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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11월 3일 용감했던 '그날을'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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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11월 3일.
그 날을 기억합니다.

1929년 11월 1일. 
전남 나주로 향하는 통학 열차는 그날도 북적북적했습니다. 
하지만, 한국인 학생들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습니다. 

기차 안에 크게 울린 대화와 웃음소리는 
일본 학생들의 것이었습니다. 

나라를 뺏긴 후 
일상이 된 풍경이었지만, 그날은 달랐습니다. 
일본 학생들이 기차에서 내리려는 
한국 여학생들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조롱하고 희롱했습니다. 

지켜보고 있던 한국 남학생들이 
용기를 내어 말리고 사과를 요구했지만, 
일본 남학생들은 비웃음으로 답했습니다. 

참지 못한 한 학생이 일본 학생들에게 달려들었고, 
싸움은 한국 학생들과 일본 학생들의 싸움으로 커졌습니다. 
일본 경찰은 일방적으로 한국 학생의 잘못으로 몰아가고 구타했습니다. 

그 날 이후 학생들 간 크고 작은 충돌은 계속됐고, 
편파적인 사건 수습에 분노한 학생들이 끝내 참지 못하고
이틀 뒤인 1929년 11월 3일, 떨쳐 일어났습니다. 
 ('광주학생운동(光州學生運動)')

학생들은 광주 시내에 모여 항의 시위를 벌였고, 
신사 참배를 마치고 돌아오던 일본인 학생들과 
큰 싸움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일제는 학생들의 시위가 점점 격렬해지자,
다음 날 광주시내 모든 중등학교에 휴교령을 내렸고, 
시위에 참여한 조선인 학생 수십 명을 구금했습니다. 

일제는 학생들의 시위 관련한 보도를 금지했고,
다른 지역으로 확산을 막으려 했지만, 
학생들의 용감한 저항은 소문을 타고 퍼졌고,
다른 지역의 학생들도 시위에 동참했습니다 . 

1929년 11월 3일에 
광주에서 시작된 광주학생운동은
다음해까지 전국에서 5천명이 넘는
학생들의 반일 투쟁으로 커졌습니다. 

가슴이 뜨거웠던 10대들이 분노로 뭉쳤던 시위였던 만큼
학생들의 투쟁은 조직적이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일제의 집요한 진압 작전에 물러서야 했습니다. 
그러나, 학생들의 결기는 어른들의 투쟁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광주에서 시작돼 전국적으로 번진 ‘학생들의 독립운동’.
이들의 숭고한 독립 투쟁 의식을 기리고자
매년 11월 3일은 학생독립운동의 날로 제정됐습니다. 

어느 덧
11월 11일이 대표 기념일이 돼 버린 11월.
오래 전 울분에 가득찼던 11월 3일도
가슴 한 켠에 기억해 두어야 할 기념일이 아닐까 합니다. 


(SBS 스브스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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