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듀서 250을 아시나요. DJ이자 작곡가, 프로듀서인 250의 본명은 이호형. 자신을 '댄스 음악 만드는 250(이오공)'이라고 소개합니다. 처음엔 본명과 비슷한 '이오영'으로 불리기를 바라며 250이라는 이름을 썼는데, 모두가 '이오공'이라고 부르는 바람에, '이오공'이 되었습니다.
250은 올해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단연 돋보이는 주인공이었습니다. 그는 지난해 낸 앨범 '뽕'으로 올해의 음악인, 올해의 음반, 최우수 일렉트로닉 음반, 최우수 일렉트로닉 노래(뱅버스), 4관왕을 차지했습니다.
이뿐인가요, 250은 데뷔하자마자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 그룹 뉴진스 프로듀서이기도 합니다. 그는 뉴진스의 첫 앨범 'New Jeans' 메인 프로듀서였고 'Attention' 'Hype Boy' 'Ditto'를 작곡했습니다. 뉴진스는 올해의 신인, 최우수 K팝 음반(New Jeans), 최우수 K팝 노래(Attention) 부문을 수상하며 3관왕이 됐죠.
250은 개인 앨범에서, 또 프로듀서로 참여했던 뉴진스 앨범에서 모두 최고의 성과를 인정받은 셈입니다. '올해의 음악인'으로 뽑힌 게 너무나 당연한 결과인 거죠.
'뽕'은 250이 자신의 이름으로 처음 낸 앨범입니다. 간단한 소개를 위해 먼저 한국대중음악상 권석정 선정위원의 설명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일방적인 문화 폭격 속에서 우리가 잃지 않은 고유의 정서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뽕(또는 뽕끼)이다...뽕은 한국인을 관통하는 거대한 감성의 그 자체다. 트로트에도 발라드에도 댄스에도 심지어 신중현, 케이팝 아이들 음악에까지 서려 있는 뽕...수년 전부터 '뽕을 찾아서'라는 다큐를 제작하며 가요의 근원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했고, 그렇게 도달한 뽕의 결정체를 '뽕'에 담았다."
지금부터는 250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골라듣는뉴스룸 커튼콜에 출연해 나눈 이야기들입니다. 꽤 긴 대화를 나눴는데 요약 재구성하고, 중간중간 제 생각도 담았습니다.
'뽕'이란 무엇인가Q. 앨범 '뽕'을 오랜 시간 준비해서 냈다. 일단 '뽕'이 뭔가.
A. 앨범이 나온 다음부터는 '뽕'이 뭐냐? 하면 그냥 제 앨범 같다. 앨범을 만드는 과정 중에선 '뽕'이라는 한 글자로 떠올려지는 이미지가 여럿 있었다. 약간 슬픈 느낌도 있고, 글자 자체는 좀 웃기게 생겼다. 그래서 뭔가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쾌락을 만끽하는 심리)'를 자극한다고 해야 하나. 왠지 입에 올리면 안 될 것 같기도 하다. 매우 솔직한 단어이기도 하고, 뭔가 아는 사람들끼리만 몰래몰래 이야기해야 하는 단어 같기도 하고, 어떤 속내에 대한 뉘앙스도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한꺼번에 담을 수 있는 음악을 만들어보자는 게 앨범의 첫 번째 목표였다.
Q. '뽕'이라는 앨범을 내겠다고 생각했던 계기가 있나.
A. 회사에서 앨범 타이틀 '뽕'이 어떠냐고 했을 때 바로 꽂혔다. 오 멋있다! 왜냐하면, 뽕으로 앨범을 낼 수 있으면 무엇으로든 앨범을 낼 수 있는 사람이 될 것 같았으니까. 뽕짝 음악(트로트)은 누구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악'이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한편으로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라도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음악이다. 음악을 들으면 뭘 해야 되는지, 어떻게 춤을 춰야 되는지도 안다. 멋있는 춤을 출 수 있는 음악도 아니고 그냥 쿵짝 쿵짝인 건데.
