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과 민주주의와 정동영의 국민
김욱 2004-03-14 16:25:06, 조회 : 67, 추천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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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치포털, 인터넷 정치공론장, 百花齊放百家爭鳴의 열린 마당 2004-03-14
대통령 노무현이 2004년 3월 12일 탄핵소추 되었다. 이 탄핵소추를 두고 열린우리당은 “의회 쿠데타”라고 울분을 토했고, 민주당은 “의회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규정했으며, 한나라당은 “구국의 결단”이라고 자평했다.
그러나 정작 놀라웠던 것은 이를 보도하는 이른바 개혁적 신문들 그리고 TV매체들이었다. 그들에게 3월 12일은 말하자면 민주주의의 조종이 울리는 날이었다. 나는 그들이 쏟아내는 선동적인 문구들, 특별히 공영방송 KBS가 세 번째 ‘헌정중단(!)’이라며 두 번의 군사쿠데타와 탄핵국회 장면을 ‘지적 몽타주’ 수법으로 보여주었던 ‘무지몽매한’ 편집화면을 잊을 수가 없다.
과연 역사는 오늘을 어떻게 기억할까? 이 땅의 민주주의를 연구하는 후세의 사가들이 오늘의 탄핵을 친노 지지자들과 언론 그리고 시민단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민주주의의 조종이 울렸던 국치일’로 평가하게 될까? 만약 그렇다면 노무현의 탄핵을 지지했던 나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은 부끄러운 선조들이 되는 것이다.
후세의 역사적 평가를 지금 내가 대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노무현의 탄핵을 지지했던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역사는 노무현 이후로도 오래 동안 계속된다. 친노냐 반노냐라는 눈앞의 현재적 시각이 아닌 헌법과 민주주의라는 아주 먼 미래의 시각에서 냉정하게 들여다보자.
지금 탄핵을 승복할 수 없다고 분노하는 사람들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국민들은 노무현의 탄핵사유가 경미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여론을 반영치 않고 다수가 횡포를 부렸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진보적인 시각에서 탄핵이 보수회귀의 기회가 될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탄핵이 부적절했다고 생각하는 경우다. 자, 그래서 ‘의회 쿠데타’인가?
잘 들여다보기 바란다. 공통점이 있다. 위 두 가지 이유 모두 헌법과 민주주의의 관점이 아닌 노무현 정권을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따라서 그 대답이 달라질 수 있는 ‘정략적!’인 관점이라는 점이다. 무슨 말인가? 쉽게 말해, 그런 관점이라면 만약 12일 ‘완전히 똑같은 사연과 방식으로’ 탄핵을 당한 사람이 노무현이 아닌 이회창이었다면 아마도 ‘의회 쿠데타’를 울부짖을 사람들의 면면이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란 말이다.
나는 노무현의 탄핵사유가 국민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이미 말했으며, 두 번째 관점에 대해서도 동의하기 힘들지만 여기서는 논지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 그 주장에 대한 반박은 생략하겠다. 그 내용적 반박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두 가지 사유 모두 ‘그렇다’고 인정하기로 하자. 그리고 다시 묻는다. 자, ‘그렇다’면 역사가 이를 헌법정신과 민주주의의 후퇴로 기록할까?
역사는 결코 2004년 3월 12일 이날만을 홀로 독립시켜 민주주의의 전진이냐 후퇴냐를 판단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노무현 지지자들이 흥분하는 것처럼 12일의 의회의결은 얼마든지 다수의 횡포일 수 있다. 그리고 탄핵사유에 대해서도 잘못 판단한 것일 수 있다. 의회가 잘못 판단하여 위헌 법률을 제정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으며, 입법과정에서 다수의 횡포도 얼마든지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덧붙이자면 검찰의 소추도 권력의 횡포일 수 있고, 잘못 판단해 패소할 수도 있다. 당연히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있는 법리적 상상도 얼마든지 옳지 않을 수 있다. 심지어 헌법학자들은 헌법재판소의 (신성한?) 결정례까지 시도 때도 없이 잘됐다 못됐다 평석을 한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민주당이 주장했던 것처럼 12일의 의결 자체만으로 (절대적으로 올바른 요건 판단이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 ‘의회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내가 지금 확신하는 것은 역사가 12일의 탄핵소추를 별개로가 아니라 총과정으로서 평가할 것이라는 점이다. 즉 12일의 탄핵이 ‘여론을 반영했든 않았든(!)’ 역사는 우리가 이 탄핵을 어떻게 받아들였고, 어떤 절차에 따라 해결해 나갔으며, 대통령의 권한이 어떻게 문제없이 대행되었으며, 어떤 합의로 분쟁이 마무리 되었느냐를 평가해 이것이 민주주의 전진이었는지 후퇴였는지를 평가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아직 내 주장이 친노적 분노 혹은 정략적 이유 때문에 납득되지 않은 사람이라면 다시 생각해보자. 대체로 우리 헌법교과서는 12일 이전까지는 탄핵 조항을 거의 현실성 없는 사문화된 조항으로 취급해왔다. 특별히 대통령 탄핵은 상상하기조차 힘들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우리도 대통령 탄핵의 경험을 갖게 되었다!
