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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 마피아 잡는 검사들…끝나지 않는 40년 전쟁

[뉴스쉽] 영화 '대부' 그 이상의 이야기, 현재도 진행 중

팔코네(왼쪽)와 보르셀리노(오른쪽). 토니 젠틸리가 1992년 기자회견에서 촬영.
사진 속 두 남자는 고향 친구였다. 그들의 고향은 시칠리아의 주도 팔레르모. 남국의 낭만이 넘치는 고장이지만 시칠리아 마피아의 고향이기도 했다. 많은 친구들은 자라서 마피아가 되었다. 그들은 다른 길을 갔다. 마피아를 잡는 검사가 되었다. 혈연과 인맥으로 얽히고 설킨 동네에서 이 둘은 친구와 친척과 지인들을 잡아넣으며 마피아와 싸워나갔다.

이들은 1986년부터 1992년까지 '막시'재판을 이끌었다. '막시(maxi)'는 미니(mini)의 반댓말이다. 수백 명의 시칠리아 마피아(코사 노스트라) 조직원과 비호세력을 감옥으로 보냈다. 코사 노스트라의 전투원들이 폭탄으로 공격해도 끄떡없을 벙커 재판소가 세워졌다.

'막시 재판'이 진행된 벙커 재판소. 사진출처: La mia Italy
팔코네와 보르셀리노, 두 사람이 막시 재판을 통해 단죄하던 주요 대상 중 하나는 코사 노스트라 중에서도 콜레오네(Corleone) 패밀리였다. 영화 '대부'의 소재가 되기도 했던 콜레오네 패밀리의 보스는 살바토레 리이나(Salvatore Riina), 닉네임 '토토' 리이나였다. 1930년 콜레오네 태생인 그는 마피아의 전통을 깨고 여자와 어린아이, 죄 없는 시민도 가차 없이 살해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야수(beast)였다.

살바토레 리이나의 머그샷. 1993년 이탈리아 경찰이 배포.
시칠리아의 왕으로 군림하던 리이나는 국가 공권력과 정면으로 '맞짱'을 뜨기로 했다. 팔코네와 보르셀리노, 두 검사의 수사로 조직원들이 유죄판결을 받고 감옥에 가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새로운 수사기법을 동원해 마피아의 돈거래와 정-관계 상납의 고리를 밝혀냈고, 증인 보호 프로그램을 가동해 마피아의 조직원들이 내부 사정을 고발하고 감형을 받도록 했다. '배신은 곧 죽음'이라던 철통같은 불문율에 금이 갔다. 범죄의 세계에서 시칠리아 마피아의 신뢰성이 의심받게 되었다. 새로운 거대시장인 미국과의 거래에도 문제가 생겼다.

생전의 조반니 팔코네. 사진: Wikipedia.

검사를 암살하라…시칠리아 마피아의 도 넘은 결정


리이나의 콜레오네 패밀리는 눈엣가시인 팔코네 검사를 먼저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영화 '대부'에 나올법한 차량 대상 폭탄테러를 면밀하게 기획했다. 팔코네는 수도 로마에 수립된 마피아 문제 위원회의 장으로 선임되어 비행기 편으로 로마를 드나들게 되었다. 팔코네가 시칠리아 팔레르모 공항에 내려 도심으로 진입하는 바닷가 고속도로를 범행 장소로 삼았다.

시칠리아 팔레르모 공항에서 가파치로 가는 해안 고속도로. 팔코네 검사가 살해된 구간. France24 유튜브 채널 캡처.
리이나의 부하들은 고속도로 아래 배수터널에 500kg이나 되는 폭탄을 설치했다. 길가에 오래된 냉장고도 내놓았다. 폭탄을 리모콘으로 터뜨리는 정확한 순간을 잡기 위해서였다.

1992년 5월23일, 조반니 팔코네와 그의 부인, 경호원 세 명의 차량 행렬이 문제의 냉장고 앞을 지나는 순간, 길 아래 매설된 500kg의 폭약이 한꺼번에 터졌다. 선두의 호위 차량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구겨졌다. 팔코네 검사 부부가 탄 차량은 길가에 처박혔고, 두 사람은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숨졌다.

