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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삐걱'거리는 미국의 민주주의…다수결의 역설

[월드리포트] '삐걱'거리는 미국의 민주주의…다수결의 역설
요즘 미국 내 최대 관심사는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충돌입니다. 바이든 대통령을 비롯해 국무장관과 국방장관 등 주요 부처 장관들도 휴일 없이 바삐 움직이고 있습니다. 미국이 이스라엘 문제에 이토록 발벗고 나서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역사적, 지정학적, 국내 정치적 요소에 더해 이른바 민주적 가치 공유에 대한 유대감도 깔려 있습니다. 중동 지역에서 미국의 가치 이념인 민주주의를 제대로 시행하는 사실상 유일한 나라인 이스라엘이 미국 입장에선 남다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3권 분립을 탄생시킨 '민주주의의 나라' 미국이 심상치 않습니다. 2백 년 넘게 유지해온 민주주의 제도 자체가 삐걱거리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대의제, 그 중에서도 의회입니다. 아시다시피 미국은 상원과 하원으로 이뤄진 양원제 국가입니다. 상원은 주 별로 2명씩, 50개 주에서 뽑은 100명의 의원들로 구성됩니다. 반면 하원은 전체 435명이 각 주의 인구 수에 따라 선출됩니다. 운영 방식도 달라서 상원은 다수당과 소수당의 협상이 큰 역할을 하는 데 반해, 하원은 다수당의 뜻에 따라 사실상 거의 모든 의사결정이 이뤄집니다.

소수에 끌려 다니는 다수

미국의회

상원이 연방제적 특징을 반영한 제도라면 하원은 대의제 본연에 충실한 시스템입니다. 대의제는 다수의 뜻에 따른 의사 결정이 기본입니다. '다수의 횡포'라는 말로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모든 일에 만장일치를 기대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니 만큼 '차선의 제도'인 셈입니다. 그런데 최근 미국 하원의 모습은 이런 제도가 무색할 지경입니다. 다수가 소수에게 끌려 다니는 모습이 연일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234년 미국 의회 역사에서 최초로 해임된 매카시 전 하원 의장이 대표적입니다. 매카시는 지난 1월 의장 선출 때부터 20명이 채 안되는 강경파들의 반대로 곤욕을 치렀습니다. 15번 투표 끝에 어렵사리 의장에 선출됐지만 하원 운영을 위한 핵심 상임위를 사실상 강경파에 내준 건 물론, 강경파 심기를 건드릴 경우 해임안이 상정될 수 있도록 규칙까지 양보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연방 정부 셧다운을 3시간 앞두고 통과시킨 임시 예산안이 빌미가 돼 실제 해임 당하는 굴욕을 당했습니다.

매카시 해임 후 다수당인 공화당은 차기 의장 후보를 선출했습니다. 당내 2인자인 스티브 스컬리스 원내대표와 짐 조던 법사위원장이 맞붙었는데, 트럼프 전 대통령의 지지 선언에도 불구하고 하원 공화당 다수는 스컬리스를 선택했습니다. 두 후보 모두 보수 색채가 강한 정치인이지만 스컬리스가 공화당 주류에 가까운 반면, 조던은 프리덤 코커스 창립 멤버로 강경파에 속하는 대표적 인물입니다.

하지만 스컬리스는 승리 후 불과 하루 만에 후보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의장에 선출되려면 본회의에서 과반 득표를 해야 하는데 433명 전원(정원은 435명이나 현재 민주, 공화 각 1명씩 공석입니다)이 투표에 참석한다고 가정할 경우 217표를 얻어야 합니다. 다수당인 공화당 의원은 모두 221명. 경선에서 이긴 후보에게 표를 던진다면 무난히 당선되겠지만 문제는 그렇지가 않다는 겁니다. 113표를 얻어 경선에서 승리한 스컬리스가 나머지 의원들을 상대로 설득전을 벌였지만 12명이 공개 반대했고 217표를 얻는 게 어려워지자 스스로 사퇴를 선택했습니다.

