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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벤치마킹과 기술탈취, 그 오묘한 차이

박수진 기자

입력 : 2025.09.22 11:26|수정 : 2025.09.22 11:26

<기술탈취 분쟁, 그 후> 연속보도 취재후기①


지난 18일, 서울고등법원 별관 306호 법정 앞이 부산했다. 이곳은 행정소송 재판이 열리는 곳으로, 쉽게 말하면 정부의 행정처분에 이의를 제기하는 개인, 기업들이 제기한 소송을 재판하는 곳이다. 이름만 들으면 아는 대기업은 물론 일반 개인까지 억울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다양했다.

하청업체의 도면을 무단 이용해 제품을 만들고, 이 사실을 신고했다는 이유로 거래 단절 등 보복 행위를 한 혐의로 공정위로부터 역대 최대 과징금(기술유용 관련 처분 중)을 부과받은 국내 1위 선박 장비 업체 하이에어코리아의 법률 대리인들도 이날 모습을 드러냈다. 국내 대형 로펌 중 한 곳인데, 이들은 판사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원고(하이에어코리아)의 기술과 노하우를 반영해서 제품을 개발한 것입니다. 두 회사의 제품은 다릅니다."

이들은 또 하청업체의 대표를 행정소송 재판의 증인으로 채택해 달라고 판사에게 거듭 요청했다. 공정위의 처분 취소를 위해 싸우는 자리인데, 기술 탈취 분쟁 중인 상대측 하청업체 대표자를 증인으로 불러달라는 요구가 기자는 다소 의아했다. 변호인의 재판 중 발언을 근거로 보면, 이들은 하청업체 측을 증인으로 불러 해당 기술이 정말 영업비밀로 관리가 되었는지, 정말로 보복을 당했는지 등을 묻겠다는 취지였다. 판사는 그 요청의 불필요성을 설명했다. 변호인의 요청이 계속되자 판사는 목소리를 조금 높여 "불채택"이라고 말했다.

선박용 공조기 만드는 업체

역대 최대 과징금 사건…공정위 시정명령이 중단된 이유


SBS 탐사기획팀이 <기술탈취 분쟁, 그 후> 기획을 연속보도 하면서, 하이에어코리아와 하청업체 바람인텍의 기술 분쟁 사례는 중요한 이정표가 됐다. 정부의 '유의미한 처분'이 내려진 사건도 이렇게 힘을 잃을 수 있다는 걸 확인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기획의 초점을 행정 처분, 또는 법원의 판결 이후의 상황에 맞추게 된 것도 하이에어코리아와 바람인텍의 분쟁 상황이 큰 영향을 미쳤다.

지난해 11월 8일, 공정거래위원회는 <기술유용을 신고하자 보복 조치까지, 하이에어코리아의 하도급법 위반행위 제재>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냈다. 기술유용 관련 사건 역대 최대 과징금을 부과하고 시정명령을 내렸으며, 회사와 대표이사를 검찰 고발했다는 내용이었다. 역대 최대 과징금 규모는 26억 4천만 원이었다.

대부분의 언론은 이 내용을 보도했다. 이 기사들을 본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기술탈취가 확인돼 가해 업체는 처벌을 받고, 피해 업체는 억울함을 풀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기자도 그렇게 생각했다. 기술탈취 자체를 인정받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보복조치까지 공정위가 확인해서 관련법을 적용해 처분하는 사례는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는 의외였다. 과징금을 제외한 나머지 처분은 현재 기준 '무용(無用)'했다.

하이에어코리아는 공정위 처분이 나온 후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면서 공정위가 과징금과 함께 내렸던 '시정명령'에 대해 집행정지 신청을 법원에 제기했다. 공정위가 내렸던 시정명령은 쉽게 말하면 ▲하청업체의 기술 자료 폐기 ▲보복 조치 금지 ▲처분 대상이 된 기술의 사용 및 판매 금지다. 하이에어코리아가 집행정지를 신청한 이유는 <시정명령을 따르면 앞으로 진행될 소송에 대응하기 위한 증거 확보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법원은 올해 초 이 집행정지 신청을 받아들였다. 대상은 '시정명령 전체'였다. 증거 대응 능력을 감안하면 '기술 자료 폐기'만 중단했을 법도한데 재판부는 모든 시정명령에 대한 집행 정지 신청을 인용했다. 하청업체 바람인텍 관계자들은 취재진과 인터뷰에서 "하이에어코리아는 여전히 해당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고 하소연 했다.

하이에어코리아와 바람인텍은 하도급 계약을 맺은 원청과 하청의 관계였다. 분쟁 대상이 된 기술은 '웨더 타이트 댐퍼'라는 것으로, 대형 선박이 바다에 나갈 때 공조기를 통해 바람은 들어오고 나가지만 빗물이나 바닷물은 들어오지 않도록 하는 기술이 적용된 제품이다. 하이에어코리아는 이 제품을 바람인텍으로부터 납품 받다가 자체 개발하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바람인텍의 도면 등이 사용됐다는 게 공정위의 조사 결과다. 실제 공정위 조사를 통해 "원가 절감을 위해 해당 제품을 벤치마킹 한다"는 하이에어코리아의 내부 기안문이 확인됐고, 하이에어코리아가 자체 개발하는 과정에서 '바람인텍의 제품을 참고했다'는 내부 직원의 진술도 있었다. 정확히는 "참고는 했지만 베끼진 않았다"였다.