Q. 막춤인가
A. 맞다. 막춤이야말로 진짜 춤이기도 하다. 형식이 없는 춤이기 때문에 그렇게 솔직한 부분, 뭔가 생각을 깊게 하기 이전에 본질적으로 쑥~ 질러 들어오는 느낌. 그런 느낌들을 좇는 과정이었다.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음악이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멋있는 음악을 찾아 들으려는 태도를 버리는 게 일단 중요했던 것 같다. 그러는 데 2~3년 정도 시간이 걸렸다. 왜냐하면, 나도 멋있어지고 싶으니까. 멋있는 음악 하고 싶고, 멋있는 음악 하는 사람으로 불리고 싶으니까, 그걸 떨쳐내는 게 정말 어려웠다. 그래서 앨범을 제작한 2~3년 정도는 다른 음악을 다 끊고 그냥 계속 뽕짝 음악만 들었다.
처음엔 다 내가 알고 있는 음악이고 만들 수 있는 음악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만들려고 하니까 '그냥 뽕짝 음악'이었다. '그냥 뽕짝 음악'이면 내 이름 달고 나올 이유는 없는 거고, 굳이 2022년에 나올 이유도 없다. 그럼 '이 시대 나의 뽕짝 음악' 은 무엇일까? 일단 '이 시대'로 가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 거꾸로 지금 나오는 트렌디한 음악들을 듣지 않고 피해 다니는 시간이 더 길었다.
뽕! 멋있는 척 버리고 그냥 '뚜껑 따는' 순간Q. '뽕을 찾아서' 다큐에 그 과정이 나오는데 1화는 2017년에, 5화는 지난해 나왔다. 5년 동안 전국을 다니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고 여러 경험을 하지 않았나. 그래서 뭘 찾아낸 것인가.
A. '뽕'이란 단어에 여러 의미가 있지만, 우리가 뚜껑을 딸 때 소리가 '뽕' 하고 나지 않나. 춤추고 노는 곳에서 다들 뭔가 멋있는 척도 하고 폼도 잡고 서로 의식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냥 '뚜껑 따고' 에라 모르겠다, 그렇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 순간에 가장 가까운 음악이 뽕짝 음악 아닐까.
Q. 생각해 보니 나도 살면서 그런 순간들을 많이 봤던 거 같다. 어디 산에 갔는데 음악 틀어놓고 어르신들이 쿵짝쿵짝 춤추고 있는 장면이라든지.
A. 약수터 같은 곳에서도 음악을 틀면 다 춤을 춘다. 거꾸로 보면 그만큼 음악이 갖고 있는 힘이 굉장하다는 얘기다. 대단한 사운드 시스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조그만 스피커 하나 갖고도 사람들이 춤추게 만드는 거니까.
Q. 그럼 뽕짝은 춤을 추는 음악인 건가?
A. 그렇다. 사실 춤을 안 출 거면 틀 이유도 별로 없다. 나는 몇 년 동안 이 음악을 춤도 안 추면서 계속 틀어놓고 있었다.
Q. 계속 뽕짝만 듣다 보면 물리거나 힘들 때는 없었나.
A. 그냥 그렇게 해야 하니까 했다. 왜냐하면 음악이 충분히 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계속 '내가 이거 하는 사람은 아니잖아' 하고 밀어내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냥 계속 들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이 되니까 뽕짝 음악을 하루에 몇 시간도 아무렇지 않게 들을 수 있게 됐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더라. 잠깐 틀면 재미있어 하긴 하는데 한 시간씩 들을 수 있는 음악은 아닌 거다.
한 번은 내 이름을 걸고 파티를 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뽕짝 음악에 완전히 젖어있던 상태라서 그래도 되는 줄 알고 네 시간 정도 계속 뽕짝만 틀었다. 초반엔 재미있다고 듣던 사람들도 계속 그렇게 가니까 하나둘씩 나가더니, 나중에는 서너 명만 남았다.
