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기에 터키에선 목과 머리카락을 가리는 히잡 쓴 여성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슬람에서 금기시하는 술도 어디서든 팔고 또 자유롭게 마십니다. 터키만의 맥주와 와인도 가짓수가 여러가지입니다. 국민이 믿는 종교와 나라를 지탱하는 정치이념이 철저히 분리된 나랍니다.
터키 쿠데타 후속 취재를 위해 수도 앙카라에서 머문 이틀 째, 나름 부촌으로 통하는 찬가야 지역의 세멘렐 공원을 찾았습니다. 그 곳에선 세속주의 국가다운 풍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공원 잔디밭엔 연인끼리 친구끼리 터키의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선선해진 해질녘 공기를 쐬고 있었습니다. 맥주와 위스키, 칵테일을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풍경은 전날 밤 도심 광장에서 요란하게 벌어진 집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 "강한 지도자가 아닌 강한 시민이 필요한 민주주의"
이 곳에선 전날 집회에서 들은 것과는 많이 다른 의견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매일 밤마다 도심에서 벌어지는 집회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쿠데타를 진압한 건 다행이고 안도할 일이지만, 누군가 안타까운 생명이 사라지고 희생됐는데 무엇이 좋다고 누구를 위해서 월드컵 우승이라도 한 듯 밤마다 축제를 벌이는 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겁니다.
한 젊은이는 쿠데타 당일 위험을 무릅쓰고 거리에 나선 이유를 “민주주의를 위해서이지 어느 한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다”라고 자신 있게 밝힙니다. 그러면서, 쿠데타에 반대한 터키 국민의 열정을 자신을 지지하는 뜻으로 곡해하고, 또 이를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는 에르도안을 간접적으로 비난했습니다.
또 다른 대학생은 쿠데타 이후 터키에 몰아치는 숙청 광풍에 대해서도 정부의 주장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터키 정부는 이슬람 사상가인 귈렌이 쿠데타의 배후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대학생은 쿠데타 주동자들이 귈렌의 사상에 영향을 받거나 그 추종자일 수는 있을 수 있어도 귈렌이 쿠데타를 뒤에서 조종하고 계획했다고는 믿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로 쿠데타 연루혐의로 숙청된 판사 가운데는 에르도안 편도 귈렌 편도 아닌 중립성향 인사가 적지 않다는 거죠. 그러면서, 에르도안이 이 기회에 자신의 반대파를 쿠데타에 엮어서 깨끗이 정리해버리려는 게 아니냐고 의심했습니다. 정치란 게 ‘정+반 = 합’에 따라 움직이는 건데 ‘반’이 사라진 정치는 그야말로 ‘독재’가 돼버릴 거라며 터키 민주주의의 변질을 우려했습니다.
공원에서 만난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터키 공화국의 근본 가치를 중요시 했습니다. 터키는 누가 뭐래도 무스타파 케말이 세운 ‘세속주의’ 국가라는 겁니다. 헌법에 명시된 가치를 누구도 변질시킬 수도 훼손할 수 없다고 믿습니다. 그러기에, 에르도안이 주장하는 ‘대통령 중심제’로 개헌에 반대합니다.
“터키가 강해지려면 한 명의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한 게 아니라 강한 시민이 필요합니다. 그게 바로 민주주의 입니다.” 한 젊은이가 던진 이 말은 터키가 왜 이렇게 혼란을 겪고 있고 또 터키가 나아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최악의 민주주의가 최선의 쿠데타보다는 낫다’는 생각에 터키인들은 거리에 나섰습니다. 그게 바로 성공한 이슬람 민주주의 국가, 터키의 힘입니다. 그 힘은 바로 ‘시민’ 입니다.
● 어설픈 쿠데타, 준비된 숙청
터키에서는 쿠데타가 이전에도 4번이나 일어났습니다. 무스타파 케말은 군부의 지지를 바탕으로 터키 공화국을 건국했습니다. 때문에 군부는 세속주의를 지탱하는 힘이었습니다. 정권이 이슬람주의로 흐를 때마다 군부는 쿠데타를 일으켜 이슬람 정권을 축출했습니다. 에르도안도 이슬람주의 정치갑니다. 여기에 권위주의가 첨가됐죠. 그동안 관례를 보면 쿠데타가 일어날만한 조건입니다. 그런데 이번 쿠데타는 왜 실패했을까요?
이전의 쿠데타는 육.해.공군이 합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쿠데타가 있기 전에 국민에게 예고까지 했습니다. 국민적 지지를 확보한 뒤 쿠데타를 실행에 옮겼습니다. 1997년엔 군부의 쿠데타 경고가 있자 이슬람주의자 총리가 자신 사퇴하면서 유혈사태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쿠데타가 예고 없이 군부의 일부 세력에 의해 거행되면서 가장 필요한 국민적 지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에르도안이 이미 군부를 어떻게 장악했는지에 대해선 이전에 자세히 설명한 바 있습니다. 이렇게 에르도안이 군부를 사실상 장악한 상태에서 쿠데타 세력은 너무 미약했습니다. 러시아의 정보, 가담자의 밀고로 에르도안이 쿠데타 시도를 사전에 파악한 점도 실패의 원인 중 하나겠지요.