팔코네 검사 부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1992년 일명 '가파치 학살' 현장. (BBC 영상 캡처 재구성)
팔코네의 동료이자 친구인 보르셀리노는 중앙정부로부터, 팔코네 후임으로 로마의 반마피아 위원장 자리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러나 거절했다. 그는 전쟁터인 팔레르모에 남아서 마피아 수사, 그리고 팔코네 살해사건 수사를 계속하길 원했다.

생전의 파올로 보르셀리노. 사진 출처: Wanted in Italy.
팔코네 장례식의 추도사를 하면서, 보르셀리노는 말했다. 팔코네는 죽음이 닥쳐오는 걸 예감하고 있었지만 겁내지 않았다고. 자신에게 남은 생명 또한 얼마 되지 않는다고. 그러나 마피아와의 싸움에서 물러서지 않겠다고. 당시 그는 한 TV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코사 노스트라 마피아와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같은 기업인들의 결탁 의혹을 언급하기도 했다.

팔코네 살해의 배후를 밝히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시칠리아는 코사 노스트라 비호세력 천지였다. 팔코네가 숨진 지 두달이 다 돼가는 1992년 7월19일, 보르셀리노는 이 사건과 관련해 마피아 내부 제보자 2명을 직접 신문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아냈다. 낮 업무를 마치고 그는 잠시 팔레르모 시내의 어머니 댁에 들르기로 했다. 오후 4시 58분, 보르셀리노와 그를 경호하는 차량들의 행렬이 아멜리오 가(via D'Amelio)에 접어들었다.

원래 보르셀리노가 가는 길은 미리 차량을 통제하고 길가에 주차된 차량도 치워놓는 게 경호 프로토콜이었다. 그런데 이때 길가에 주차된 흰색 피아트 차량이 있었다. 선두 차량의 경호원이 '어, 이상한데...?' 라고 생각했지만 이미 늦었다. 문제의 차량에 숨겨진 TNT 100kg이 한꺼번에 폭발했다.

보르셀리노 폭사 현장. 당일 이탈리아 매체들 사진을 재구성.
보르셀리노는 항상 빨간색 공책을 지니고 다니며 수사 경과와 아이디어를 기록했다. 폭사 현장에 처음 도착한 경찰관은 차량에서 이 빨간색 공책을 수거했고, 가장 먼저 달려온 검사 주제페 아얄라에게 제출했다. 그 후로 이 공책은 실종됐다. 나중에 아얄라는 마피아 수사 검사와 판사들에게 붙이는 경호를 축소해야 한다고 주장해서 여론의 거센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후의 마피아 수사에 제동이 걸리는 듯했다.
 

민심의 반격…쫓기게 된 마피아 보스들


코사 노스트라는 의기양양했다. '막시 재판'의 두 주역을 모두 제거했으니, 이제 모두들 더욱 마피아를 겁낼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었다. 도를 넘은 범죄 세력의 횡포에 시칠리아 민심, 아니 이탈리아 전역이 들끓어 올랐다. 보르셀리노의 장례식은 반마피아 정서의 기폭제가 됐다.

사람들은 팔레르모 공항을 '팔코네-보르셀리노 공항'으로 명명하며 두 검사의 용기와 희생을 기렸다. 기사 서두에 소개한 팔코네와 보르셀리노의 사진은 두 사람이 숨지기 몇 주 전 기자간담회에서 찍힌 스냅사진인데, 이 사진이 팔레르모 곳곳에 벽화로 그려졌다. 벽화들은 주기적으로 코사 노스트라 조직원들에 의해 훼손됐고, 반마피아 활동가와 시민들에 의해 복원됐다.

시칠리아 팔레르모의 한 아파트에 그려진 벽화. 사진:AP=연합
살해 계획을 주도한 코사 노스트라의 대두목 살바토레 리이나(Salvatore Riina)가 1993년 검거됐다. 이미 궐석재판에서 26번의 종신형을 살도록 선고받은 상태였다.

1993년 검거돼 철창 뒤에 갇힌 살바토레 리이나, 코사 노스트라 대두목 (사진: AP)
2명의 검사와 10명 가까운 경호원을 살해한 두 건의 테러는 코사 노스트라를 구성하는 여러 패밀리의 연합작전이었다. 그중 대두목 격인 리이나가 체포되자, 관련된 다른 보스들은 공개 활동을 끊고 숨어서 휘하조직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피아를 잡으려는 공권력에게 공포를 심어주기 위한 공격을 계속했다. 그런 보스들 중 한 명이 며칠 전 체포돼 세계적으로 보도된 마테오 메시나 데나로(Matteo Messina Denaro)였다.

