원들 수사에 속도를 낼 명분도 약해져 버렸습니다. 수많은 통화 녹취가 언론에 나오며 세간이 떠들썩했던 ‘민주당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에서, 여러 차례 수사팀의 소환 통보를 받은 의원들은 이제 콧방귀만 뀔 뿐입니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를 둘러싼 ‘대북 송금’ 의혹 수사와 관련해서도, '수사 검사가 과거에 술을 먹고 배변을 했다'는 등의 공격까지 이어지고 있지만, 대중들은 이제 ‘그러려니’ 하는 반응입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그래도 법조계라는 하수 종말처리장에 들어오면 큰 틀에서 시시비비의 결론은 난다’는 우리 사회의 컨센서스는 이제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사법절차를 지연시키는 데에서 오는 비용은 얼마 되지 않는 데 비해 그 편익은 훨씬 커진 상황이고, 이 점에 있어서는 행정 권력과 의회 권력이 이해관계를 같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시비비 못 가리는 사회

문제는 이런 사례들이 고관대작이 아닌 일반인들 형사사건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겁니다. 다중 민생 피해를 유발한 뒤 압수수색을 받은 수천억 원대 사기범들은 호화 변호인단을 선임해 포렌식 절차에만 몇 달의 시간을 끌어버립니다. 설령 기소가 된다 하더라도 늘어지는 재판 와중에, ‘회장님’들은 구속 기간 만료로 풀려나기 일쑤입니다. 감옥에서 나와 범죄 수익은 여기저기 다 돌려놓은 상태에서 이들이 진실 발견에 협조할 리는 만무할 터. 35도 폭염 특보라는 땡볕 더위에도, 오늘도 법원 앞에는 “재판 좀 빨리 해달라”는 장삼이사들의 피켓과 현수막이 넘실대고 있습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수사기관 관계자들은 거대 야당이 ‘검찰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추진한 형사사법시스템 개편이 문제라고 주장합니다. 경찰은 검찰에, 검찰은 경찰에 책임을 넘기는 통에 대다수 일반 형사사건들은 처리가 안 되고, 방어권 행사 기술은 나날이 발전하는데 비해 수사 역량과 도구는 나날이 퇴보하는 있다는 겁니다. 야당 정치인들은 이게 다 자업자득이라고 말합니다. 재직 중엔 '엄정한 수사'를 외치던 검찰 고위 간부들이 퇴직 후 전관 변호사로 명찰을 바꿔 달고는 유력자들의 '유능한 방패'가 되고 있지 않느냐는 겁니다. 죄 없는 사람 간첩으로 몰아넣고, 인권 침해를 밥 먹듯이 일삼으며, 권력의 순풍을 타는 수사만 하던 '정치 검찰의 업보'라는 주장도 합니다. 

서로 손가락질하는 뒤편, 하루빨리 시시비비를 가려야만 하는 보통 사람들의 피눈물은 쌓이고, 이들을 대리하는 변호사들만 큰돈을 법니다. 하지만 어디서도 ‘미안하다’는 말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지난 2022년, 형사사법시스템 개편이 촉발한 ‘검수완박’ 국면 때, 검찰의 ‘주니어’들은 평검사 회의를 열어 '수사 공정성 확보 방안과 검찰 자정 방안을 제안하겠다'고 뜻을 모았습니다. 하지만 더 큰 폭풍이 몰아치기 직전인 지금, 과거의 다짐은 자취를 찾기 어렵고 검찰 내부는 이상하리만큼 조용합니다.

