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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바리스타'가 '황장엽 킬러'로 둔갑한 사연은? ②

[취재파일] '바리스타'가 '황장엽 킬러'로 둔갑한 사연은? ②
(1편에서 계속)

김 씨를 소개해 준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제 친구가 제게 김 씨를 왜 소개시켜줬는지, 어떻게 알게 된 사이인지 확인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우리 회사에 택배 배달하는 사람이야. 알고 지낸 지는 좀 됐고...왜?"
"고향이 어디야? 가족관계는?"
"그건 잘 모르지만...여기는 신원이 확실한 사람만 일을 시켜. 무슨 문제있어?"
"갑자기 황장엽을 제거 해달라는데 좀 황당해서 말이야. 내가 잘못들은 거겠지. 그래 신경쓰지 마라. 신분이 확실하다는데... 잘 알았다."


친구가 일하는 회사는 일반인들도 이름을 들으면 알 만한 중견기업입니다. 신분이 확실한 사람만 일을 시킨다는데 굳이 물어볼 것까지는 없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물어봤다면 친구가 나를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았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간첩이라고 보기에도 좀 이상합니다. 보이스피싱 전화를 거는 조선동포들이 아무리 표준어를 쓰려고 해도 특유의 억양을 숨길 수는 없습니다. 간첩이 표준어를 훈련받았다고 해도 어딘가 티가나긴 날 겁니다. 그런데 억양에서 이상한 점은 전혀 느낄 수 없었습니다. 괜히 제가 과민반응을 보인 건 아닌지...머쓱했습니다.
 
-

'따르르릉' 휴대전화가 울렸습니다.
 
"여보세요?"
"경찰서입니다. 사기 혐의로 고소 당하신 거 아시죠? 한 번 출석해주셔야겠는데요?"
"아. 그게 아니고요. 돈을 빌렸는데 못 갚고 있는건데...제가 곧 나갈게요. 죄송해요."


하긴 이런 상황에 처한 제가 찬밥 더운밥을 가릴 때는 아닙니다. 당장 9천만 원의 돈을 갚아야 합니다. 또 감옥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접니다. 간첩이 아니라면 의뢰인이 제정신이 아닌들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어짜피 전 돈을 뜯어내면 그만이니까요. 그리고 며칠 뒤, 김 씨를 다시 만났습니다.

프로 사기꾼은 마음이 급할수록 돌아가야 합니다. 심호흡을 하고 머릿속에 할 얘기를 정리했습니다. 교도소를 오가며 진화를 거듭한 천부적인 화술이 다시 발동했습니다.

"필리핀에 제가 아는 킬러들이 있습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정리됩니다... 실력은 의심 안 하셔도 됩니다."
"아, 그래요? 어떻게 처리합니까?"


김 씨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습니다.

"이 나라는 총을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방법은 하나입니다. 황장엽 씨의 일정과 동선을 파악해서 따라다니다가 인적이 드문 곳에서 대포차로 밀어버리면 됩니다. 경찰은 뺑소니 사고라고 생각할 겁니다. 차적은 조회되지 않을 거고 킬러들은 범행이 끝나면 곧바로 필리핀으로 보낼 겁니다. 흔적이 남지 않습니다. 전 해결사입니다."

김 씨의 입가가 미묘하게 풀리기 시작합니다. 지금이 타이밍입니다.

"그런데 김 사장님이 잘 아시겠지만 아무래도 킬러들이 원정길이라 돈이 좀 필요합니다. 애들 항공비에 숙박비에 수고료 해서 수수료도 있고 잘 아시잖아요. 쉬운일이 아니란 거..."
"얼마면 되겠습니까?"
황장엽_640
김 씨가 침을 꿀꺽 삼켰습니다. 황장엽을 왜 제거하려고 하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계약금이 오가는 절대절명의 순간을 놓칠 수 없었습니다. 최대치를 불렀습니다. 거래의 기본입니다.

"착수금 2억 5천만 원에 중도금 2억 5천만 원... 성공하면 성공보수금으로 5억 원.. 총 10억 원으로 계약하면 어떻겠습니까?"

김 씨의 표정이 굳었습니다.

"시간은 얼마나 필요합니까?"

시간은 최대한 미루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한 건 크게 하고 도망갈 시간적인 여유도 벌어야 했습니다.

"3개월 정도 걸립니다. 애들 여권에 비자 만들어줘야 하고, 또 황장엽 동선도 확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는 국정원 직원에게 물어보려고 하면 접대라도 해야죠? 장비도 새로 사야하고... 아시겠지만 사실 10억이라고 하지만 남는 게 별로 없어요. 필리핀 아이들도 요즘 인건비가 올라서 그 정도입니다."

계약이 성사되기 위해서는 문서로 설득하는 게 가장 효과적입니다. 제 말이 허무맹랑하지 않게 보이려면 자금을 어디에 어떻게 쓸지 구체적으로 적어주는 게 좋습니다. 문서를 보여주자 예상대로 김 씨의 표정은 한결 편안해 보였습니다. 김 씨는 계획서를 검토한 뒤 나중에 다시 만나자고 했습니다.