은신 전인 1990년대 초반에 사진에 찍힌 데나로. 사진: 이탈리아 경찰-AFP

힘의 공백을 메운 또다른 악의 세력


데나로는 1992년 팔코네와 보르셀리노 암살 작전에 관여했을 뿐 아니라, 리이나가 체포된 후 코사 노스트라의 '비밀 장부'를 인계받은 인물로 알려졌다. 1993년에는 코사 노스트라가 밀라노·로마·피렌체에서 10여 건의 폭탄 테러를 일으켰는데, 데나로는 여기에도 깊숙이 관여한 혐의를 받았다. 가장 악명높은 사건은 조직원이 법정에서 증언하는 것을 막기 위해 당시 12살이던 그의 아들 주제페 디 마테오를 납치 살해한 것이었다. 코사 노스트라는 주제페를 2년 넘게 감금했다가 목 졸라 살해한 뒤 시신은 산에 녹여버렸다.

1930년생인 리이나는 감옥 안에서 점차 힘을 잃어갔다. (2017년 87세의 나이로 옥중에서 사망했다.) 1962년생인 데나로는 그 힘의 공백을 차지하고 코사 노스트라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 후에도 수십 명을 살해하거나 살인을 지시한 혐의로 2002년 5월6일, 궐석 재판에 부쳐져 미리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팔코네와 보르셀리노가 살해된 지 10년 만이었다.

1993년 이탈리아 경찰이 배포한 데나로의 사진.
하지만 데나로 검거는 쉽지 않았다. 데나로는 그리스 등 인접국을 넘나들며 향락을 누리고 범죄를 지시했다. 지역사회에 모세혈관처럼 퍼져있는 '패밀리'들이 은신처를 제공하는 등 각종 도움을 주었고, 마피아에 매수돼 수사기관의 움직임을 알려주는 유력자들도 적지 않았다. 게다가 데나로는 90년대 초반에 마지막으로 사진에 찍힌 뒤 한 번도 얼굴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마피아 검거 작전을 수행하는 군사경찰대 카라비니에리(Carabinieri)가 90년대 초반 사진을 바탕으로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몽타주를 제작해 배포했는데, 그 자체가 데나로 검거 불가능성의 상징처럼 돼 버렸고, 데나로는 범죄의 전설이 되어갔다. 그는 건설, 풍력 에너지 등으로 코사 노스트라가 개입하는 업종을 확대하고 정부 보조금을 받는 사업에도 손을 대며 조직의 금고를 불려 나갔다.

이탈리아 경찰이 데나로의 젊은 시절 사진을 토대로 제작한 노화 추정 모습. 사진: ANSA통신-AFP.

유령과 싸우는 사람들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겁먹고 도망치기는 커녕 죽음의 구덩이에 오히려 뛰어드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팔코네와 보르셀리노, 두 검사의 순직을 보며 새로운 세대의 검사와 판사들이 마피아와의 전쟁에 자원했다. 리아 사바(Lia Sava)도 그중 한 명이다.

리아 사바. 사진: LaPresse 캡처
리아 사바는 1991년 로마의 민사재판 담당 판사로 법조 경력을 시작했다. 그러나 마피아에 의한 '학살의 시대'(1992)를 경험하면서 시칠리아 발령을 자원했다. 시칠리아 주도인 팔레르모에 부임해서는 생전의 파올로 보르셀리노와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다. 팔코네가 먼저 살해당하고 보르셀리노가 죽기 얼마 전이었다. 보르셀리노가 살해당한 뒤 그의 부인 아그네제 보르셀리노에게서 '힘내서 싸워달라'는 말을 들은 것을 소중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리아 사바. 사진: Giornale di Sicilia
이탈리아 매체 안티마피아2000에 따르면, 2002년 궐석재판에서 데나로의 종신형을 받아낸 것도 당시에 칼타니세타(Caltanissetta) 검찰에서 일하던 리아 사바였다. 24년째 군사경찰대의 경호프로그램 아래 살고 있는 리아 사바는 지난해, 팔레르모 최초의 여성 법무장관이 되었다.

