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전설의 무림 고수' 황비홍이 즐겨 마셨던 그 술 [스프]

[술로 만나는 중국·중국인] 무술 영웅 황비홍의 고향술 '주좡쐉정' - 광둥 포산 (글 : 모종혁 중국문화평론가·재중 중국 전문 기고가)

모종혁 중국본색 썸네일
 

지피지기 백전불태! 친중(親中), 반중(反中)을 넘어 극중(克中)을 위한 지식충전소! 진짜 중국을 만나러 갑니다!
 

《취권》과 《황비홍》에서 황비홍이 즐겨 마신 주좡쐉정의 술박물관
오랜 중국사에서 명멸했던 인물들 중 중화권 영화와 드라마에서 주인공으로 가장 많이 등장한 이는 무술 고수 황비홍(黃飛鴻)이다. 황비홍은 우리에게 친숙하다. 1991년에 홍콩의 쉬커(徐克) 감독이 제작하고 대륙 출신 리롄제(李連杰)가 주연한 영화가 공전의 히트를 했기 때문이다. 쉬커의 황비홍 시리즈는 6편까지 제작됐고, 다른 이가 제작한 후속작이 뒤를 이었다.

사실 황비홍 영화와 드라마는 100편이 훨씬 넘는다. 그 시초는 1948년 홍콩의 후펑(胡鵬) 감독이 제작한 영화 《황비홍: 편풍멸촉(鞭風滅燭)》이었다.

오랫동안 황비홍 역을 맡았던 배우 관더싱(오른쪽)
주연은 당대 홍콩 최고의 배우인 관더싱(關德興)이 맡았다. 관더싱은 본래 광둥(廣東)의 전통극인 월극(粵劇)의 배우였다. 따라서 정식으로 무술을 배우지 못했다. 다만 무예에 심취해 홀로 홍가권(洪家拳)을 연마했다. 홍가권은 황비홍이 집대성한 무술이다.

첫 황비홍 영화를 촬영할 때 관더싱의 나이는 이미 40대 초반이었다. 그러나 홍가권을 꾸준히 연마해 무극강유권(無極剛柔拳)도 창시할 정도였다. 그 뒤 관더싱은 1950~70년대에 홍콩에서 제작된 80여 편의 황비홍 영화와 드라마의 주연을 대부분 꿰찼다.

《취권》에서 황비홍 역을 맡아 열연했던 청룽. 출처: 바이두
그로 인해 홍콩 주민들은 관더싱을 '황사부'라고 부르며 존경했다. 관더싱이 고희를 넘어 더 이상 배역을 맡기 어려워지자, 홍콩 영화계는 새 주인공을 찾아 나섰다.

그 와중에 1978년 황비홍을 새롭게 해석하고 코믹성을 강화한 영화 《취권(醉拳)》이 제작됐다. 《취권》은 흥행에 크게 성공했고, 주연인 청룽(成龍)은 아시아의 스타로 발돋움했다.

하지만 일부 홍콩 언론은 영웅인 황비홍을 너무 가볍게 묘사하고 왜곡시켰다며 맹렬히 비판했다. 그 영향으로 1980년대에는 황비홍 영화가 가뭄에 콩 나듯 제작됐다.

의사로도 활동했던 황비홍의 모습을 그린 1991년작 《황비홍》
한동안 침체에 빠졌던 황비홍 영화 붐을 다시 불러일으킨 것이 리롄제가 주연한 작품이었다. 그렇다면 실제 황비홍의 삶은 어땠을까?

황비홍은 1856년 당시 행정구역으로 난하이(南海)현 포산(佛山)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황기영은 19세기 광둥에서 활약하던 고수 10명(廣東十虎) 중 한 명으로 명성이 높았다.

황기영은 유소년기에 무술을 익혔고 청소년기에 수련 여행을 다니다가, 한 장군의 눈에 들어 포산 주둔군의 교관이 됐다. 틈틈이 익힌 약초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약방을 열어 안정된 생활을 누렸다.

황비홍기념관은 황비홍이 운영하던 무관과 보지림을 고증해서 복원했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황비홍은 3살 때부터 무예를 익혔다. 천성적으로 기골이 장대한 데다 총명해서, 13살에 아버지와 함께 군졸을 가르칠 정도로 장족의 발전을 거듭했다.

