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국내에서 개봉한 영화 '위플래쉬'가 개봉 2주차에도 관객들의 호평을 받으며 박스오피스 2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1위는 할리우드 직배사인 20세기폭스코리아의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2월 11일 개봉)입니다. 한국 내 킹스맨의 인기는 20세기폭스 미국 본사에도 큰 화제가 될 정도입니다. 이 영화는 미국-영국 합작영화인데, 영국보다 한국에서 더 많은 매출을 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국 내 매출액은 2500여만 달러. 그런데, 한국은 4000만 달러 가까이 됩니다.
하지만, 오늘은 1위 킹스맨이 아니라, 2위 위플래쉬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위플래쉬는 할리우드 직배사가 아니라 국내 중소 영화수입사인 '미로비젼'이 갖고 온 작품입니다. 투자배급사 쇼박스가 배급 대행을 맡고 있습니다. 개봉 9일차인 어제(3월 19일)까지 430개 상영관에서 45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습니다. 매출은 이미 35억 원을 넘었군요.
그런데, 영화계 소식에 따르면 미로비젼이 위플래쉬를 구매한 가격은 굉장히 적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보통 조금 이름있는 작품이라면 배급마케팅 비용을 제외하고 작품 구매가만 3억에서 6억 원 정도 합니다. 미로비젼 측은 정확한 액수를 공개하지 않고 있지만, 그보다 훨씬 싼 가격에 구매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영화계에선 위플래쉬의 관객이 100만 명을 넘어 150만 명까지도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당장 다음달 23일 '어벤져스2' 개봉일까지 대형 경쟁작들이 없는 것도 한 이유입니다. 미로비젼은 이 작품으로 수십억 원의 수익을 얻겠군요.
과연 미로비젼 측은 어떻게 이렇게 훌륭한 작품을, 그렇게 싼 가격에 갖고 올 수 있었을까요?
2012년 이야기부터 해보죠. 위플래쉬는 수년 전부터 단편 시나리오가 미국 영화업계에서 돌고 있었습니다. 2012년에는 시나리오를 평가하는 블랙리스트(www.blcklst.com/lists)가 뽑은 "아직 제작되지 않은 올해의 시나리오 중 한 편"에 선정되기도 했죠. 하지만, 미국 내 투자자들은 망설였습니다. 음악학교 학생과 엄한 교수의 갈등과 화해... 소재는 좋은데, 스토리는 단순했습니다. 연출을 하겠다는 감독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시나리오를 쓴 데미언 차젤은 감독으로서 충분한 실력을 인정받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반면, 단편의 주연은 장편 영화에서 '마일스 텔러'(주인공 앤드류 역)로 바뀌었죠. 단편을 공개하자 투자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한 투자사가 330만 달러(현 환율로 37억 원)의 제작비를 내놓았고, 시나리오를 쓴 차젤 감독에게 연출까지 맡깁니다. 미국에선 통상 제작비 3000만 달러 이하를 중소 영화로 구분하는 만큼 '위플래쉬' 장편도 선댄스급인 셈입니다.
2014년 1월, 이렇게 만들어진 장편이 선댄스 영화제에 처음 공개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러 갔겠죠. 그런데, 선댄스 영화제에는 영화를 사고 파는 마켓이 따로 없습니다. 그냥 일반 관객 상영만 있습니다. 한국 수입업체들은 거래도 하지 못하는 선댄스 영화제에 영화만 보러 출장을 가지 않습니다. 미국 내 배급업자들은 많이 오죠. 선댄스에 걸렸던 영화들은 보통 2월 베를린 영화제 이후 마켓에 나옵니다.
미로비젼 채희승 대표는 선댄스 영화제에서 일반 관객들과 함께 위플래쉬를 봅니다. 그리고, 곧바로 위플래쉬의 미국 판매사를 찾아갑니다. 미국의 작은 영화제작사는 영화 판매와 배급을 전문 판매사에 맡깁니다. 판매사는 "다음 마켓까지 기다리라"고 했지만, 채 대표는 끈질기게 "영화를 달라"고 요구했고, 결국 계약에 성공합니다. 베를린 등 이후 마켓에서 사려고 했다면 다른 수입사와의 경쟁 때문에 수억 원을 줬어야 했을 겁니다.
고교시절 드럼을 연주했던 차젤 감독은 자신이 플렛쳐 같은 엄한 선생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주연 마일스 텔러(학생 앤드류 역)의 드럼 연주도 화제입니다. 영화 속 드럼 연주 '음악'은 프로 재즈드럼 연주자가 했다고 하네요. 하지만, 드럼 연주 '연기'는 모두 마일스 텔러가 직접 했습니다. 즉, 연주 '연기'는 배우가, 음악 '연주'는 프로가 했다고 할 수 있겠네요.
위플래쉬의 한국 내 흥행 수익은 미국을 제외한 해외 시장 가운데 가장 많습니다. 국내 영화팬들이 음악 영화를 좋아하는 것도 한 이유겠죠. 국내 영화팬들이 비슷한 비슷한 액션·사극·스릴러 장르만 생산하는 한국 영화에 실망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위플래쉬는 2014년 10월 미국에서 개봉돼 13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습니다. 처음 6개 상영관에서 시작해 최대 567개 상영관까지 확대됐다가 지금은 상영이 끝난 상태입니다. 미국 전체 상영관 수는 5600여 개입니다. 미국 전역 개봉을 하려면 2000개 이상의 상영관을 확보해야 합니다. 위플래쉬는 미국 내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영화였던 겁니다.
소니픽쳐스 내에서 저예산영화 분야를 담당하는 소니픽쳐스 클래식도 대규모 배급 예산을 집행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이미 극장에서 제작비의 4배 이상을 벌었으니, 그 이후는 그냥 DVD판매로 부가판권 수익을 노린 것이죠. 그리고, 드디어 올해 2월 DVD 판매를 시작합니다. 한국 개봉도 하기 전에 DVD판매를 시작한 것이죠. 미로비젼이 구매가를 낮추는 대신 DVD 판매 시기 등은 충분히 협의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위플래쉬는 DVD 판매와 함께 인터넷에 불법파일이 올라갔습니다. 미로비젼와 쇼박스 측은 전문업체에게 파일 단속을 의뢰해놓은 상황입니다. 불법 파일은 한국저작권위원회 등에서도 꾸준히 단속을 하고 있습니다. (설마 갖고 계시진 않죠? 당장 지우시고, 극장으로 가시길...)
불법 파일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지만, 위플래쉬 사례는 분명히 중소 수입사들에게 훌륭한 성공신화입니다. 영화가 성공하지 못해 망하는 수입사도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수입사들은 할리우드 직배사와 달리 좋은 영화, 돈이 되는 영화를 선별할 수 있는 선구안이 필요합니다. 비싼 출장비를 써가며 해외 마켓을 부지런히 돌아다녀야 합니다. 이런 수입사들의 고군분투 덕분에 국내 영화팬들이 좀더 다양한 영화를 볼 수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개별 회사의 사업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중소 영화수입업체들이 우리 영화시장의 한 부분 맡고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위플래쉬 이후에도 색다른 소재와 내용의 외화들이 꾸준히 국내 영화팬들과 만날 수 있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