이후 강경파인 짐 조던 법사위원장이 후보로 선출됐지만 이번에는 무려 80명 이상이 다른 의원에게 표를 던졌습니다. 본회의에서 조던 위원장을 지지할지 묻는 투표에서도 50명 넘는 의원들이 반대표를 찍었습니다. 강경파에 반발한 주류 의원 일부가 들고 일어난 셈입니다. 이들이 본회의에서 강경파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당 후보를 계속 망신시킬 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본회의 투표는 요식행위에 그쳤던 예전 같은 모습은 기대하기 어려울 걸로 보입니다.
 

임시 예산안 처리에도…매카시 저버린 민주당 왜?

케빈 매카시 전 하원의장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 매카시 전 하원의장

매카시 해임 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궁금했던 건 왜 민주당이 매카시를 도와주지 않았느냐 하는 점이었습니다. 연방정부 셧다운을 막기 위해 그가 정치 생명을 걸고 임시 예산안을 통과시켰고 이 때 많은 민주당 의원들 역시 그의 예산안에 찬성표를 던져 놓고도 정작 해임안 투표 때 단 한 명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는 점 때문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먼저 하원의 정치 문화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상원과 달리 하원은 다수당이 거의 일방적으로 운영합니다. 따라서 소수당과 타협한다는 것 자체가 미국적 관점에서는 생소하다는 게 현지 정치 전문가의 설명입니다. 상원에서는 다수당과 소수당 간에 협상이 빈번하지만, 하원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다수당 내에서 정하면 그게 곧 하원의 안이 되고 소수당은 이에 반대하는 게 일종의 관행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매카시 전 의장이 해임 결의안을 막기 위해 민주당 의원들을 상대로 구명 작업을 벌인 적이 없다는 점도 원인으로 거론됩니다. 공개적으로 민주당의 도움을 구한 적도 없고 물밑에서도 그런 작업을 하지 않은 걸로 알려졌습니다. 민주당 입장에서는 도와달라고 손도 내밀지 않은 상대당 출신 의장을 굳이 나서 구해줄 이유가 있었을까요? 또 상대당의 자중지란이 결코 나쁘지 않은 정치적 이유도 있었던 걸로 보입니다. 반면, 매카시 입장에선 공화당 서열 1위인 자신이 상대당 의원들에게 구명을 위해 손을 내민다는 것 자체가 미국의 정치 문화상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겁니다.
 

다수결이 낳은 역설


미국 하원의 이런 독특한 정치 문화와 당내 경선에 승복하지 않는 공화당 내 불복 계속되면서 미국 하원은 사실상 마비 상태가 됐습니다. 국가 권력 3위인 하원 의장 부재로 하원이 멈춰서면서 미국 정부도 비상이 걸렸습니다. 당장 다음 달 중순이면 임시 예산안이 종료되면 연방 정부 기능이 일시 정지될 판인 데다, 하마스 공격으로 발등의 불이 된 이스라엘 지원과 겨울을 앞두고 중요한 시기를 맞은 우크라이나 전쟁 지원 예산 처리도 시급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태의 배경으로 공화당 소수 강경파가 가장 큰 비난을 받고 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승자 독식에 기반한 하원의 운영 방식이 가장 큰 원인이기도 합니다. 의석 수 차이가 클 경우 일부 강경파가 반대표를 던진다 해도 다수당 주류의 뜻에 따라 운영될 수 있지만 지금처럼 여야 간 차이가 9석에 불과할 경우 구조적으로 당내 소수 강경파의 입김에 휘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의 기본 중 하나는 '다수결'입니다. 현재 하원의 시스템이 그런 '다수결'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수결은 의사결정의 방법으로 만장일치가 어려울 때 하는 차선의 방법입니다. 합의나 숙의가 아닌 다수결에 의한 현재의 미국의 하원 운영 방식이 오히려 다수가 소수에 끌려 다니는 역설적 상황을 만든 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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