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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바리스타'가 '황장엽 킬러'로 둔갑한 사연은? ③

[취재파일] '바리스타'가 '황장엽 킬러'로 둔갑한 사연은? ③
(2편에서 계속)

출소한 뒤 먹고 살기 위해 채권추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말이 채권추심이지 뭐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협박 공갈도 필요 없습니다. 50대 중반에 접어들은 나이에 사람들과 언성 높이는 것도 무상합니다. 이틀정도 뒤따라다니면서 돈 갚으라는 얘기를 특유의 화술로 줄기차게 해대면 왠만한 채무자들은 지쳐서 돈을 챙겨줍니다. 난 역시 프로 해결사였습니다. 채권추심 서류로 방 한쪽은 가득 쌓여갔습니다. 감정노동이란 것만 빼면 제법 체질에 맞는 직업 같았습니다.

그러나 평생 이 짓만 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평생 사람들 등 쳐먹고 살았다는 과거를 씻어내고 싶었습니다. 어엿한 내 사업을 하고 싶었습니다. 소박하지만 분위기 있는 아담한 가게를 하나 차리고 싶었습니다. 바리스타는 내 인생이 마지막 남은 꿈이 돼버렸습니다. 고용노동부가 마련해 준 교육 프로그램을 미친 듯이 따라다니며 열심히 배웠습니다. 더 이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고 개과천선한 훗날의 모습을 생각하며 즐겁게 배웠습니다. 저금리 시대에 대출을 받아 자그마한 카페를 차리는 게 어렵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모든 게 잘 풀리는 것 같았습니다. 내 인생의 노년기는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였습니다.
국정원 캡쳐_640

저를 체포해 끌고간 국정원은 국가보안법 사범이라고 추궁했습니다. 황장엽 암살시도 계획을 실토하라고 압박했습니다. 북한의 정찰총국에서 지령을 받았다는 구체적인 증거도 제시했습니다. 저는 황장엽 암살을 실제로 모의했던 유능할 킬러가 돼버렸습니다. 국정원이 인정해 준 실체가 있는 프로 해결사였습니다.

국정원은 김 씨가 북한 정찰총국의 지령을 받아 움직였던 고정간첩이었다고 제게 설명해줬습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김 씨는 먀약제조기술을 갖고 있었고 북한과 함께 마약을 제조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눈 앞이 깜깜했습니다. 미친 줄로만 알았던 김 씨는 정말 간첩이었습니다. 그리고 김 씨를 제게 처음으로 소개해 준 친구가 경찰에 전화했었다는 사실도 듣게 됐습니다. 그러고 보니 몇 년 전 황장엽을 제거해달라는 김 씨의 부탁을 듣고 친구에게 전화했던 기억이 납니다. 친구는 제게 별 얘기를 꺼내지 않았었지만 친구도 저를 대신해 김 씨를 간첩이 아닐까 의심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경찰은 간첩 신고를 받고도 연락이 오지 않았었다고 합니다. 경찰도 제보전화를 장난전화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국정원에 체포되고 나니 간사하게도 이젠 경찰이 원망스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경찰이 친구 전화를 받고 제게 연락이라도 한 번 해줬다면 이런 일이 없었겠죠. 저와 친구는 간첩신고 포상금을 받았을 테고, 저는 빚을 청산해 다시 감옥에 들어갈 일도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밀려왔습니다. 괘씸했습니다. 경찰이 한번만 전화를 해 줬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말입니다. 태생은 천박한 사기꾼이었을지 모르지만 간첩신고로 국민영웅으로 떠오르지 않았을까요?

전 타고난 화술로 사람들의 돈을 챙기던 전문 사기꾼이었습니다. 암살은 배운 적도 없고 필리핀에는 가본 적도 없습니다. 필리핀 킬러들은 당연히 알 수도 없습니다. 그저 돈에 눈이 멀어 세 치 혀로 일확천금을 뜯어내고 싶었을 뿐입니다. 고정간첩인 줄 알면서도 2천만 원을 뜯어내겠다고 목숨을 걸겠습니까? 신고를 해서 포상금을 받지!

