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의 본고장 유럽음악계에서는 윤이상을 '동양의 사상과 음악 기법을 서양음악 어법과 결합시켜 완벽하게 표현한 최초의 작곡가'로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독일 출신 '클라리넷 여제' 자비네 마이어는 '윤이상의 음악은 모차르트의 음악처럼 50년, 100년 후에도 연주될 것'이라며 윤이상을 위대한 현대 작곡가로 칭송했습니다.
유럽의 평론가들은 윤이상을 '20세기 중요 작곡가 56인', '유럽에 현존하는 5대 작곡가'로 선정했습니다. 그는 또 독일 자아브뤼겐 방송이 선정한 '20세기 가장 중요한 작곡가 30인의 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세계적인 우리나라 작곡가인 윤이상, 하지만 정작 우리나라에선 그의 이름이 너무나 생소합니다.
■ 윤이상, 그는 누구인가?
바다가 들려주는 물새 소리, 뱃고동 소리, 찰싹찰싹 파도 소리.
지난 1917년,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윤이상은 어린 시절 통영의 소리를 음악처럼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는 어릴 적 학교 음악실에 놓여 있던 풍금을 처음 접하고 음악에 큰 호기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남사당패나 판소리 명창의 공연에도 열광하던 그였습니다.
이후 윤이상은 14살부터 독학으로 작곡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라던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출까지 하며 음악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습니다.
윤이상은 졸업하면서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과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을 발표했는데 음악계의 굉장한 호평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는 유럽 각지에서 활동하다가 1964년 독일 포드기금회의 요청으로 베를린에 정착했습니다. 윤이상은 1970년 킬 문화상과 1987년 독일연방공화국에서 대공로 훈장까지 수여 받았습니다.
■ 전통음악? 현대음악? 동서양 아우르는 '천재'
윤이상은 스스로 서양음악이 '펜글씨'라면 동양음악은 '붓글씨'라고 비유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음악은 마치 '오선지에 펜으로 붓글씨를 쓴 듯한 느낌'입니다. 그러니까 서구음악의 온갖 전위적 기법들이 쓰였는데도 총체적으로는 전형적인 동양 음악으로 들린다는 것입니다.
윤이상은 중심이 되는 주요 음들에 글리산도(높낮이가 다른 두 음을 미끄러지듯 연주하는 방법)나 장식음(어느 가락의 음을 꾸미기 위해서 붙인 음), 트릴(2도 차이 나는 음 사이를 빠르게 전환하는 꾸밈음) 등 다양한 장식적 기법을 사용합니다.
실제로 그는 이를 한국의 전통음악 기법을 서양음악에 옮겨온 기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예를 들어 가야금이나 거문고처럼 국악기의 줄을 짚고 흔들어 음색에 미묘한 변화를 주는 것을 '농현(弄絃)'이라고 하는데 이런 기법을 바이올린이나 첼로 등 현악기로 표현하는 겁니다.
또한 그는 스스로 자신의 음악을 서양인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도(道)나 음양오행 등 동양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해설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계적인 음악가를 왜 정작 우리나라 사람들은 잘 몰랐을까요?
■ '빨갱이 간첩'으로 몰린 천재 작곡가
윤이상의 어머니는 '상처 입은 용' 한 마리가 날고 있는 태몽을 꾸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상처 입은 용'은 윤이상의 일생을 상징하는 인생의 복선이 됩니다.
윤이상은 1963년에 북한에서 조선국립교향악단의 콘트라베이스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옛 친구를 만나기 위해 북한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1967년 박정희 정권은 그의 방북을 '동백림(동베를린) 간첩 사건'에 연루시키는 빌미로 만들었습니다. 친구를 만나러 방북을 했던 것이 간첩활동으로 둔갑해버린 것입니다.
이 사건은 나라 안팎의 거센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윤이상은 독일 정부와 세계 음악계의 요구로 2년 만에 석방됐습니다. 스트라빈스키, 카라얀 등 세계적인 작곡가와 지휘자 외에도 200여 명이 윤이상 석방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독일로 돌아간 윤이상은 한국 독재정권의 만행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광주항쟁을 기리는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를 발표하는 등 사회참여적 움직임을 이어간 그는 박정희 정권 일부 세력에게 주시 대상이 됐습니다.
이런 모습에 사람들은 윤이상을 최근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빗대 '원조 블랙리스트'라 부르기도 합니다.
■ '원조 블랙리스트'…20년이 지나도 여전한가
지난 2006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에서 '동백림 간첩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정치적 목적을 위해 과대 포장한 사건으로 규정됐지만, 상황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박근혜 정권이 '윤이상 평화재단'을 이른바 '문화계 블랙리스트' 명단에 올린 겁니다. 실제 윤이상평화재단은 지난 2013년도 지원을 마지막으로 지원이 끊긴 바 있습니다.
그의 이름을 건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도 지난해부터 국비 지원이 전격 중단돼 논란이 됐습니다.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는 한국 최초로 유네스코 산하의 국제음악콩쿠르세계연맹(WFIMC)에 가입된 국제음악콩쿠르입니다. 매년 발표되는 이 연맹의 콩쿠르 목록은 전 세계 수많은 음악가들이 주목하는 권위 있는 자리입니다.
하지만 문체부 국고 지원평가에서 수차례 1위를 차지하던 이 콩쿠르에 대한 지원이 갑자기 끊겼으니 당연히 논란이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문화계 블랙리스트' 논란이 크게 번지자 문체부는 지난 2월 이 콩쿠르에 대한 지원을 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군사독재와 낡은 정치적 이념은 너무나도 오랜 시간 동안 그를 물어뜯고 할퀴어 '상처 입은 용'으로 내몰았던 겁니다.
그가 왜 끝내 그리던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눈을 감아야 했는지는, 그가 세상을 떠난 지(1995년) 2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느낄 수 있을 정도입니다.
수십 년 동안 이루어진 이른바 '윤이상 지우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얼마 뒤 그의 고향 통영에서 그의 향취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는 31일부터 열리는 '통영국제음악제'에서 '아시아에서 세계로(From Asia to the World)'라는 주제로 윤이상을 집중 조명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떠난 지 2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이념 논란의 가려진 그이지만, 아직도 그를 추모하는 물결은 더욱 크게 일렁이고 있습니다.
(기획·구성: 김도균, 송희 / 디자인: 정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