Q. 아 웃긴다. 그런데 웃긴 것만은 아니다. 이런 음악들을 듣다 보면 웃기다가 슬프기도 하다. 옛날 생각이 나면서 울컥할 때도 있다. 그래서 내가 왜 울컥하지? 하기도 하는데, 원래 그런 건가.
A. 뽕짝 음악 트는 곳, 춤추는 곳에 가보면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곡을 참 좋아하시더라. 젊은 사람들은 그런 느낌이 아닐 거고, 아니면 거꾸로 느낄 수도 있겠다. 나이 드신 분들이 '내 나이가 어때서'를 부르면서 춤추는 게 마냥 행복한 느낌만은 아닐 것 같다. 나이가 들고 시간이 흘러간다는 것은 울적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런데 또 울적함을 그런 식으로 소진시키는 건 굉장히 좋은 일 같다.
Q. '내 나이가 어때서'는 평소 즐겨 듣거나 부르는 노래는 전혀 아닌데,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이'라는 가사까지 생각난다. 이런 노래들의 힘인 것 같기도 하다.
A. 술을 마시고 노래방을 가면 그래도 한두 번은 부른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순간에는 아마도 '땡벌' 같은 노래를 부르지 않을까.
신바람 이박사를 찾아갔더니'뽕' 앨범은 첫 곡 '
'부터 아주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옵니다. 가사도 그렇고, 도대체 이 구슬프고 관조적인 목소리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궁금했습니다. '뽕을 찾아서' 다큐에도 나오지만, 이 곡은 250이 '테크노 뽕짝'의 명인 신바람 이박사, 그리고 이박사와 함께 작업해 온 키보디스트 김수일을 찾아갔다가 탄생했습니다.
이박사는 독특한 그루브와 추임새를 자랑하는 가수로 고속버스 가이드를 거쳐 1989년 가수로 데뷔했고, 첫 음반이 100만 장 이상의 테이프 판매량을 기록할 정도로 '메들리 스타'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1995년에는 일본에 진출해 전국적인 스타가 되면서 일본의 명가수들도 서기 어렵다는 무도관 무대에 섰습니다.
이박사는 이전에 한국에선 중년층을 상대로 노래했지만, 일본에서는 사이키델릭한 사운드로 젊은이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죠. 이박사와 계약했던 소니뮤직은 일본에서 인기 높았던 그의 음반을 한국에서도 발매했고, 한국 젊은이들도 이박사의 '테크노 뽕짝'에 열광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23년 전인 2000년에 신바람 이박사를 만나 인터뷰하고 기사를 썼는데요,
는 여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그동안 이박사의 삶에는 여러 굴곡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다치기도 하고 사기를 당해 재산을 날리기도 하고 한동안 공백기도 있었지만, 이박사는 지금도 여전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250은 예전부터 이박사의 팬이었다고 하는데요, 앨범 '뽕'에도 이박사가 참여했고 공연을 같이 하기도 했습니다.
숨은 명인 김수일의 목소리 '모든 것이 꿈이었네'Q. 앨범의 첫 곡부터 인상적이다. '모든 것이 꿈이었네'는 어떻게 쓴 곡인가.
A. 이박사 님 예전 앨범 중에 '서울 깜빡이'라는 앨범이 있는데, 음악적으로 너무 좋았다. 이박사 님 앨범에선 보통 이박사 님의 보컬 퍼포먼스를 듣게 된다. 하지만 내가 앨범을 만들어야 하는 단계가 되니까, 뒤에서 반주를 넣고 있는, 그러니까 음악을 만드는 사람의 관점으로 다시 들어봤다.
너무 잘 만들었더라. 그래서 이 음악을 만드는 분을 만나보고 그 악기도 구경해보고 싶었다. 사운드에 대한 고민도 하고 있었을 테니까. 그분이 이박사 님이랑 항상 같이 음악을 해온 김수일 선생님이라는 분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이박사 님의 DJ이자 전담 프로듀서인데, 그분 목소리가 세상에 나간 적은 없었다.