지금은 노무현을 위한 분노 때문에 나의 이런 주장이 반노적 조롱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런 뜻이 아니다. 이 사태를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극복할 수 있다면 이것은 우리 민주주의 역사의 엄청난 경험이다. 노무현의 탄핵소추가 인용되거나 기각되거나 상관없이 그렇다.
계속 상상해보자. 아주 먼 훗날 우리나라의 헌정사를 배우는 학생들이 노무현이라는 대통령의 이름도 알까 모를까하는 미래에, 12일의 탄핵의결이 설령 다수의 횡포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합법적 절차에 따라 민주적으로 완성한다면, 그 12일만을 따로 떼어내 ‘의회 쿠데타’로 기억할까 아니면 이 12일의 탄핵소추를 포함해 탄핵정국의 총과정을 평가해 우리 민주주의의 역동성을 역사적으로 평가하게 될까? 나는 후자라고 확신한다.
헌법과 민주주의의 진보는 ‘노무현이냐 아니냐’ 또는 ‘노무현 정권의 개혁적 가치판단(그래도 한나라당보다 낫지 않느냐 아니냐)’의 시각에서는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노무현을 위한 분노’ 때문에 헌법과 민주주의 그 자체가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은 개혁세력이 원했든 수구세력이 원했든 탄핵 경험이야말로 노무현 이전의 우리 헌정사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것이 핵심이다.
나도 개인적으로는 대통령 탄핵이라는 이 엄중한 사안을 놓고 어느 정당에 가장 유리하고 불리할까를 이리 저리 농단한다. 물론 이번 탄핵건으로 민주당 혹은 한나라당이 유리할 수도 불리할 수도, 그리고 ‘단기적으로’ 진보세력에 유리할 수도 불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이 글의 관심은 그런 관점이 아니다. 그런 관점에서는 내 주장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다.
무책임하게 들리겠지만 역사는 어차피 어떤 식으로든 앞으로 나아가게 돼 있다. 12일의 탄핵소추를 ‘여론의 반영’이라는 관점에서만 단세포적으로 평가하는 친노 지지자들과 시민단체 그리고 미디어 종사자들은 노무현과 정략과 분노의 눈으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사태를 외눈만으로 평가하며 감정적으로 선전선동하지 말기를 바란다. 나중에 자신들의 지금 행동이 살아있는 생전에라도 조금은 다르게 느껴질 수도 있음을 기억하라.
지금 여기서 자세히 논할 의도는 없지만 검찰의 형사소추가 여론에 따라 좌우될 수 없듯이 의회의 탄핵소추도 반드시 여론에 따라 좌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할 수 있다”는 표현으로 재량을 부여한 의미는 국민의 정치적 여론을 참조하라는 헌법정신의 표현일 수 있다. 그래서 탄핵을 피해보려고 ‘사과와 재발방지’를 요구했을 것이다.
실제로 야당의 요구를 거부한 노무현의 기자회견 직후 탄핵찬성 ‘여론(!)’이 7:3으로 높아 탄핵에 자신감을 얻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정치인들이 오죽했으랴! 그런데 탄핵 이후 ‘여론(!)’은 거꾸로 3:7의 반대로 나타나 국회의원들을 탄핵하고 있다. 도대체 이 조변석개의 ‘여론(!)’을 어쩌란 말인가!? 그리고 임기가 한달 남은 (자격 없는?) 국회의원들이었다 하더라도 자신들의 피선거권이 정당하게 행사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였으므로 다음 국회로 그 권한을 넘길 수도 없는 문제였다.
그럼에도 탄핵소추가 정략이냐 아니냐(과문한 탓인지 나는 지금까지 유사 이래 정략이 아닌 정치인들의 행동을 들어본 적이 없다), 여론을 따랐느냐 아니냐 혹은 개혁세력에게 유리하냐 불리하냐라는 난데없는 인민재판식 기준을 들이밀며 탄핵이라는 국회 고유의 헌법적 권능과 절차를 조롱하는 것은 분명히 헌법적 시각이 아닌 정치적 지향성에 따른 정략적 시각일 뿐이다.
