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대 한반도연구소 '임시정부 사료' ②
"1919년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처음부터 외교적 노력으로 독립을 쟁취하려 하였고, 그 과정에서 이승만의 국제연맹 위임 통치 청원이 알려져 국민대표회의(1923년)가 열렸다. 임정 개조, 임정 폐지까지 논의되면서 많은 단체와 사람이 임정을 떠났고, 임정은 작은 독립운동 단체로 전락하여 명맥만 유지하였다. 1932년의 이봉창, 윤봉길 의거 이후 중국 국민당 정부의 원조로 경제적 어려움이 나아졌을 뿐이었다. 중일전쟁 후 충칭에 정착하며 5인의 집단 지도 체제가 아닌 주석제(김구)로 전환,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조소앙·지청천 등과 연합하여 한국독립당을 창설하였다. 이후 민족혁명당의 김규식, 김원봉의 세력이 1942년에 통합, 임시정부의 세력도 확대되었다.
오철성과의 대화의 요지는 그 이후 김구의 한국독립당과 김원봉의 민족혁명당 간의 통합이 처음 논의된 것처럼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완전한 통합을 위해 김원봉이 오철성에게 도움을 요청한 내용이다. 윤봉길 의거에 대한 약산의 발언이 의거를 폄하하는 듯하나, 이는 의열단을 통해 몇몇의 희생으로 일제가 무너지지 않음을 깨달았기에 윤봉길과 같은 공격으로는 일본이 붕괴되지 않을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한국독립당의 무능함과 통합 당시 거론되었던 여러 사실들에 대한 언급은 결국 민족혁명당의 입장에서 통일전선이라는 민족적 대화합을 위해 양보에 양보를 거듭하여 수용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김구와 한국독립당이 통합 의지를 보이지 않아(활동 자금도 민족혁명당에는 분배되지 않아 50만 위안을 빌림) 중국 국민당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약산의 뜻이 대화록의 요지이다. 내부적으로도 한국독립당을 탈당하고, 아나키스트와 공산주의 정당 등이 민족혁명당으로 통합되고 있어 한국독립당은 그 지도적 위치를 잃었다는 게 약산의 견해이다.
오철성 문건의 요지는 '약산은 여전히 한국독립당과 통합할 의사가 있고, 한국독립당과 민족혁명당 사이에서 중국 국민당이 올바른 판단과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자금을 운용할 때 실상을 잘 분별하고 중앙정부의 대처 방안을 통일하여 활용해야 함을 국민당에 충고하고 있다. 이들의 대화 이후 임시정부는 주석-부주석제로 전환, 약산은 군무부장에 임명되어 한국광복군을 지휘하였다.
국민당은 많은 대원들을 팔로군으로 보낸 약산을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금 지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약산이 정치적 야망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민족 해방 운동을 위해 통합을 추진한다는 오철성의 판단이 중국 정부에 전해졌기 때문에 1944년의 정치 체제 개편이 이루어졌다. 이 대화록은 약산이 김구 또는 윤봉길 의거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조국 해방을 위해서는 몇몇의 희생이 아닌 통일되고 조직된 힘이 필요하다는 약산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민족 운동이 통합되지 않으면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기 어려워 많은 양보를 하면서까지 통합 정부를 구성하려는 약산의 의지가 더 돋보인다.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독립을 인정받으려는 약산의 노력이 처절할 정도로 느껴지는 대화록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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