이박사 님을 뵈었을 때 김수일 선생님한테 미발표곡이 있냐고 여쭤봤다. 그랬더니 그분이 있다고 하면서 평생 써온 악기를 꺼내 오셨는데, 플로피 디스크(!)가 들어가는 키보드였다. 그 플로디스크에 우리가 알고 있는 'YMCA'도 데이터로 들어있었다. 플로피 디스크를 넣고 플레이 버튼을 누르니까 정확히 음악이 나왔다. 내가 옛날에 들었던 'YMCA'가 물리적인 디스크에 담겨서, 정말 키보드로 음악을 만든 사람이 옆에 앉아있고, 그렇게 음악이 들려오는데 이미 그때부터 느낌이 뭔가 몽환적이었다. 와 진짜 인생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순간이 아니구나!
미발표곡을 혹시 불러 주실 수 있는지 물었더니 선생님이 이미 만들어놓은 반주가 있다면서 플로피디스크를 넣고 그 음악에 맞춰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즉석에서 마이크를 들고 녹음했는데, 노래를 듣는 순간 정말 충격이었다. 목소리부터 가사부터 와, 너무...안 그래도 약간 몽환적인 상태였는데 마지막에 '깊은 잠을 깨고 보니 모든 것이 꿈이었네'라는 가사를 듣는 순간 뭔가 마음 한 구석에서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그 녹음을 끝내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다들 조용히 있다가 영상 감독님이 갑자기 '모든 것이 꿈이었대' 그러시더라. 같이 차에 탔던 사람들이 다 이구동성으로 '맞아!' 했다. 모두가 가사에 꽂혀 있던 거다.
김수일 선생님을 정식 녹음실에 초대해서 다시 녹음을 할까 생각하다가, 처음 불려졌던 순간의 무언가를 그냥 가지고 가고 싶어졌다. 그래서 노래하는 뒤에서 설거지하는 소리까지 들어가 있지만, 그냥 그대로 들리게 놔뒀다. 나에게 너무나 큰 순간이었고,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무언가가 있었으니까.
노이즈가 많은 지저분한 보컬 사운드를 갖고 어떻게 노래를 완성할까 고민하다가, 나도 마찬가지로 노이즈가 많이 들어있는 악기들로 곡을 구성하면 곡이 갖고 있는 공간 같은 게 통일되면서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뭐랄까 그냥 할아버지 한 분이 그냥 혼자서 이렇게 박수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 것 같은 그런 이미지를 생각하면서 곡을 완성하려고 했다.
정말 고민은 한 2년 넘게 하고 있었는데, 이박사 님과 김수일 선생님 목소리를 녹음했던 기억도 시간도 3년쯤 지나니까 추억이 되고, 그때쯤 어떻게 가야 할지 명확해지더라. 그래서 고민은 한 3년 했지만 완성은 한나절 만에 한 곡이다.
이 곡의 가사는 '나를 두고 떠난 사람 어디쯤에 갔을까 십 리 절반 못 가서 나를 찾아오시려나'로 시작되어 '달과 함께 벗이 되어 옛이야기 주고받다 깊은 잠을 깨고 보니 모든 것이 꿈이었네 모든 것이 꿈이었네'로 끝납니다. 그리고 '내가 가수가 아니니까' 하며 쑥스러워하는 김수일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Q. '내가 가수가 아니니까'는 일부러 넣으신 건가.
A. 나 자신도 가수가 아니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가수가 아닌 사람으로서 앨범이 시작될 거라는 이야기를 넣고 싶었다. 그리고 김수일 선생님 말씀하시는 어투가 너무 귀여우셔서. 그런데 사실 선생님도 본인이 노래를 잘한다는 걸 아시는 것 같더라.
'둘리' 가수 오승원의 목소리와 '뽕'의 정서이 앨범에는 이박사와 김수일 외에도 색소포니스트 이정식, 아기공룡 둘리 주제가의 가수 오승원 등이 참여했습니다. 오승원은 이 앨범의 마지막 곡인 '
' 목소리의 주인공인데요, '타타타' '킬리만자로의 표범' 등 수많은 히트곡의 가사를 쓴 양인자 작가가 가사를 맡았습니다.