적어도 지금까지 내가 접한 헌법학자들의 코멘트는 탄핵요건에 대한 찬반은 갈렸지만 탄핵 그 자체를 두고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수치스런 일이라는 등의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인 사람들은 없었다. 참고로 나는 정치학자들 중에 그런 인물이 있는 것을 보고 여론만을 신성시하는 정치학의 민주주의와 규범적 질서를 의미하는 헌법학의 민주주의가 그렇게 다를 수 있음을 보고 대단히 놀랐다.
장담하지만 헌법재판소에도 여론만을 신성시하는 그런 히스테릭한 정치적 재판관은 결코 없을 것이다. 또한 앞으로 탄핵소추를 인용할 다수 혹은 소수의견의 재판관들을 향해 ‘의회 쿠데타’를 지지한 반동분자로 낙인찍을 수는 더더군다나 없을 것이다. 이 미묘한 문제의 법리판단이 나와 다르다고 다짜고짜 반동이라고 협박하려 해서는 안 된다. 물론 일반인들의 법적 견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앞으로 헌재의 결정이 어떻게든 있을 것이다(예측키로는 총선결과의 영향을 상당부분 받을 것으로 본다). 그 내용 중 다른 것은 몰라도 한 가지 분명하게 장담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헌재의 결정이 설령 기각으로 나올지라도 그 결정의 이유가 지금 언론과 친노세력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국민의 여론을 완벽하게 반영하지 않은 탄핵소추는 민주주의를 파괴한 의회 쿠데타이므로 기각한다’는 식으로는 절대로 나오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추가한다면 만약 국민들이 지금 진심으로 탄핵소추권이 ‘여론’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탄핵소추권을 국민의 손으로 넘기는 헌법개정을 하면 된다. 차제에 국민소환이나 국민발안 제도까지 도입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법적인 사안은 법적인 논리로 공방해야 한다. ‘미끼’를 물었느니 어쩌니 하면서 원칙이 아닌 정략적 유불리나 여론의 관점에서 탄핵을 지지하거나 반대한 사람을 향해 역사의 반동분자로 낙인찍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위협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바로 양심의 자유를 위협하는 노무현식 파쇼다!
정동영은 “야당을 국민 앞에 무릎 꿇릴 것”이라고 말했다. 정동영은 앞으로 인용의견을 낼 다수 혹은 소수의견의 헌재 재판관들도 ‘의회 쿠데타’에 동조했으므로 국민 앞에 무릎 꿇릴 것인가? 그의 파쇼적 사고에는 탄핵을 지지하는 국민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탄핵반대자만이 ‘우리’고 ‘국민’인 것이다. 좋다. 그렇게 하라! 탄핵을 지지하는 ‘그들’과 ‘비국민’들을 모조리 잡이들여 ‘우리’와 ‘국민’ 앞에 무릎을 꿇려라!
나는 정동영이 탄핵을 지지한 ‘국민 아닌 나’를 불러내 ‘국민’ 앞에 무릎을 꿇리고, 십자가에 내 양심을 못 박는다 해도, 우리 헌법과 민주주의는 12일에 있었던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소추가 정치적 입장에 따른 여론의 지지를 받았느냐 아니냐가 아닌 탄핵정국의 총과정이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방식으로 수행되었느냐 아니냐에 따라 역사적으로 그 정당성을 평가받을 것이라고 추호의 흔들림도 없이 확신한다.
그런 의미에서, 국회가 코미디판이 되거나 말거나, 여론조사에 만족하거나 말거나, 탄핵소추가 기각되거나 말거나, 역사가 원한다면 민주당이 죽거나 말거나, 민주주의를 향한 헌정제도혁명은 지금 장엄하게 진행 중이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노무현의 탄핵을 지지한 내 마음은 지금 대단히 평화롭다.
* 덧붙이는 말: 보도에 의하면 직무정지 당한 노무현은 탄핵 다음날까지도 기자회견에서 밝힌 ‘총선과 재신임 연계’의 구체적 방안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 만약 이 구상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면 탄핵정국은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파괴력으로 대한민국을 요동치게 할 것입니다.
김욱은 대학에서 헌법, 법철학 등을 강의하고 있는 헌법학자이며, 논문으로 <주체사상을 통한 마르크스적 자유와 평등실현의 법리와 문제점> (박사학위논문, 1994) 외 다수가 있고, 저서로는 <영화 속의 법과 이데올로기> (인간사랑, 2002), <마키아벨리즘으로 읽는 한국 헌정사> (책세상, 2003)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