사실 저는 외국에 나가 본적이 없습니다. 필리핀(?)... TV에서 총싸움하고 치안이 엉망이라길래 그냥 한번 둘러댔습니다. 필리핀에 이민간 친구조차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해도 정말 그럴싸하게 얘기했습니다. 김 씨의 눈빛을 보면 절 믿고 있었습니다. 전 프로 해결사였습니다. 이제 착수금을 받으면 9천만 원을 먼저 갚고 나머지 빚도 청산할 수 있을 겁니다. 부푼 마음에 김 씨에게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일이 잘 풀리는 듯 했습니다. 다시는 감옥에 들어가기 싫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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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만난 김 씨의 일성은 금액이 너무 비싸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돈을 깎아줄 생각은 없었습니다. 아니 상대는 황장엽인데 깎아줄 마음은 없었습니다. 계약서에 알리바이까지, 이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을 거듭했는데 10억 원은 받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시겠지만 황장엽은 거물이에요. 주변에 경호인력도 많고 작업이 어렵다니까요? 아시는분이 왜 그러실까?"

김 씨는 새로운 제안을 했습니다.

"착수금을 좀 깎읍시다. 진행되는 것 봐서 성공하면 그때 섭섭지 않게 맞춰드리겠소."

당장 1억 5천만 원만 있으면 급한불은 끄는 셈이니까 못 이기는 척하고 받아들일까도 생각했습니다만... 한 번 더 버텨봤습니다.

"착수금은 무조건 2억 5천만 원입니다. 시작부터 신뢰가 깨지면 일 못합니다."
"2억 5천만 원은 너무 많은 금액입니다."


속은 척 하고 제안을 받아들일 걸...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이 계약은 깨졌습니다. 10억 원의 꿈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김 씨와의 만남은 더 잦아졌습니다. 어색함은 없었지만 좀 더 은밀해 졌습니다. 김 씨는 새로운 제안을 했습니다.

"황장엽은 거물이라고 칩시다. 부담스러운 가격인 게 사실입니다. 그럼 박상학 씨나 강철환 씨는 어떻습니까?"
"북으로 삐라 뿌리는 박상학 씨 얘기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북한 사투리를 쓰지 않아서 의심없이 만나고 있었지만 이 사람 정말 간첩일 수도 있겠다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황장엽보다 인지도는 떨어지지만 북한에서 제법 눈엣 가시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을 꼭 집어 제거해달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황장엽 한 명이라면 개인적인 원한관계로 치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얘기가 길어질수록 머리는 다시 복잡해졌습니다.
그래픽_북한간첩

'김 씨는 정말 간첩일까?'

어릴 때 배운 간첩은 무장공비라고 배웠습니다. 특수훈련을 받은 살인기술을 연마한 인간 병기들입니다. 영화에서도 나옵니다. 간첩은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김 씨가 간첩이라면 사기꾼인 저를 가만 놔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굳이 나 같은 해결사에게 부탁할 이유도 없을 겁니다. 본인이 조용히 해결하면 될 일입니다. 그런데 왜 내게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일까?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 그러기엔 김 씨의 눈빛은 인간병기 다운 위압감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뭐, 이유야 어쨌든 이 사람이 뭐하는 사람이든 상관없다 싶었습니다. 어짜피 난 돈을 뜯어내는 게 목적입니다.

"10억 원입니다."

김 씨는 말이 없었습니다. 이 거래도 역시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김 씨는 대신 정보수집을 부탁했습니다.

"박상학과 강철환 씨의 인적사항과 거주지 같은 정보를 알려주시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사람이 필요한 일입니다. 활동비 없이 움직이기 어렵습니다. 탐문도 하고 숙식할 때 돈도 듭니다."
"활동비는 어떻게든 마련해 보겠소."


대한민국에서 정보수집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인터넷에서 이름만 검색하면 근무지 정도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습니다. 저번엔 인쇄해서 갖다줬다 인터넷에서 찾은 정보라는 게 들통이 났습니다. 땀흘려 찾아냈다는 흔적을 보여주기 위해서 메모지에 일일히 손으로 적어 내려갔습니다.

김 씨는 메모지 한 두 장을 건넬 때마다 활동비를 현금으로 매번 지급했습니다. 인터넷으로 이만한 아르바이트는 없었습니다. 기대했던 한탕을 챙기지는 못했지만 조금씩 빚도 갚고 용돈도 쓰면서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난 프로 해결사였습니다.

아르바이트는 역시 임시직이었습니다. 김 씨의 요구는 하루가 다르게 늘어갔습니다. 활동비를 미리 줬는데 원하는 정보를 제때 갖다주지 않는다고 타박만 늘어갔습니다. 인터넷으로 찾을 수 있는 정보도 한계가 있습니다. 발로 뛰어야 알아봐 줄 수 있는 내밀한 정보들을 요구했습니다. 이제 그만둘 때가 됐다 싶었습니다. 정말 간첩이구나 싶었습니다. 얼마 안 되는 돈 때문에 사기를 치려다 제가 그 올가미에 엮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엄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김 씨는 날 경찰에 고소하지 못할 겁니다. 나를 구속시키기 전에 본인이 먼저 구속될 겁니다. 그냥 여기서 손을 떼면 그만입니다. 2천여만 원 정도를 만져본 게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결국 다시 교도소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돈을 갚지 못해 사기 혐의가 적용됐습니다. 다시 뜨거운 페트병을 안고 얼음장 같은 교도소 바닥에서 한겨울을 보내야 했습니다. 아무리 사기꾼이라지만 세상은 저에게 많은 고난을 주었습니다. 김 씨와의 작별은 홀가분했지만 교도소는 반갑지 않았습니다. 고통스러운 2년이 또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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