"오늘이 그날인 것 같아 우리가 전부였던 시간 이제는 너를 볼 수 없는데 그 추억들은 기다리고 있었나 봐 우리가 눈 맞추던 자리 그곳에 자꾸만 너를 데려와" 세월이 흘렀지만 오승원의 목소리는 '요리 보고 조리 봐도~'를 부르던 그 시절과 다르지 않습니다.
Q. 앨범에 여러 뮤지션들이 참여했는데.
A. 전부 다 '나의 노스탤지어 속에 있는 누군가를 만나야겠다'였다. 양인자 선생님 같은 경우는, 어릴 때 드라마 '엄마의 바다'에서 김혜자 선생님이 라디오에 나온 노래 '타타타'를 따라 부르면서 우는 장면을 집에서 혼자 봤는데,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타타타'라는 곡이 정말 명곡이고 양인자 선생님이 쓴 가사도 좋았다.
이정식 선생님도, 내가 '서태지와 아이들'을 좋아했었는데 당시 '서태지와 아이들'과 함께 했던 색소포니스트니까 너무 멋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나의 어린 시절 노스탤지어 속에 존재하던 어떤 음악적인 요소를 찾고 싶었던 것 같다.
오승원 선생님은 음악적 요소라기보다는 그냥 목소리만으로 갑자기 나를 어느 순간으로 돌려버리는 느낌이 있어서 만나 보고 싶었다. 오승원 선생님은 찾는 데 한 3년 걸렸다. 그 아드님이 가수인데 '스타킹'에 출연한 적이 있어서 검색을 하다가 알게 됐고, 아드님이 출연한 영상을 보니까 어떤 건물이 나오더라. 그래서 영상을 멈추고 그 건물 간판에 쓰인 단체명을 검색해서 연락했다.
오승원 선생님 목소리는 내가 어린 시절 집에서 부모님 기다리며 혼자 TV 보던 그때를 떠올리게 했다. 둘리는 사실 만화책으로 보면 슬픈 만화가 아니고 명랑하고 밝은 내용인데, TV로 볼 때는 항상 슬펐다. 그게 생각해 보면 주제가 때문이었다. 주제가를 들으면 너무 슬프고, 그 만화에서 어떤 에피소드가 나와도 둘리는 그냥 엄마를 잃은 아이인 거다. 그때 만화 주인공들은 부모님과 떨어진 아이들이 많았다. 까치도 하니도 독고탁도.
요리 보고 조리 봐도 음음~ 알 수 없는 둘리~둘리~
빙하 타고 내려와 친구를 만났지만
1억 년 전 옛날이 너무나 그리워
보고픈 엄마 찾아 모두 함께 나가자 아하~아하~
외로운 둘리는 귀여운 아기공룡
호이~호이~ 둘리는 초능력 내 친구~
그 시절을 돌이켜보니 왜 그렇게 슬펐는지 떠오르더라. 오승원 선생님 영상 중에서 2013년쯤에 고등학교 강당에서 노래 부르는 영상이 있는데, 오승원 선생님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영상에서도 선생님이 '둘리' 주제가를 부르는데, '요리 보고~' 이렇게 한 소절 나오니까 벌써 강당이 온통 난리가 났다. 정말 놀라웠다. 노래가 좋고 안 좋고를 떠나서 모두가 아는 노래를 부른 가수를 생전 처음 본 건데, 한 마디만 들어도 목소리가 예전하고 너무 똑같더라.
영상에 달린 댓글을 보니까 다들 슬퍼하더라. 나도 비슷했다. 어떤 무언가는 그대로인데, 그 무언가가 맨 처음 각인됐던 기억으로부터 지금은 떨어져 있으니까, 그만큼의 시간이 느껴지는 거였다. 그게 느껴지는 어떤 순간이 '노스탤지어'이고 뽕짝의 기본 정서이기도 하다.