쿠데타가 하룻밤 만에 진압됐다고는 하지만, 어디서 다시 유혈충돌이 벌어질 지 모르는 상황인데 터키는 너무 차분했습니다. 도심에선 탱크나 무장군인의 경계태세를 전혀 볼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쿠데타를 진압했다고 해도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모르는데 군대가 진압 당일 도시를 싹 비울수 있을까요? 국민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경계태세를 어느 정도로 유지하고 있어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요?
이 점을 두고 터키 정부가 쿠데타 시도를 불과 몇 시간에 안 게 아니라는 의혹을 낳고 있습니다. 이미 쿠데타 모의를 일찌감치 파악해 놓고, 이 기회에 반대파를 뿌리 뽑겠다는 생각에 모른 척 했다는 겁니다. 속는 척 하며 속였다는 겁니다.
쿠데타 진압 당일부터 이틀 사이 쿠데타 연루혐의로 5만 명 넘는 인사를 체포 구금 해고한 점만 봐도 그렇습니다. 어떻게 짧은 시간에 쿠데타 연루자를 척척 알아내고 다 솎아낼까요? 쿠데타 경위 조사만 해도 며칠은 족히 걸릴 텐데 말이죠.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부터 숙청 대상을 다 골라냈다는 것 밖에는 설명이 안 됩니다.
더구나, 쿠데타와 직접 관련이 없는 교육계와 언론, 외교계에도 대규모 숙청작업이 이뤄졌습니다. 귈렌이 이슬람주의 교육 사업을 오랫동안 벌여왔다는 점에서 이 모든 숙청작업이 자신의 정적인 귈렌을 겨냥했다고 밖에 설명이 안 됩니다. 쿠데타 세력 처벌은 표면적인 이유일 뿐 이미 제거 리스트를 다 뽑아놓고 일이 터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반대파 제거 나선 거죠.
● 술탄이 되고 싶은 에르도안
앙카라의 한 공원에서 만난 젊은이들에게 “해외에선 너희 대통령을 21세기의 술탄이라고 부른다”라고 했더니 “도대체 무슨 말이냐? 공화국에 무슨 이슬람 제국의 통치자 이야기를 하냐?”고 되묻더군요. 자신들은 에르도안을 술탄이라고 부르는 건 상상도 못 해봤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군요.
하지만, 지금 돌아가는 터키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에르도안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면서 짧게는 3개월, 길게는 6개월간 ‘왕’과 다름없는 지위를 확보했습니다. 법과 다름없는 ‘칙령’선포 권리를 가졌습니다. 군에서 국가를 혼란으로 몰고 가는 일이 다시 벌어지는 일이 없도록 군과 정보부를 대통령 통제아래 놓도록 헌법을 손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말은 ‘대통령 중심제’로 개헌을 하겠다는 겁니다.
에르도안은 당규상 총리를 4번 연임 못 하니 대통령으로 직함을 갈아탄 인물입니다. 원래 터키 대통령은 7년 단임제였는데 이걸 총리시절에 개헌을 해서( 터키에서 국회의원 5분의 3 이상 찬성하면 국민투표 없이도 개헌이 가능합니다.) 5년 중임제로 바꿨습니다. 대통령 급여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인상해놨습니다. (지금 에르도안의 연봉은 640억원이 넘습니다.)
권력 유지를 위한 작업을 오래 전부터 준비한 겁니다. 아마 지금 막강한 권력을 바탕으로 대통령 중심제로 개헌을 한 뒤엔 중임제를 또 손보려고 할 지도 모릅니다. 때마침 하룻밤 쿠데타가 일어나서 정적도 죄다 쓸어버렸고, 국가비상사태를 빌미로 최강의 권력도 손에 쥐었습니다. 일련의 과정이 짜맞춘 듯 톱니바퀴처럼 맞아 떨어지고 있습니다.
● 양다리 외교, ‘계륵’같은 터키
독재를 강화하고 정적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에르도안의 행태를 유럽은 못 마땅해합니다. 쿠데타 이전부터 반테러법이며 대통령 모욕죄를 빌미로 벌인 에르도안의 횡포에 대해 못 마땅해오던 유럽은 쿠데타 이후 벌어지는 상황을 거론하면서 터키가 유럽연합 EU에 가입할 자격이 안된다고 대놓고 말합니다.
오스트리아는 아예 ‘가입 기준이 미달되는 나라’, ‘나치처럼 정치공작을 벌인다’라며 터키에 직격탄을 날리고 있습니다. 터키는 이런 오스트리아를 ‘인종차별의 원조국가’라고 쏘아붙이며 신경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에르도안이 쿠데타 세력을 자신이 왜 공짜로 밥을 먹여줘야 하나며 사형제를 부활하겠다고 하자, 유럽연합은 사형제를 부활하는 동시에 터키와 EU 가입 협상은 끝이라고 맞서고 있습니다. 터키는 우리가 사형제까지 폐지하면서 수십 년 째 EU 가입을 원하고 있지만 유럽이 해준 게 뭐냐고 따집니다.
