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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멘터리] '호랑이 선생님'과 '소녀는 졸업하지 않는다'

이주형 기자의 씨네멘터리 #98

(※일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나의 첫 초등학교는 부서졌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그 땅은 상전벽해(桑田碧海)됐다. 개교 60주년을 몇 년 앞둔 일이었다.

1980년대 초 중반, “호랑이 선생님”이라는 공전의 히트를 친 드라마가 있었다. 국내 최초의 교육 현장 드라마로, 다소 계몽적인 프로그램이었지만 당시 시대 분위기에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얼굴은 무서워도 / 마음은 따뜻하여 / 언제나 우리들은 / 선생님이 좋아요’로 시작하는 타이틀곡처럼 인기 형사물 “수사반장”의 떡대 형사였던 고(故) 조경환 배우가 학생들에게 존경받는 ‘츤데레’ 선생님 역할을 맡아 인기를 끌었다. 이 드라마가 얼마나 인기였냐면 당대의 슈퍼스타 조용필이 제법 긴 분량으로 출연했을 정도였다.(83년 ‘TV시대 아이들’편)

이 드라마의 타이틀 마지막 장면에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 건물의 파사드가 나왔다. 호랑이 선생님과 아이들이 함께 모여 본관 앞 긴 계단에서 사진을 찍는 장면이다. 나는 그 동네를 떠난 지 오래됐지만 그 후 십년, 이십 년, 삼십 년이 흐른 뒤에도 이따금 그곳을 찾아 운동장과 교사(校舍)를 둘러보곤 했다. 그리고 갓 입학한 1학년 때 우리 반 모두가 함께 사진을 찍었던 그 계단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하곤 했다.

이제 그 계단도 추억 속에만 남아있다. 십년 전쯤 학교가 철거된 것이다. 물론 학교(이름) 자체는 살아남아 근처에 새로 생긴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나의 초등학교는 사라졌다. 다시 가보고 싶은 생각도, 이제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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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 벚꽃은 만개했는데 시마다 고등학교는 곧 헐릴 예정이다. 이 시골 학교는 폐교가 결정됐다. 고로, 이번 59회 졸업식이 마지막 졸업식이고 이번 졸업생이 마지막 졸업생이다. 그렇다고 일본 영화 “소녀는 졸업하지 않는다(少女は卒業しない)”가 폐교에 대한 감상(感傷)을 말하는 영화는 아니다. 

졸업 후 도쿄로 가서 심리학을 전공하려는 고토는 남자 친구 테라다와 얼마 전부터 서먹해졌다. 테라다는 지역에 있는 대학을 나온 뒤 고향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려고 한다. 고토는 학교가 다른 시설로라도 남겨지기를 바라는데, 테라다는 학교가 헐리고 쇼핑몰이나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말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틈이 생겼다. 내일이 졸업식이 고토는 어떻게든 테라다와 좋게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요리를 잘하는 마나미는 근처 영양 전문학교로 진학한다. 진로를 빨리 결정하면서 여유가 생겼고 보통은 학생회장이 하던 마지막 졸업식의 답사를 용기 내서 맡게 됐다. 어딘지 모르게 어두워 보이는 이 소녀에게는 큰 아픔이 있다. 내일이면, 도시락을 싸와 동급생 남자 친구와 몰래 먹곤 하던 요리실을 남겨 두고 떠나야 한다. 남친과의 추억이 어린 곳을 이제는 묻어두어야 한다.  

중고등학교 6년을 함께 다닌 쿄코와 모리사키도 이제 헤어져야 한다. 경음악부장인 쿄코는 부원인 모리사키가 중학교 때 노래를 부르던 순수했던 모습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며 오랫동안 그를 짝사랑해왔다. 요즘 모리사키는 자신을 세츠나 4세라고 부르며 짙은 분장을 하고 메탈을 부른다. 

언제나 혼자인 사쿠타는 도서실 귀신이다. 졸업식 날에야 겨우 급우들과 말을 틀 정도로 사교성이 부족한 사쿠타에게 학교 도서실과 도서실 관리 선생님은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사쿠다는 “아침 노을 하늘 아래”라는 책을 반납하지 않고 부적처럼 지니고 다닌다. 

"소녀는 졸업하지 않는다" 영화 포스터 / 해피송
마나미와 고토, 쿄코와 사쿠타, 이 네 명의 소녀가 졸업식 D-2일부터 졸업식 직후까지를 겪어나가는 ‘마음을 묘사하는' “소녀는 졸업하지 않는다”는 아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머뭇거리면서도 나아가려는 청춘들의 애틋한 안간힘을 섬세하게 카메라에 담았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왠지 그 시절의 나를 전지적 부감 시점으로 내려다보며 “괜찮아, 다 괜찮아질거야”라며 토닥여주고 싶은 마음이 된다.
 