이박사 님과 작업하면 사실 쉽다. 신바람 이박사 목소리가 나오는 순간 모두가 뽕짝인 걸 안다. 그런데 오승원 선생님 목소리는 다른 의미로 뽕짝의 정서를 갖고 올 수 있는 일종의 치트키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욕심을 내기도 했다.
그리운 그 곳, 그 시간으로 나를 데려가Q. 앨범은 김수일이 부르는 '모든 것이 꿈이었네'로 시작하고 오승원이 부르는 '휘날레'로 끝난다. 두 곡이 뭔가 통하는 느낌인데.
A. 휘날레 이후에 다른 노래가 나오는 건 원치 않았다. 양인자 선생님 쓰신 가사는 원래 '너를 데려와'로 끝나는 거였는데, 마지막에만 '나를 데려가'로 했다. 둘리 에피소드 중에 제일 슬펐던 건 뭐니 뭐니 해도 둘리가 과거로 돌아가서 엄마랑 재회했는데, 희동이가 갑자기 둘리 꼬리를 잡고서 도로 끌고 가는 이야기였다. 어렸을 때 정말 트라우마처럼 봤다.
추억을 떠올릴 때 우리가 하고 싶은 게 그 추억 속 무언가가 지금 여기로 오기를 원하는 건 아니다. 그냥 내가 그때로 가고 싶은 거지. (둘리가 과거로 돌아갔던 것처럼.) 그래서 클로징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마지막 가사는 살짝 '나를 데려가'로 붙이고 마침표를 딱 찍었다.
저는 250의 앨범 '뽕'을 들으며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아버지는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셨는데, 이탈리아 칸초네도, 오페라 아리아도, 가곡도 좋아했지만 결론은 항상 '뽕짝'이었습니다. 제가 피아노를 배우고 난 후로는 '눈물 젖은 두만강'이나 '단장의 미아리 고개' 같은 노래 반주를 종종 시키셨는데, 오른손으로는 구슬픈 멜로디를, 왼손으로는 '쿵짝 쿵짝' 혹은 '쿵짜작 쿵짝' 리듬을 쳤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아버지는 엄밀히 말하자면 노래를 잘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모든 노래를 쉽게 불렀습니다. 음정을 마음대로 낮추거나 늘리고 박자도 왔다 갔다 하는데, 거슬리지 않게 어떤 장르이든 뽕짝처럼 들리게 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이게 바로 '뽕끼'라는 걸까요.
20여 년 전 부모님 모시고 효도 여행을 갔다가 베니스에서 곤돌라를 탔는데, 첫 유럽 여행에 들떴던 아버지는 즉석에서 칸초네를 한 곡 뽑았습니다. 발음이야 어찌 됐든 이탈리아어 가사까지 외워 종종 부르던 '돌아오라 소렌토로'였습니다. 한국인의 '뽕끼'로 충만했던 아버지의 노래가 끝나자 박수가 터졌습니다. 우리가 타고 있던 곤돌라 뱃사공과 승객들뿐만 아니라 주변 곤돌라에 탔던 사람들이 '브라보!'를 외쳤죠. 아버지는 상기된 표정으로 '관객'들에게 답례 인사를 하고 앉았습니다.
아버지는 세월이 흐른 뒤에도 그때를 '생애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추억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또 세월이 흐른 지금, 저는 '뽕'을 들으며 지금은 제 곁에 없는 아버지와, 해질녘 베니스 운하에 '뽕끼'가 넘쳐나던 오래전 그 순간을 추억하게 됩니다. 음악이 그 순간으로 '나를 데려가'는 거죠.
뱅버스의 그 남자는 왜 계속 뛰었나팟캐스트에선 여러 곡 이야기를 나눴지만 앨범의 모든 곡을 소개하는 게 이 글의 목적은 아니라 여기선 생략하려 합니다. 직접 들어보시면 더 재미있을 겁니다. 다만 '뱅버스'라는 곡 이야기는 빠뜨리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이 곡이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일렉트로닉 노래 부문 수상작이죠. '뱅버스'는 배우이자 미술가이자 뮤지션인 백현진이 열연하는
도 인상적인데요, 카메라는 불륜 현장을 들키자 도망가기 시작해 끝도 없이 달리는 남자를 따라갑니다. 이 뮤직비디오는 여러 해외 영화제에 초청받고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Q. 뱅버스 작업 때 에피소드를 들려달라.