유럽과 터키의 갈등은 갈수록 고조되는 양상입니다. 에르도안은 원래 터키 경제 발전을 발판으로 국민적 인기를 끌면서 장기집권을 이어온 인물입니다. 그러기에 최근 추락하는 터키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유럽연합 가입에 무진장 공을 들여왔습니다. 그런 에르도안이 쿠데타 이후에 유럽에게 ‘너 없어도 괜찮아’ 식으로 배짱을 부리고 있습니다.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습니다. 하나는 러시아입니다. 러시아와 터키는 지난해 11월 전투기 격추사건으로 ‘원수지간’이 됐죠. 터키가 러시아 전폭기가 자기 영공을 침범했다고 격추 시켜버린 사건입니다. 러시아 푸틴은 곧바로 터키에 엄청난 경제 제재에 들어갔습니다. 교역도 중단하고 자국 관광객의 터키 여행도 금지하고 터키 근로자에 대한 비자 발급도 중단했습니다. 터키 경제가 입은 타격은 어마어마했습니다.
그런 두 나라가 쿠데타로 가까워졌습니다. 러시아 정보당국이 쿠데타 시도를 사전에 파악해서 터키에 알려줬습니다. 터키는 유럽과 미국이 보라는 듯 이번 쿠데타 사태와 관련해 러시아를 가장 고마운 나라라고 치켜세웠습니다. 에르도안과 푸틴은 8월 9일 정상회담을 가집니다. 아마도 관계회복이 가장 큰 의제가 될 겁니다. 터키로선 에르도안을 대놓고 비난하는 유럽대신 러시아를 새로운 우방으로 삼겠다는 겁니다.
또 다른 이유는 ‘난민 송환 협약’입니다. 유럽은 쏟아지는 난민을 감당하지 못한 채 결국 발칸국가와의 국경을 닫아버렸습니다. 그리고는 터키에서 넘어온 난민을 다시 터키로 돌려보내는 협약을 체결했습니다. 대신 뭉칫돈도 터키에 얹어주고, 터키인에 대한 유럽입국 비자를 면제해주고,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을 긍정적으로 추진하는 사탕을 제시했습니다.
난민 문제를 터키에 ‘퉁’치는 식으로 혹을 떼려는 유럽으로선 터키와 미워도 버릴 수 없는 ‘애증의 관계’를 유지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걸 터키는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유럽으로선 터키라는 방패가 필요하다는 걸… 오죽하면 유럽평의회 의장이 터키를 직접 찾아가 “쿠데타 이후 터키가 직면한 문제에 대해 유럽의 이해가 부족했다’”라고 달래기에 나섰을까요?
● ‘성공한 이슬람 민주주의’ 터키의 미래는?
에르도안의 권력이 한층 견고해질 거라는 것은 누구나 압니다. 대통령 중심제 개헌도 별 무리 없이 국민투표에 부칠 겁니다. 대통령 중심제로 전환에 대해 여론의 반발이 적지 않겠지만 저소득층과 지방을 중심으로 확고한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는 에르도안의 뜻대로 결과가 나올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입니다.
터키인의 기본권은 뒷걸음질 칠 겁니다. 이미 130여개의 언론사가 문을 닫거나 정부 관리로 들어갔습니다. 쿠데타 이전에 이미 대통령 모욕죄로 2천 명을 기소한 에르도안입니다. 반대파라는 생각이 들면 더 무자비한 숙청의 칼을 들이댈 겁니다.
국민의 기본권인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것 뿐 아니라 종교적 규제도 하고 있습니다. 에르도안은 이슬람주의 정치갑니다. 이슬람근본주의 정치세력인 ‘무슬림형제단’과도 친밀합니다. 그는 이미 수백 개의 공립학교를 이슬람 성직자 양성학교로 바꿔버렸습니다.
이슬람색채가 사회 전반에 강해질수록 세속주의는 퇴색될 게 뻔합니다. ‘이슬람주의 = 보수.제약.차별, 세속주의 = 자유.권리’ 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슬람 근본주의가 깊게 스며든 나라일수록 정치적.사회적 자유는 적지 않게 제약을 받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왕정국가가 아니면서 이슬람주의를 국가통치의 근간을 삼는 나라는 아주 적습니다. 그리고 독재.왕정.신정일치 국가를 뺀 이슬람주의 국가는 모두 정치.사회.경제적 불안을 겪고 있습니다.
에르도안은 사실상 ‘왕’이 되길 바랍니다. 이슬람주의가 강한 지도잡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터키는 유일하게 ‘성공한 이슬람식 민주주의 국가’로 상징됩니다. 100년 가까이 이어져온 세속주의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지금 에르도안 정권이 추구하는 방향과 터키 정국이 흘러가는 모양새를 볼 때는 성공한 이슬람 민주주의가 퇴색될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