이런 사람들이 반마피아 수사를 이끄는 두뇌라면, 실제로 마피아 단원들과 총구를 겨누는 검거 작전은 군사경찰대 '카라비니에리(Carabinieri)가 수행한다. 이들은 마피아 조직 내에 위장 잠입해 정보를 수집하고 주요 인물 검거를 위한 작전을 세운다. 그만큼 위험한데, 마피아 피해자 가족들이 복수를 위해 지원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데나로를 30년간 추적한 끝에, 그가 암 치료를 받는 병원을 찾아낸 것도 시칠리아 카라비니에리였다. 병원은 팔레르모에 있었다. 등잔 밑이 어두웠던 것이다.

지난 16일 오전, 암 치료를 위해 병원을 찾아온 데나로. 검거되기 직전의 병원 cc-tv.
군사경찰대 카라비니에리 배포, AP, 연합.
지난 16일 오전 9시 반. 병원 앞 카페에서 느긋하게 모닝커피를 즐기고 나오던 데나로를 카라비니에리 대원들이 체포했다. 저항은 없었다. 동선이 완벽하게 파악되어 있었기 때문에 주변 차단도 성공적이었다. 팔코네와 보르셀리노가 정착시킨 제보자/증인 보호 프로그램이 마피아를 벗어나려는 조직원들의 신뢰를 얻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1.16 검거 직후 카라비니에리(군사경찰대)가 공개한 데나로의 머그샷. 게티이미지.
데나로 검거 소식이 전해지자, 팔레르모 시민들은 카라비니에리에 박수와 환호를 보냈고, 팔코네와 보르셀리노의 초상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이 사진은 마피아의 손아귀에서 해방된 나라를 꿈꾸는 사람들의 희망의 표상이자 연대의 상징이었다.

1월16일밤, 팔레르모 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 사진:AP=연합
시칠리아의 상인과 시민들은 이제 마피아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공개적으로 드러낸다. 영화 '범죄도시1'에서 형사들의 깡패 검거 노력에 마음이 움직인 시장 상인들이 보인 것과 같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제 상인들 중 30% 이상이 피쪼(pizzo)로 불리는 '보호비'를 상납하지 않는다고 한다. 갈취는 코사 노스트라와 같은 마피아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지만, 그들은 여론의 주목을 피하기 위해 예전보다 눈에 띄게 폭력행사를 줄였다. 민심을 얻기 위해 코로나19 봉쇄 때는 지역 소상인들에게 마피아가 보조금을 주기도 했단다.

그렇다면 이탈리아 국가가 마피아와 벌이는 전쟁은 국가의 승리로 끝나는 건가?

그렇지 않다.
 

시칠리아 마피아보다 더 큰 범죄조직의 창궐


지금까지 얘기한 건 이탈리아 마피아 중 일부인 시칠리아섬 코사 노스트라에 대한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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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반도를 장화 모양이라고 볼 때, 구두코 부분인 칼라브리아는 산지가 많고, 예로부터 가장 못 사는 지역 중 하나다. 여기서 19세기부터 세를 불려 온 갱단이 '은드란게타'이다. ('Ndrangetha. 우리말로 '은드랑게타'로 표기하기도 한다.)

시칠리아 기반의 코사 노스트라가 1990년대 이후 검찰의 강력한 수사로 점차 약화되는 사이, 은드란게타는 마약 거래를 장악하며 이탈리아 최강 범죄조직으로 올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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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드란게타는 북부의 대도시 밀라노에 적극 진출했다. 거기서 경제력을 키우고 대규모 돈세탁과 마약 무역을 진행하며 중앙정치와 기업가들에게까지 마수를 뻗쳤다. 이탈리아 국경을 넘어 유럽 전역의 코카인 거래를 장악해 나갔다.

벨기에 앤트워프 항의 마약 검색. 바나나 컨테이너는 남미 카르텔이 유럽에 코카인을 대량으로 보낼 때 가장 애용하는 방법 중 하나로 알려졌다. 사진=AFP,연합.
벨기에와 네덜란드의 컨테이너항은 남미산 코카인이 유럽으로 들어오는 최대 게이트웨이다. 지난해(2022) 앤트워프 항에서 109.9톤, 로테르담항에서 70.5톤의 코카인이 압수됐다. (전년 대비 75% 증가). 우리나라에서 마약이 대량 압수될 때 단위가 kg인 것을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양이다. 은드란게타는 유럽 전체 코카인 무역의 80%를 통제하며 매년 8백억 달러를 벌어들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들은 코카인을 생산하는 남미 마약 카르텔의 가장 강력하고 믿을만한 파트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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