다수의 주인공의 이야기가 유기적이기보다는 옴니버스식으로 묶여있어 대단한 흡인력이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큰 사건이 벌어지지도 않고, 카메라 워킹도 관찰에 그치지만 이 영화는 이야기보다는 각 시퀀스, 시퀀스에 집중하게 하는 힘이 있다. 마나미 역을 맡은 카와이 유미 등 젊은 배우들이 고교 졸업생의 싱숭생숭한 마음을 설득력있게 그려내기 때문이다. 

주인공들은 진로에는 비교적 무심한 편이라(우리처럼 ‘SKY’, ‘인서울’ 등등을 따지는 분위기는 안 느껴졌다는 의미에서) 대학진학률이 50%도 안됐던 수십 년 전 한국을 연상시킨다. 마나니는 요리 전문학교로, 모리사키는 죽세공품을 만드는 작은 아버지에게 가서 일할 생각이다. 삼삼오오 모여 사진을 찍으면서 추억을 남기고, 교정 곳곳을 둘러보며 마음에 남기고, 졸업 앨범 뒤에 서로가 해주고 싶은 말을 적어 남기는 등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일본 졸업식 풍경이 정겹다.

쿄코: “고교 시절도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났어. 이대로 또 금방 어른이 되는 거겠지.”
모리사키: “그것도 굉장한 일이야. 그냥 당연한 일이 아니라” 

사쿠타: “저는요, 이곳(도서실)이 있어서 3년 동안 학교를 다닐 수 있었어요.”

맞다. 때로는 우리도 어떤 공간, 또는 어떤 사람 한 사람이라도 있어서 회사를 다닐 수 있다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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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초, 서울 행당동에 있는 유서깊은 덕수고등학교가 112회 졸업생을 마지막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일반계는 이미 위례신도시로 이전했고, 전문계열은 경기상고로 통합되며 행당분교는 폐교된다.

덕수상고는 집안은 가난하지만 공부 잘 하는 학생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었다. 경제부총리를 지낸 김동연 경기지사나 정현호 삼성전자 부회장이 덕수상고 졸업생이다. 덕수상고는 야구 명문이기도 했다. 2012~2014년 청룡기를 3연패했고, 지난해에도 메이저 대회인 대한야구협회장기(신세계 이마트배)에서 우승하는 등 경북고와 함께 메이저 대회에서 20회 이상 우승한 단 두 학교 중 하나다.

마지막 졸업식을 마친 덕수고등학교 야구부 졸업생들이 지난 5일 마운드 위에서 기념촬영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5일, 폐교를 앞두고 졸업하는 야구부 학생들은 이제 곧 사라질 서울 교정의 마운드에 올라 기념 사진을 찍었다. 그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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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학생의 송사(送辭)에 이은 시마다 고등학교의 마지막 졸업생, 마나미의 답사는 명문(名文)이다. 가늘게 떨리고 있지만 단호함도 느껴지는 목소리. 졸업을 앞둔 한국의 각급 학교 졸업생들에게, 그리고 과거에 졸업생이었던 나에게, 또한 현재의 나에게도 들려주고 싶은 말이었다.
 
돌이켜보면 학교에서 보낸 3년이라는 시간은 정말 찰나와도 같았습니다.
이 자리에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정말 여러가지로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즐거웠던 일 그리고 슬펐던 일, 그 모든 날이 마치 어제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많은 추억이 담긴 이 학교도 내일부터 철거를 시작한다고 합니다.

저희에게는 학교가 세상의 전부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런 학교가 곧 사라질 거라니 지금도 믿을 수 없습니다.
마음 어딘가에서는 졸업한 뒤에도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바람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을 겁니다.

우리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겠습니다.
매일 함께 지내던 친구도, 항상 친절하게 지도해 주신 선생님도 없는 세계.
하지만 가능성이 넘치고 새로운 만남과 이별이 기다리고 있을 세계.
새로운 세계로 한걸음씩 나아가는 저희를 부디 따뜻하게 지켜봐 주세요.


박완서 선생은 단편 ‘그 남자의 집’에서 ‘졸업식 날 아무리 서럽게 우는 아이도 학교에 그냥 남아 있고 싶어 우는 건 아니다’라고 꿰뚫어봤다. 하지만 누구나 몸은 학교를 떠나더라도 마음만은 얼마만큼 그곳에 남겨두고 온다. 그리고 가끔씩 그곳을 되돌아본다. 사람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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