황비홍은 가전무술인 빠른 발차기를 구사하는 '그림자가 없는 다리(無影腳)' 기술의 달인이었다. 여기에 광둥십호의 절기를 전수받았다. 즉, 양곤으로부터 철선권(鐵線拳)을, 소걸아로부터는 취팔선권(醉八仙拳)을 배웠다. 또한 송휘당의 무영각 기술을 배워 홍가권을 집대성했다. 17살 때에는 광저우(廣州)에 무관을 열고 제자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황비홍기념관에 50대의 황비홍 모습으로 만든 황비홍 동상

황비홍은 광저우에서 차츰 지명도를 쌓으면서 정착했다. 그리하여 지금의 해군사관학교 격인 수사(水師)가 황비홍을 무술 교관으로 초빙했다. 1885년에는 해군 제독이 직접 요청해서 광둥 해군의 교관이 되었기에, 운영하던 무관은 문을 닫았다. 하지만 이듬해 아버지와 해군 제독이 잇달아 죽자 관직을 사직했다.

그 뒤에 개업했던 병원이 보지림(寶芝林)이다. 보지림은 황비홍 관련 영화나 드라마에서 줄곧 등장하는 무대다. 1888년 황비홍은 유영복 장군을 고쳐준 인연으로 흑기군(黑旗軍)의 교관 겸 의관이 됐다.

기념관 안 연무청(演武廳) 마당에서 수련 중인 황비홍의 후예들
유영복은 황의 무예와 의술에 감탄해 '의예정통(醫藝精通)'이라고 쓴 편액을 선물로 주었다. 1894년에 황비홍은 흑기군과 함께 대만에 가서 일본군과 싸웠다.

귀국해서는 주로 보지림에 머물면서 가난한 병자들을 치료했다. 1911년에는 민간인 자위부대의 교관으로 일하기도 했으나, 말년에는 의술에만 전념하면서 1925년에 숨을 거두었다.

이런 삶을 살았던 황비홍은 왜 중국인의 영웅이 됐을까? 황비홍이 무술에서 위대한 업적을 세웠던 일대종사(一代宗師)였고, 인간적인 의사였다는 점에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포산의 황비홍기념관에서는 날마다 사자춤 공연이 열린다.
그러나 중국사에서 황비홍보다 뛰어난 무예가는 즐비하다. 또한 황비홍보다 큰 업적을 남긴 명의도 많다. 따라서 일부 중국 언론은 "홍콩이 같은 광둥 문화권 출신인 황비홍을 과대 포장했다"며 비판했다.

사실 무술영화는 전 세계인에게 어필할 수 있는 중국 영화의 장르다. 황비홍은 싸움을 잘하는 무술 고수이자, 인술을 펼쳐 만인을 돌본 협객의 삶을 살았다. 이는 고금을 뛰어넘어 중국인에게 강력히 어필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또한 황비홍이 살던 시절은 중국이 서구 열강에 의해 반식민지로 전락하던 시대였다.

황비홍기념관의 사자춤은 북사와 남사의 특징을 모아 접목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중국은 패배했고 이듬해 굴욕적인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했다. 일본군은 할양받은 대만에 진군했는데, 흑기군은 대만 민중들과 함께 저항했다. 황비홍은 그 항일의 최전선에서 활약한 투사였다. 이런 황비홍은 1997년 홍콩을, 1999년 마카오를 반환해 식민지 유산을 청산하려는 중국에 아주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게다가 황비홍은 전통연희인 사자춤의 고수였다. 사자춤은 사자가 악귀를 막아주고 길복을 가져다주기 바라며 추었다. 사자탈을 쓴 연기자는 북과 징의 반주에 맞추어 춤을 춘다.

하늘 높이 점프해서 다음 말뚝으로 건너가는 기술은 권법을 응용했다.
북방식인 북사(北獅)와 남방식인 남사(南獅)로 나뉘는데, 북사의 사자탈은 황금빛 털로 꾸미며 위엄을 강조한다. 남사는 눈과 입이 크게 하고 움직여 사자의 희로애락을 표현한다. 북사의 연기자는 바지까지 사자 차림으로 꾸미고, 남사는 평상복을 그대로 입는다. 포산은 남사의 발상지로, 춤사위와 권법을 결합해 호쾌하고 역동적인 사자춤을 추었다.

사자춤의 정수는 차이칭(采靑)이다. 차이칭은 사자춤을 추면서 높이 매달려 있는 물건을 따는 의식이다. 사자춤의 기본동작과 응용기술을 선보이며 빨리 따야 한다.

주좡쐉정은 증류하기 전에 쌀을 2번 찌고 끓였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더 깊고 인사이트 넘치는 이야기는 스브스프리미엄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이 콘텐츠의 남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하단 버튼 클릭! | 스브스프리미엄 바로가기 버튼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Most Re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