A. 어떻게 보면 가장 만들기 싫었던 곡이다. '너무 뽕짝인 뽕짝'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뭐랄까 너무 알기 쉽고 1차원적이고. 그런데 그걸 피하는 것 자체가 여전히 예전 습관을 못 버리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뽕짝은 직관적이어야 하고 솔직해야 되고 뭔가 촌스러워도 자신이 없어도 그냥 들이댈 수 있는 게 멋있는 거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막상 내가 그러질 못하고 있더라. 그래서 한 번만 진짜 내가 도저히 하고 싶지 않은 방향, 너무 뻔해서 가기 두려운 방향으로 가보자고 생각하며 만든 곡이다. 고민은 많이 했지만 이 곡도 정작 만드는 데 시간은 반나절 정도 걸렸다. 안 하려 했던 걸 전부 다 집어넣고 나니까 노래가 정말 빨리 만들어졌다.
Q. 뮤직비디오가 너무 재미있어서 홀린 듯이 보다 보면 휙 지나가더라.
A. 주인공 남자가 불륜을 들켜서 도망가기는 하는데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아마 뮤직비디오에는 나도 잠깐 등장할 거다.
Q. 처음엔 불륜 현장을 들켜서 도망가는 걸로 시작되지만, 나중에는 저 사람 왜 계속 뛰는 거야? 이런 생각이 든다. 왜 계속 뛰는 건가.
A. 그냥 멈출 방법이 없어서 뛰는 거 아닐까. 마지막에 차에 치이는 정도가 되어서야 잠깐 멈추는 거고.
Q. 잠깐 멈췄다가도 다시 뛴다.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그러니까 웃긴데 좀 짠하고 그런 느낌이다. 사람 사는 게 저런 건가 이런 생각도 들었다. 백현진 씨가 뮤직비디오 찍는 데는 얼마나 걸렸나.
A. 사흘 동안 뛰었다. 첫날에 뮤직비디오의 마지막 부분, 산에서 구르고 하는 장면을 찍었다. 둘째 날 출근할 때부터 이미 많이 힘들어 보였다. 둘째 날은 초반부 달리고 건물 달리고 쓰레기통으로 몸 날리고 이런 장면들을 찍었는데 그래도 그걸 다 열심히 하시더라.
'뽕'은 아포가토와 같다Q. 결과물이 한 곡 한 곡 다 멋진데, 작업은 어떻게 진행됐나.
A. '뽕'이라고 정했으니까, 한편으로는 굉장히 특정된 장르 음악 같기도 하지만, 예전에 트로트 혹은 뽕짝, 발라드를 들을 때 '뽕끼가 있다'는 얘기를 많이 하지 않았나. 사실 음악적으로 별로 통하는 말들은 아닌데도, 무슨 뜻인지 다 아는 거다. 그게 무엇인지 찾아내는 과정이었으니 특정 장르의 음악적 형식을 그냥 갖고 온다고 해서 완성되는 게 아니었다. '뽕끼'라고 하는 걸 무엇에서 느끼는지 찾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 과정과, 그것들을 들고 와서 지금의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 내 방식으로 풀어내고 싶은 다른 형식들이 있으니까, 그걸 섞는 '배합'의 과정이었다.
나는 앨범 '뽕'을 종종 요리에 비유하는데, '아포가토 '같은 음식이 있지 않나. 정말 단맛의 아이스크림 위에 아주 쓴 에스프레소를 얹으면 잠깐 동안 요리가 완성되는데 그 배합이 중요한 거다. 배합을 어떻게 하느냐가 고민이었다. 계속해서 이걸 어떻게 얼마나 섞어야 하나, 이리로 가면 너무 뽕짝이고, 저리로 가면 또 전혀 뽕짝이 아니고, 그렇게 계속 왔다 갔다 했다.
