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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환영하지 않는 곳에 어린이가 찾아올까?"

’국공립 어린이집 설치‘ 둘러싼 갈등…’어린이의 세상‘ 지켜주는 어른의 품격

"어린이 환영하지 않는 곳에 어린이가 찾아올까?"

만일 어떤 가게에서 '사십 대 여성 출입 금지', '경기도민 출입 금지', '한국인 사절' 같은 팻말을 내건다면, 나는 그곳에 찾아가서 나를 받아달라고 애원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가게를 잘 기억해 두었다가 실수로라도 그 앞을 지나지 않도록 주의할 것이다. 우리나라 출생률이 곤두박질친다고 뉴스에서는 '다급히' 외치고 있다. 그런데 어린이를 환영하지 않는 곳에 어린이가 찾아올까? 너무 쉬운 문제다. - 김소영, <어린이라는 세계> 중 일부
 
서울의 한 대단지 아파트에서 ’국공립 어린이집 설치‘를 반대하는 민원이 접수됐다는 제보를 받고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대단지 아파트에 민간 어린이집은 단 두 곳에 불과하고, 그마저도 0세반은 전무하다는데 대체 왜 설치를 반대할까. 한편으로는 어린이들의 사회생활 출발점이자 일하는 부모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는 어린이집마저 기피시설이 된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아파트 관리 규약에 따라 설치…주민 과반 동의 얻어야

집값 떨어진다며 국공립 어린이집 설치 반대

우선 국공립어린이집의 경우, 아파트 관리 규약에 따라 설치가 추진됩니다. 송파구청에 따르면 해당 아파트에서는 2021년 7월 단지 내 유치원 폐원 이후 지속적으로 국공립 어린이집 확충 요청 민원이 발생했고, 올해 1월 해당 통로 거주자 92세대 중 50세대 이상이 동의하여 어린이집 설치를 요청한 상황이었습니다. 아파트 관리 규약에 따라 동 입주자 등 과반수 동의와 직접적인 피해를 받는 직상하층 등 인접 세대 동의 조항을 모두 충족했다는 뜻입니다. 어린이집뿐 아니라 놀이방, 공부방 등으로 사용하는 경우에도 이와 마찬가지 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구청은 어린이집이 들어올 1층 세대 계약까지 마쳤는데, ’반대 민원‘이 접수돼 난감하다는 입장입니다.

A 아파트 관리 규약
제 83조(관리주체의 동의 기준)
6. 전용부분을 세대 내 과외(놀이방, 어린이집, 공부방 등) 또는 합숙소 등으로 사용하고자 하는 경우 통로식은 해당 통로, 복도식은 해당 복도 층에 거주하는 입주자 등의 과반수 동의를 받아야 한다. 이 경우 직접적인 피해를 받는 인접 세대(직상하층 포함)의 동의는 반드시 받아야 한다.


 

국공립 어린이집 반대 이유, 소통 부족? 집값 떨어질까봐?

집값 떨어진다며 국공립 어린이집 설치 반대

해당 단지를 직접 찾아가 봤습니다. 단지 안에는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2곳이 있었는데, 초등학교의 경우 과밀학급일 정도로 아이들이 많은 아파트였습니다. 학교는 있는데, 어린이집은 부족하다는 민원이 이해가 가는 대목이었습니다. 입주민들은 ”설마 어린이집 설치를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 줄 몰랐다“, ”일부 고층 세대가 어린이집 추진 과정에서 소통 부족을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 ”주민 동의로 추진되었던 일이 반대 민원으로 멈출 수 있는 것인지 의아하다.“ 같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대부분 상식적인 선에서 ’반대 민원이 부끄럽다‘는 여론이 많았습니다.
 
반대 입주민 의견도 들어봤습니다. ’우리도 아이들을 다 여기서 키웠지만, 왜 어린이집이 하필 우리 동에 생겨야 하냐. 놀이터를 허물고 지으면 되는 것 아니냐. 등하원 때 사방에서 사람들이 오면 번잡해진다. 결국 ’집값‘이 떨어질 수 있다.“가 주요 반대 이유였습니다. 또 입주민 동의를 받는 과정에서 ’정확히 우리 동에 설치된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아서 반대한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해당 동 대표는 반박했습니다. 입주민 동의를 구하는 과정에서 정확히 1층에 어린이집이 들어올 것을 고지했고, 어린이집 위치는 지자체의 예산과 개원 시점을 고려해 매매가 가능했던 세대 등을 반영한 결과라는 겁니다.
 

'사회 전체의 노키즈화'…아이 환영하지 않는 분위기에서 아이 태어날까

실시간 e뉴스3. 노키즈존

’어린이집 개원‘을 둘러싼 갈등은 사실 이곳뿐만이 아닙니다. 비슷한 논리로 아이들이 오가면 발생하게 되는 교통 혼잡 등을 이유로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온 곳이 있었습니다. 정익중 아동권리보장원장(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은 이런 현상이 ’사회 전체의 노키즈화‘라고 지적했습니다. 식당과 상점에서 시작된 노키즈존이 이제는 아파트로도 확산하는 분위기에서 아이들이 탄생할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심각한 저출생 속 보육시설마저 논쟁의 소지가 되어야 하는지 되묻고 싶다고 했습니다.

부모들이 바라는 육아정책은 ’국공립 어린이집 확충‘

500세대 이상 신축 아파트 국공립어린이집 의무화 (사진=연합뉴스)

2018년 실시된 보육실태조사 결과에서 양육자들이 가장 바라는 육아정책은 국공립 어린이집 확충으로 조사되기도 했습니다. 민간 어린이집은 운영이 불규칙하고, 최근 월세 급등과 맞물려 임대료가 비싼 지역에선 문을 닫는 경우도 속속 나오고 있지요. 국가가 운영하는 국공립 어린이집이 민간보다 선호도가 더 높은 이유입니다.  정부도 이를 반영해 올해 9월 25일 이후 사용 검사를 신청하는 500세대 이상 아파트 단지에서는 국공립 어린이집을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합니다. 다만, 입주자의 과반수가 어린이집 운영을 찬성하지 않거나 지방보육정책위원회가 보육수요 부족으로 국공립 어린이집이 불필요하다고 심의되는 경우에는 설치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렇게 저출생 문제가 심각한데 아이를 보낼 보육시설이 부족하다는 사실에 좌절하는 초보 부모는 아마 저뿐만이 아니었을 겁니다. 이번 사안을 취재하면서 ’저출생 배경‘의 한 단면을 체험하고 온 것 같아 마음이 참 무거웠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이들의 세상을 지키려는 ’어른의 품격‘을 갖춘 입주민들의 노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습니다.  이번 어린이집 설치는 이미 아이를 다 키우고도, 자신이 겪은 돌봄 공백을 대물림하지 않으려는 여러 사람의 노력이 모인 결과였기 때문입니다. 주민들이 슬기롭게 갈등을 해결할 거란 믿음도 그래서 의심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김소영 작가의 에세이집 <어린이라는 세계>의 한 문장으로 글을 마무리합니다.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누린 사람이 잘 모르고 경험 없는 사람을 참고 기다려 주는 것.
용기와 관용이 필요하지만, 인간으로서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이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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