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에볼라 파이터'로 불린 젊은이들

SBS 나이트라인 초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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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인 바이러스 '에볼라'가 한창 창궐하던 아프리카 서부 시에라리온 지역에 파견돼 환자를 돌봐온 5명의 대원이 지난달 말 입국했습니다. 하루에도 몇번씩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그 곳에서 대원들은 방호복 하나를 사이에 두고 치명적인 바이러스와 사투를 벌였습니다. 스튜디오에 출연한 고광범 대위(군의관) 시에라리온으로 떠날 당시 5개월 된 아들 앞으로 유서를 남겼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잘 못되면 자신이 어떤 아버지였는지를 아들에게 알려 주기 위해 비장한 마음으로 글을 썼습니다. 이라크 파병에 이어 시에라리온을 다녀온 김영아 대위(간호장교)도 현지에서 우리 대원들이 '에볼라 파이터'로 불리우며 많은 활동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다음은 나이트라인 초대석에서 가진 인터뷰 내용입니다.

Q : 두 분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먼저 고광범 대위는 최근에 입국하셨죠?

-  네, 저는 3월 23일 날 입국을 했습니다. 시에라리온에서는 5주를 있었고, 시에라리온 가기 전에 영국에서 1주간 교육이 있어가지고, 총 6주간 이제 머물다가 온 것입니다.

Q : 김영아 대위는 그것보다 좀 앞에 갔고요?

- 네 저는 2진으로 갔고요. 귀국한 뒤에 3주간 격리기간 거치고 그 뒤에 가족들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Q : 한참 에볼라가 창궐하던 시에라리온 그 지역에 가는 거, 참 결심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고 대위는 어땠습니까?

-  에볼라 바이러스가 점점 퍼져가지고 이게 미국으로도 가고 영국으로도 가고 해서. 아 막연히 이제 우리나라에도 곧 오겠구나, 그러면은 내 가족이 위험할 수도 있겠다. 그러면 지금이라도 뭔가 조치를 하는 게 맞는 거 같다,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참에 정부에서 파견대를 보내겠다, 해가지고. 그러면 내가 그 사람들을 도울 수 있고, 마땅히 또 해야 된다, 라는 생각에서 지원을 하게 됐습니다.

Q : 김 대위는 어떻게 자원하게 되셨나요?

- 저는 그 전에 이라크 파병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 경험이 저한테 어땠냐면 항상 저희 환자를 보다가 현지분들 돌보면서 아, 제가 여기서도 이렇게 많은 도움을 줄 수가 있구나, 나중에 이런 일이 생기면 또 한 번 더 지원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Q : 고 대위는 결혼도 한 지 얼마 안 됐고, 애기도 있다 그러는데 가실 때 유서라고 그러기는 좀 그렇고, 애기한테 남긴 글이 있던데. 갖고 오셨는데 정말 이때는 비장했을 것 같아요. 좀 한 구절 여기서 읽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 "건우야, 군인으로서 죽음의 위험이 있는 곳이라도 아빠를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가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결정이었어. 그래서 아빠는 의사로서 또 군인으로서 마땅히 가야 할 길을 간 것이란다."

Q : 네. 정말 이곳에서 읽게 돼서 정말 다행인데, 이거 쓰실 때는 비장했을 것 같아요. 어땠습니까?

- 애기가 그 당시 5개월이었습니다. 만약에 제가 잘못되면 아버지에 대한 어떤 기억도 없기 때문에 그래도 뭔가 아들한테 아빠의 존재에 대해서 좀 알려줘야겠다, 라는 생각에서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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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김 대위, 그때 처음 시에라리온 도착했을 때 그쪽 상황은 어땠나요?

- 거기 주민들, 현지인들조차도 이제 이게 위험한 건 알고 있고, 손 씻기나 아니면 감염 관리를 잘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생각보다는 괜찮았는데, 여전히 계속 환자들이 늘어나고 있었고, 저희가 환자를 보면서도 사망률이 되게 높았습니다. 높아서 현지 의료진들이랑 같이 일을 했는데 현지 의료진조차도 환자를 직접 볼 때 약간 두려움을 가지고 보는 게 있었습니다.

Q : 고 대위는 어땠습니까? 거기 가서 정말 심각한 순간도 있고 그랬을 텐데 얘기 좀 해주시죠.

- 에볼라 환자들이 있는 곳을 저희가 '레드존'이라고 부르는데, 레드존에 처음 들어갔을 때는 저희가 보호복이라고 우주복처럼 입는 게 있는데, 아무리 그걸 입더라도 결국 바깥과 날 경계 짓는 것은 특수한 비닐, 얇은 비닐 하나밖에 안 되거든요. 혹시 이게 구멍이 나거나 잘못되면 정말 감염될 수 있구나, 하는 그런 두려움이 컸던 것도 사실입니다.

Q : 그래서 한 5주 동안 현지에서 있었는데 가장 힘들었던 일은 뭔가요?

- 중환자실에 투석을 돌리는 환자가 있었습니다. 그 투석을 돌리려면 필터도 필요하고, 수액도 있어야 되고 그런 제반장비들이 필요한데, 현재 시에라리온 전국에 하나도 없다고. 그래서 결국 그 환자는 48시간 정도 버티다가 사망을 했는데 그 동안 참 환자 옆에 있어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고, 단지 그 환자 분이 시에라리온에서 태어난 것 때문에 최선의 치료를 못 받으니까. 그게 너무 참 안타깝고 해서 심적으로 참 많이 힘들었었습니다.

Q : 그리고 김 대위, 마지막으로 이라크도 갔다 오셨지만 시에라리온은 워낙 위험한 지역이고 전 세계적으로 모든 관심이 몰려 있는데. 그게 다녀오신 후에 느낌이 좀 다를 것 같아요. 어떻습니까?

- 네, 그렇습니다. 삶과 죽음에 대해서 되게 많이 생각을 하게 됐고, 현지 의료진 그리고 인터내셔날 국제 간호사들 같이 일을 하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훨씬 넓게 된 것 같고. 그전에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한국에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제가 나가서 다른 일도 할 수 있겠구나, 좀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겠구나, 생각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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