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가자.” 한 살 많은 언니 영희가 눈물을 삼키며 대답한다.
두 사람은 손을 꼭 붙잡고 일어선다. 하지만 두려움에 떠는 언니를 격려하며 먼저 일어선 정민은 결국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공식 기록’이 없는 탓에 추산할 뿐인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숫자는 최소 20만 명이다. 그 가운데 현재까지 우리 정부에 공식 등록된 할머니들의 숫자는 238명뿐이다. 그 238명 속에 정민은 없다. 그래서 ‘정민’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대명사다. 돌아갈 고향은 달랐더라도, 정민과 마찬가지로 끝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적어도 19만9천명 넘는 소녀들 모두를 아우르는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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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픔이 더욱 안타까운 건 비단 시간의 흐름이나 육체적 죽음 때문만은 아니다. 할머니들의 아픔을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으로는 알지 못하는 어떤 이들 때문이기도 하다. 위로의 말은 건네지만, 진심으로 그들을 끌어안지는 않는 어떤 이들 때문이기도 하다. 그 어떤 이들은 전쟁을 핑계로 반인륜적 범죄를 거리낌 없이 자행한 일제만은 아니다. 그 어떤 이들은 바로 우리들이기도 하다.
영희가 위안부 피해자 등록을 위해 동사무소를 찾는 장면에서, 영화는 전쟁에 광분한 70여년 전 일제가 아닌 오늘 이 시간 ‘우리’의 책임을 분명하게 묻는다. 차마 입을 떼기 어려워 돌아서는 영희의 귀에 담당 공무원의 말이 비수처럼 꽂힌다. “미치지 않고 어째 그런 과거를 밝혀?”
수십 년 만에 애써 용기를 내 찾아간 고향은 영희에겐 너무나 낯설다. 밤마다 꿈 속에서 만나던 정겨운 풍경은 어디에도 없다. 영희는 후회한다. “안 오는 게 나을 뻔 했다. 여는 이제 내 고향 아니다.”
개봉 전 공개된 ‘귀향’의 예고편엔 ‘20만 명’과 ‘238명’ 외에 또 하나의 숫자가 등장한다. 현재 ‘생존한 할머니들의 숫자, 46명’이다. 그런데 영화가 개봉된 날 이 숫자는 이미 틀린 숫자가 돼 있었다. 예고편 공개 후 개봉 전까지 길지 않은 기간 동안 피해자 할머니 두 분이 더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이제 44로 바뀌어버린 이 숫자는 언제 다시 43으로, 42로 바뀔지 모른다. 이 숫자는 일제가 숨기고 태워버린 기록이나 증거 같은 죽은 역사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와 함께 숨 쉬고 있는 살아있는 역사의 숫자이기 때문이다. ‘위안부 피해자’로 뭉뚱그려진 추상명사가 아니라, 한 분 한 분 각기 다른 모습으로 파괴된 할머니들의 영혼 하나 하나를 가리키는 숫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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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로만 기억돼 있던 할머니들의 삶을 생생한 이미지로 보여줌으로써 영화 '귀향'이 우리에게 말한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여전히 대명사 뒤에 숨겨져 있는 분들에게 각자의 이름을 찾아 드리는 일이라고. 그것만이 그분들의 영혼이라도 고향으로 모실 수 있는 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