전 정권에서 과반 의석까지 점유하고 ‘개혁’을 외치던 거대 야당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법제도 개혁의 일환으로 사실상 상설 특검이나 마찬가지인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공수처)를 만들어 놓고도, 민주당은 지난 21대 국회 동안 이 기관에 대한 인력과 예산 확충에는 무심했습니다. 그래놓고 정작 대통령과 주변인들이 수사 대상이 된 ‘채 해병 의혹’이나 ‘김건희 여사 관련 의혹’ 사건들을 맞이해서는 ‘공수처 수사 못믿겠다’며 줄줄이 특검 발의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총선 뒤 대통령과 함께 ‘어퍼컷 연찬회’를 열었음에도 아직도 이 문제에 대해 별다른 의제 제시도 못하고 있는 여당 얘기는 굳이 길게 하지 않겠습니다.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

중세 시대에는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해 종종 누군가 죽어야 끝나는 ‘결투’를 했습니다. 집단 차원에서는 사병을 동원해 재산과 목숨을 불태우는 전투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수백 년간 죽고 죽이는 지난한 아귀 다툼 속, '이제 그만하자'고 만들어진 게 근대 사법 제도입니다. 해방 뒤 유럽에서, 미국에서 만들어진 제도들을 이래저래 수입해 갖다 쓰던 우리는,  그것이 무너져 내려 거의 작동하지 않고 있는 상황을 매일같이 목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당장은 누군가의 이득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누구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 될 게 분명합니다. 탄핵으로 궤멸됐다가 검사 출신 대통령으로 기사회생한 뒤 정권 관련 의혹에는 '피의 실드'를 치고 있는 보수 세력은 물론, 당 대표의 수많은 사법리스크 깔딱고개를 넘어가고 있는 거대 야당에게도 말입니다. 누군가 정권을 잡아 필요 최소한도의 ‘적폐’라도 청산하려할 때, ‘신 적폐’로 규정된 이들은 지금 이 시각 개발돼 시현 되고 있는 현란한 ‘사법 방해’ 기술들을 들고 나와 건건이 시비를 거는 '거울치료'를 시전하게 될 것입니다.

우울한 얘기지만 지금 우리는 이렇게 새로운 시대로 시나브로 진입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제도’를 통해 시시비비를 가리지 못한 채,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다수파를 동원하는 ‘힘 싸움’이 마지막 문제 해결 수단이 되는 그런 시대 말입니다. 그리고 비로소 그 시대가 본격적으로 개막됐을 때, 지금은 사건사고로 치부되는 여러 ‘사건’들은 일상적인 ‘풍경’이 될 것입니다. 우울 속에서 한 가지 희망을 찾아보자면, 우리만 이 일을 겪었던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아담 쉐보르스키를 비롯한 전 세계 석학들이 함께 지은 책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에서는, 비슷한 길을 걸으며 때로는 무너지기도 했지만 다시 나름의 시스템을 재건한 세계 각국의 사례들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들은 어떻게 무너져 내리던 ‘법의 지배’라는 시스템을 재건할 수 있었을까요? 흥미롭게도 세계 각국의 사례들을 연구한 학자들은 '법의 지배'의 회복은 '법'보다는 '정치'를 통해 가능하다는 답을 내놓습니다. ‘구성원들의 암묵적 합의를 바탕으로 하는 법의 지배는, 갈등 관계에 있는 정치 세력들이 균형점을 찾아 합의된 사법 시스템을 재설계할 수 있었을 때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법률가나 정치가들이 필요할 때 금과옥조처럼 외치는 '법치'라는 아름다운 시스템은 누군가 툭 던져주는 '선물'이 아니라, '정치'라는 진흙탕 속 미묘한 균형점 위에 피는 연꽃이라는 것을 세계의 현대사가 실증하고 있습니다.

원 구성 협상도 하지 못한 채 오늘도 싸움에 골몰하고 있는 정치인들은 앞으로도 채 해병 사건에서, 김건희 여사 의혹과 양평고속도로 의혹에서, 김정숙 여사 의혹에서 다양한 방법을 통해 시시비비를 가리자고 달려들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말만 내지를 뿐 영영 '현실적인 균형점'을 도출하기 위한 결단을 내리지 않는다면, 오늘 옳았던 일들은 내일 그릇된 일이 되고, 모레는 다시 옳은 일이 되는 시비의 늪은 계속되고야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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