박수진_취재파일

"벤치마킹은 할 수 있는 거 아닌가"라는 주장에 대해


하이에어코리아는 취재 요청을 여러 차례 거절했다. 전화는 끊었고 이메일에는 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경남 김해에 있는 본사를 찾아갔다. 담당자를 직접 만날 순 없었다. 이후 통화가 된 회사 측 관계자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벤치마킹이라는 건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좀 더 개선시켜 보겠다, 발전시켜 보겠다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저희는 저희 나름대로 노하우를 넣었는데 그걸 기술유용이라고 하는 거죠"

익숙한 항변이다. 행정소송 재판에서 하이에어코리아 법률대리인은 <기술과 노하우를 반영해서 개발했지만 다른 제품이다>라고 말했다. 공정위 조사 당시 내부 직원도 <개발 과정에 참고는 했지만 베끼진 않았다>고 진술했다. 기술 탈취 의혹은 부정하면서도 하청업체의 도면이나 기술을 '참고했음'은 인정하고 있는 건데, 결론부터 말하면 굉장히 '법리적'인 항변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기술탈취와 관련해 적용되는 법은 부정경쟁방지법, 상생협력법, 하도급법 등이다. 이런 법들이 설계해 놓은 '기술탈취'의 피해를 호소할 수 있는 '기술의 기준'이 있다. ▲공개되지 않은 기술(비공지성) ▲비밀관리가 되고 있는 기술(비밀관리성) ▲경제적 가치를 갖고 있는 기술(경제적 유용성)이다. 이 세 가지를 '모두 충족' 해야 한다.

<공개되지 않은 기술>에 해당하려면 현재 법 기준으로는 '어디에도 알려지지 않은 기술'이어야 한다. 때로는 특허가 발목을 잡기도 한다. 특허를 내면 '소유권'은 주장할 수 있어도 참고할 수 있는 '공개된 기술'에 해당 된다. 대부분의 기술탈취는 A를 똑같이 A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A를 참고해 좀 더 나은 B, C를 만드는 식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기술 탈취 분쟁에서 가해 기업들은 '참고는 했지만 동일한 제품은 아니다' 또는 '해외에도 이런 기술이 있다' '누구나 만들 수 있는 기술이다'라는 식의 주장을 한다. 하이에어코리아 관계자도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비슷한 말을 했었다.
 
"이게 대단한 기술인 것처럼 공정위도 받아들이고 있는데, 저희도 댐퍼 사업을 예전부터 했었단 말이에요. 그때 당시에는 저희가 일손이 안 되니까 바람인텍에게 수주를 준 거고, 저희도 계속 연구 개발을 계속하고 있는 상태인데, 거기(댐퍼)에 이제 '웨더'라는 걸 붙인 거 아닙니까? 누구나 머릿속에 이런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비밀관리가 되고 있는 기술>에 해당하려면, 단순하게는 영업 비밀에 해당하는 자료는 '비밀' '대외비'라고 표시해야 하고, 접근 권한이나 방법을 제한해야 한다. 하도급 등 거래 관계에서 이런 영업비밀을 제공할 땐 비밀유지계약(NDA)을 맺고 상대에게도 비밀 준수의 의무를 부과해야 한다.

하청업체가 원청을 상대로 자신들의 기술에 대해 '비밀관리'를 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갑'인 원청에게 '우리 기술 영업비밀이니까 함부로 쓰지 마'라고 말할 수 있는 하청업체가 얼마나 될까. 그래서 '하도급법'에선 NDA 체결 등 영업비밀 보호의 책임을 원청에게 부여하고 있다. 원청이 중소 하도급업체에게 기술자료를 제공받을 경우 반드시 NDA를 체결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하이에어코리아와 바람인텍은 이 비밀유지계약을 체결하지 않았다. 원청인 하이에어코리아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일이지만 현실에선 하청업체 바람인텍의 발목을 잡았다. 경찰 수사에서 이 사건은 무혐의로 결론 나고 불송치 됐는데, 경찰이 그 근거로 든 것이 '영업비밀 보호를 위한 계약을 하지 않았다'였다. 원청에게 제재를 가해야 할 일이 하청업체의 '귀책'이 된 셈이다.

선박용 공조기 만드는 업체

기술탈취를 판단하는 공정한 기준인가, 기울어진 운동장인가


이번 연속 기획 취재를 하면서, 중소기업과 기술탈취 분쟁 중인 한 대기업 관계자는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기술탈취는 법으로 인정을 받아야 기술탈취 아닌가요? 그 전까지는 일방적인 주장이잖아요?" 틀림없는 말이다. 기업 간에 발생하는 기술탈취 문제는 분쟁이 불거지지 않으면 모를까 불거진 이후엔 대부분 법정으로 간다. 기술을 빼앗겼다고 주장하는 이도, 그런 일이 없다고 반발하는 이도 각자의 억울함을 법이 해결해 주길 바란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법은 기술탈취를 정의하고 판단하는 공정한 기준이 되고 있을까? 법은 입증 가능한 범위 안에서만 판단을 내린다. 아무리 억울하다고 해도 자신의 억울함을 법에 근거해 증명할 방법이 없으면 그 억울함은 실체가 없다. 기술탈취 분쟁을 겪고 있는 많은 중소, 벤처기업들이 마주하는 가장 넘기 어려운 벽도 이 '법적 증명', '입증 책임'이다.

벤처기업협회에는 기술탈취 피해를 비롯해 이런 불공정 거래를 신고하는 센터가 마련 돼있다. 하지만 협회 관계자는 실제 이 센터에 신고를 해오는 피해 기업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지난한 법적 소송을 버틸 힘이 부족하고, 결국 몇 년의 시간을 들여 이긴다 하더라도 결국은 '지는 게임'이 된다는 인식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과연 지금의 법은 기술탈취를 정의하고 판단해주는 공정한 기준이 되고 있을까 아니면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들고 있을까. SBS 탐사기획팀은 이어지는 취재파일을 통해 방송으로 다 보도하지 못한 기술탈취 분쟁 사례들을 근거로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짚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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