Q. 그렇다면 뽕이다, 힙합이다, 아니면 케이팝이다, 이게 다 배합의 차이인 건가.
A. 그렇지 않을까.
Q. 앨범 만드는 게 고름을 내보내는 것 같았다는 비유도 했는데.
A. 결과는 너무 즐거운데 과정은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고, 그냥 계속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250이라는 이름으로는 처음 내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 단계에서 어쨌든 해내고, 해치워야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지나고 보니 정말 쥐어짜듯이 낸 앨범이기도 하다. 앨범을 만들기 위해서 뭔가 많이 섭취를 한 게 아니라, 정말 극단적인 다이어트를 통해 만들어졌다. 최후에 남아있는 내 안의 하나, 그 무언가를 찾아서 계속해서 빼고 하다 보니까 만들어진 앨범이다.
어떤 새로운 음악을 만들었다기보다는 그냥 이 뽕짝 음악이라는 게 내 안 어디에 있었는지를 거꾸로 찾아 들어가는 과정이었던 거 같다. 그 과정이 편하지만은 않았기 때문에 고름이라는 표현이 나오게 된 거다.
Q. 다른 곡 작업 할 때와는 차별되는 과정이었던 건가.
A. 맞다. 그래도 한 번쯤은 넘어서야 하는 산이었다. 내가 어디서 시작하는지 알고 싶었던 것도 있고, 이제 거기서 시작을 했기 때문에, 그러니까 정말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음악으로부터 시작을 했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바닥을 치고 새로 시작하듯 음악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홀가분하다.
250, 한국대중음악상 휩쓸다Q.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이름이 불려서 딱 시상대에 올랐을 때 기분이 어땠나.
A. 너무 떨었다. 올해의 음악인 상을 받으니, 음악하는 사람으로서 이제야 진짜 프로 뮤지션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의 앨범 상은 정말 기뻤다. 이 앨범을 일렉트로니카로 받아들여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일렉트로니카 앨범 부문 상을 받은 것도 정말 좋았다.
원래 음반 마스터링을 프랑스와 일본 업체 두 곳에 맡겼는데, 일본 버전이 CD에 쓰였다. 프랑스 버전은 스트리밍 음원에 썼다. 일본 버전은 마스터링 하신 분이 일렉트로닉 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분은 아니었고 그래서 오히려 더 재미있는 작업이긴 했는데, 그러면서도 일렉트로닉 음악으로 안 들릴까 봐 조금 걱정도 했다. 그런데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일렉트로니카 음반과 노래 부문 둘 다 상을 받게 되니까, 내가 일렉트로니카 뮤지션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게 굉장히 기뻤다.
Q. 프로듀서&작곡가로 작업에 참여했던 뉴진스도 상을 많이 탔는데.
A. 일단 신기했다. 나는 계속해서 하던 걸 해왔고 좋아하는 걸 해왔는데, 어느 순간 정말 딱 맞는 사람들과 딱 맞는 곳에 노래가 놓였을 때 파급효과가 생각보다 크다는 걸 느꼈다. 뉴진스 앨범은 뛰어난 분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각자의 재능을 발휘한 게 다 더해져 나온 결과물이다. 굉장히 멋있는 팀에 내가 속해 있다는 게 정말 기분 좋았다.
Q. 이박사부터 뉴진스까지, 어느 한 장르에 국한되지 않는 음악을 하는 것 같다.
A. 사실 어느 장르 음악을 특별히 좋아한 적은 없었고, 그냥 가장 자유로워 보이는 뮤지션에 대한 동경이 있었던 것 같다. 힙합 음악이 한동안은 굉장히 장르 음악이었지만 2000년대쯤부터 미국에서 메인 스트림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힙합 뮤지션들이 메인 스트림으로 올라가는 과정을 봐왔고, 장르 음악의 요소들이 팝 가수와 섞이면서 어떤 음악으로 가는지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