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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멘터리] "파묘", 험한 것을 '꺼내놓은' 감독의 선택

이주형 기자의 씨네멘터리 #101

[험하다] 생김새나 나타난 모양이 보기 싫게 험상스럽다.

표준국어대사전은 ‘험하다’를 이렇게 정의(定義)했다. 그런데 같은 사전에서 ‘험상스럽다’를 찾아보니 ‘모양이나 상태가 매우 거칠고 험한 데가 있다’로 풀이해놓았다. 국어사전에 이런 말이 한두 개가 아니다. 이런 것을 순환논증이라고 한다. 논증해야 할 결론을 전제 삼아 다시 결론을 이끌어내는 오류다.

얘기가 시작부터 옆길로 샜는데, 이런 순환논증 없이도 우리는 험한 게 뭔지 잘 안다. 나도 혹시 내가 제대로 알고 있나 싶어 사전을 찾아보았을 뿐. 그만큼 영화 “파묘”(破墓)의 헤드 카피는 잘 뽑았다. 

‘험한 것이 나왔다’

근래 본 영화 헤드 카피 중에 ‘다녀오겠습니다’(스즈메의 문단속)이후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특히 “파묘”라는 영화 제목과 착 달라붙는다. 경북 영주 출신의 장재현 감독이 약간의 사투리 억양을 섞어 말했다.

“제가 메모에다가는 (제목을) ‘한국의 미이라’ 뭐 이렇게 적었던 것 같아요...저는 ‘파묘’라는 단어가 좀 어렵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시나리오를 쓸 때 친구들과 얘기해보니까 의외로 친구들이 파묘가 더 직관적이고 임팩트도 있다고 하는 거예요.” 

영화 "파묘" 포스터와 헤드 카피 / 쇼박스
이래서 친구를 잘 만나야 한다. “파묘”는 오랫동안 오컬트·호러 영화팬들이 개봉을 기다려온 작품이다. 장재현 감독이 “검은 사제들”(2015)과 “사바하”(2019)로 자신이 이 장르 영화에 진심일 뿐더러 만들기도 잘 만든다는 것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영화 개봉 인터뷰에 왔다는 최민식 배우도 말했다. 

“그동안 오컬트 영화들을 보고 실망을 많이 해서 좋아하지 않았죠. 이 영화에 출연한 건 장재현 감독 때문이에요. 자칫 잘못하면 관념적으로 빠지고 뜬구름 잡는 얘기가 될 것 같은 소재를 전작(前作)들에서 자수로 카페트 짜듯이 촘촘하게 영화로 만들어 냈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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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묘”는 현대 의학으로 규명이 안되는 이상한 대물림병을 앓고 있는 한 부유한 집안의 묘(墓)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병의 원인이 조상의 묫자리를 잘못 쓴데 있다고 본 신세대 무녀 김고은은 40년 경력의 풍수사 최민식과 대통령을 염(殮)한 베테랑 장의사 유해진과 팀을 이뤄 산골짜기로 파묘하러 간다. 그런데 파묘하고 꺼내 화장(火葬)한 관(棺) 아래서 또 하나의 거대한 관이 선 채로 발견되고 거기서 ‘험한 것’이 나오는데…

한국에서 흥행이 쉽지 않은 오컬트 장르 영화인 “검은 사제들”로 540만 명, “사바하”로 240만 명의 관객을 불러 모은 장재현 감독은 “파묘”에도 자신감을 드러냈다. 흥행에 대한 자신감이라기보다는 ‘나는 이렇게 만들고 싶었고, 그렇게 만들었어. (그러니까 관객들도 좋아해줄 거야)’라는 주관이 분명했다고나 할까.

- 독일 관객 반응 중에(한국 개봉 직전 베를린 영화제에 초청됐다) 주인공 4인방의 캐릭터 간 관계를 좀 더 깊이 파고 들었으면 좋았겠다는 의견도 있던데요.
- 저는 캐릭터 서사가 필요가 없으면 과감하게 없애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 주의(主義)거든요.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가 나오자마자 ‘아,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겠구나’하고 유추하게 하고 이야기를 속도있게 진행시키는 게 제가 선호하는 방식이에요. 캐릭터 관계 위주로 보는 관객들은 그게 좀 아쉽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저한테 다시 선택하라고 해도 속도감이 더 낫지 않나 생각합니다.
   