'사기꾼'으로 처벌한다면 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전 간첩이 아닙니다. 킬러는 더더욱 아닙니다. 살인 모의? 가당치도 않습니다. 제게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것은 너무도 가혹합니다. 지금까지 살아 온 인생을 후회하고 있는 노회한 사기꾼일 뿐입니다. 마지막 남은 생애는 '바리스타'로 정직하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남은 인생 조금은 손주들에게 떳떳한 할아버지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기회를 주세요.
황장엽_640
<에필로그>
 
박 씨는 지난주 수요일 구속 상태에서 첫 재판을 받았습니다. 북한 정찰총국 공작원에게 포섭돼 황장엽 씨를 비롯한 탈북자 출신 북한인권운동가들을 암살하려고 한 혐의입니다. 국가보안법 위반 (목적수행, 자진지원, 금품수수, 편의제공) 혐의가 적용됐습니다. 박 씨는 재판에서 "돈을 챙길 목적이었지, 실제로 암살할 생각이 없었다."고 재판부에 항변했습니다.

박 씨에게 황장엽 씨 암살을 부탁한 김 씨도 재판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사기꾼(박 씨)에게 휘말렸다. 사기꾼들은 '국정원에서 자료를 제공해준다'고 속였다."고 주장했습니다. 북한 정찰총국에 포섭당했다는 장본인 역시 박 씨를 사기꾼으로 지목한 것입니다. "애당초 황장엽 암살사건은 제가 능력도 없고 가진 것도 없어 그 자체가 잘 못 됐다"... 결국 사기꾼에게 낚였다는 게 김 씨의 주장입니다.

박 씨의 전과를 통해 박 씨의 과거 행적을 살펴보겠습니다.

 - 1993년 사기로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
 - 1993년 횡령으로 벌금 20만원
 - 1995년 횡령으로 징역 8월
 - 1996년 사기 횡령 절도 신용카드업법위반으로 징역 1년6월
 - 1997년 사기로 징역 4월
 - 2011년 사기로 다시 징역 2년 2월

사기와 횡령 혐의로 전과 6범입니다. '대학총장과 국회의원을 잘 알고 있는데 이들에게 부탁해 취업을 시켜주겠다.' '카드깡을 대신 해주겠다.' '운전면허증을 발급해주겠다.'는 말로 피해자를 속여 돈을 가로챈 혐의였습니다. 폭력이나 살인, 살인 미수 같은 혐의의 전과는 찾지 못했습니다. 국가보안법 혐의도 마찬가지입니다. 박 씨의 과거 전력을 미루어 짐작했을 때 이른바 '해결사'로 지칭하는 '전문 킬러'라기 보기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박 씨는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고 있습니다. 억울한 건 사기혐의로 처벌은 달게 받겠지만 자신은 국가보안법 위반 사범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기꾼에게 '킬러'...그것도 북한의 지령을 받아 황장엽 씨 같은 주요인사를 살해하려고 했다는 혐의는 지나치다는 게 박 씨의 주장입니다.
탈북자 캡쳐_500
고정간첩이 실제 킬러라고 믿을만큼 화술이 뛰어난 건 다른 사람들도 인정하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박 씨를 수사한 검찰도 이 부분은 어느정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살인을 하지 않았더라도 정황증거로 미뤄 짐작했을 때 살인을 모의한 점은 충분히 기소사유가 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살인하지 않았더라도 사람 속 마음을 들어가 보지 않아 알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박 씨가 고정간첩에 포섭돼 실제로 황장엽 씨를 살해하려고 했는지...박 씨는 그냥 전문 사기꾼인지...판단은 재판부의 몫입니다. 대한민국 법원은 과연 어떤 결정을 내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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