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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로 만나는 중국·중국인 ⑥] 충칭 편 (글 : 모종혁 중국문화평론가·재중 중국 전문 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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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칭을 대표하는 건축물인 인민대례당
"이곳에서도 살림살이가 궁핍하고 쪼들리기는 마찬가지다. 마을 언저리의 밭에 상추, 호박 따위의 야채를 심었는데 제법 잘 자랐다. 고구마나 옥수수를 심고 가꿀 때는 바로 고향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다."

이 글은 《장강일기(長江日記)》 중 한 구절이다. 1991년 '임시정부의 맏며느리'라 불렸던 정정화 여사가 타계했다.

정 여사는 권문세가 출신으로 대한제국 고위 관료를 지냈던 김가진(1846~1922년) 선생의 며느리였다. 김가진 선생은 3.1운동 직후 74세의 노구를 이끌고 중국에 가서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충칭에서 임시정부가 마지막으로 사용했던 롄화츠 청사
정정화 여사는 연로한 시아버지를 봉양하기 위해서 중국으로 망명한 뒤 26년 넘게 임정의 안살림꾼 역할을 했다.

정 여사가 돌아가신 뒤 1998년에야 출판된 회고록 《장강일기》에는 임정이 상하이(上海)에서 충칭으로 오기까지 고난의 여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임정은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일본의 거센 핍박 때문에 상하이를 떠나 떠돌았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전면적인 피난길에 올랐다. 국민당은 임정 요인과 그 가족들에게 배 한 편을 주어 후난성 창사(長沙)로 이동시켰다.

1932년 상하이를 떠나 1940년 충칭에 입성하기까지 임정의 피난 경로
일본군의 진격이 계속되자, 1938년 임정은 창사를 떠났다. 광둥성 광저우(廣州)로 거쳐 다시 포산(佛山), 광시자치구 류저우(柳州), 구이저우성 구이양(貴陽)과 쭌이(遵儀)로 옮겼다.

충칭 바로 아래에 있는 치장(綦江)에 도착한 것은 1939년 3월이었다. 치장 시기 이념으로 갈라진 좌·우익이 합작하는 7당 통일회의가 열려 임정의 위상이 더욱 높아졌다.

이듬해 9월 임정은 당시 중국의 피난 수도인 충칭시 양류제(楊柳街)에 입성했다. 피난길에 오른 지 2년 10개월 만에 안전한 보금자리에 안착했던 것이다.

1941년 6월 질식 사건이 일어났던 자오창커우(較場口) 방공호 입구
그러나 임정은 충칭에서도 청사를 3번이나 더 옮겨야 했다. 일본군은 중국의 전쟁 수행 의지를 꺾기 위해서 민간인들이 사는 중심가에 무차별적으로 공습했다.

대공 전력을 갖추지 못한 중국은 방공호를 파서 폭격을 피했다. 방공호는 한꺼번에 수백 명을 수용할 정도로 컸다. 하지만 시설은 열악했고 통풍이 안 됐다.

그로 인해 1941년 6월 방공호로 대피한 시민들이 통로가 막히면서 질식사하는 참사도 일어났다. 이렇듯 일본 공군의 잦은 폭격으로 두 번째 청사가 불타자, 우스예샹(吳師爺巷)으로 이사했다.

지금은 철거되어 사라진 임시정부의 제3청사인 우스예샹 청사 자리
임정은 우스예샹에서 3년 넘게 지냈고,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를 썼다. 1945년 1월에는 국민당 정부가 마련해 준 롄화츠(蓮花池) 38호로 옮겼다.

이곳이 지금까지 유일하게 남아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다. 임정 요인과 가족들은 폭격 외에 충칭의 열악한 환경과 싸워야 했다. 충칭은 양쯔강(長江)과 자링강(嘉陵江)이 만나는 지점인 데다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 때문에 사시사철 습도가 높고 안개가 출몰한다. 이런 기후 조건에다 인구가 급증하고 공해까지 더해지면서, 공기 오염이 심각했고 폐병이 창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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