임권택, 강제규, 박찬욱, 임상수, 김지운, 김한민, 류승완, 박훈정, 윤종빈 등 일일이 꼽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명감독들과 함께 일해 온 베테랑 배우인 최민식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배우 입장에서는 현장에서 기댈 사람이 감독 밖에 없거든요. 그런데 유능한 감독들, 흔히 말해서 좋은 감독들, 화제작을 많이 만들어내는 감독들은 자기 색깔이 분명해요. 자기 논리가 분명해요. 영화에 대한 주관이 흔들림이 없어요. 그래서 ‘장 감독! 이 씬을 찍을 때 왜 이게 필요하지?’ 저는 물어볼 수 밖에 없잖아요. 장 감독은(최민식보다 19살 젊다) 명쾌한 해석을 내놔요. 답을 줘요. 그럴 때 신뢰가 가는 거예요.”

듣고 보니 이 얘기는 영화 찍을 때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제일 힘든 게,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모르고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과 일할 때다. 맞든 틀리든 일단 뭘 하는지 알아야 뭘 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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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곡성”을 보다 중간에 나올 정도로 호러나 오컬트 영화를 잘 보지 못한다. (안보는 게 아니라 못 보는 것이다) 내 마지노선은 아리 애스터 감독의 “미드소마” 정도다. 하지만 “파묘”는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중반 이후 ‘험한 것’이 실제로 드러나면서부터는 이건 오컬트 영화는 아니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장재현 감독도 이렇게 얘기했다.

“무속 신앙과 종교적인, 그런 영화 아니에요. 한국인 그리고 시대와 인간, 땅 그런 보편적인 가치를 담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가치에 대해서 얘기하는, 어떻게 보면 휴머니즘적인" ... “그리고 미스터리 버디 무비라고도 할 수 있어요. 케이퍼 무비의 구조를 갖고 있어서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을 겁니다.”

장감독이 이런 뚜렷한 주관을 갖고 만든 영화가 “파묘”다. 장 감독은 이번 영화를 작심하고 대중적으로 만들려고 했던 듯 하다. 원래 이 장르는 대중적인 장르는 아니다. 장감독은 ‘재미있게’, ‘화끈하게’ 만들었다는 표현을 꺼내 놓았다.  

영화는 ‘험한 것’의 실체가 직접 노출되는 중반 이후 톤이 달라진다. 보이지 않는 존재가 더 무서운 법, 귀신도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장재현 감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크리처’를 직접적으로 드러낸 데 대해 “고민이 많았지만 한 발짝 더 나아가고 싶었다”고 말했다. 

‘한 발짝 더 나아감’으로써 일부를 잃고 일부를 얻지 않을까 싶다. 오컬트나 호러는 분명한 장르영화팬들이 있기 때문이다. 조금 잃고 많이 얻으면 좋은 것이고, 조금 얻고 많이 잃으면 손해인데, 감독은 전자(前者)에 걸었다. 

“파묘”의 관 뚜껑은 열렸고, 초반 기세는 아주 좋다. 개봉 사흘 만에 150만 관객이 봤다. “서울의 봄”보다 훨씬 빠르다. 하지만 다음 주면 강력한 경쟁자가 붙는다. “듄:파트2”. 

두 영화는 여배우들이(레베카 퍼거슨과 김고은) 얼굴 한가득 문자를 문신하고 나온다는 공통점이 있다. 영적인 에너지와 주술적인 마력의 존재를 형상화한 두 영화가 맞붙어 어느 쪽이 영(靈)검하게 이길지 궁금하다. 

P.S “파묘”에서 컨버스를 신은 신세대 무녀 김고은의 대살굿 장면은 두고 두고 회자될 것 같다. 작두탄다고 하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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