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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19일간 황선홍호를 지켜보며…이 세상에 당연한 우승은 없다

황선홍 감독 (사진=연합뉴스)
결승전을 앞두고, 하얀 셔츠를 깨끗이 세탁해 정갈히 다리며 승리를 기원했습니다. 황선홍 감독에게 받은 영향입니다. 현역 시절, 그는 경기 전날이면 유니폼을 곱게 다려 머리맡에 두고 잤다고 합니다. 땀과 흙으로 얼룩질 운동복을 깨끗이 다려 입었던 이유를 물었을 때, 그는 "그저 정성을 다하는 거지"라고 웃으며 답했습니다.

최전방 공격수였던 황선홍은 유독 실패가 많았습니다. 스트라이커의 숙명이겠죠. 3전 전패로 끝난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을 시작으로 선수 황선홍은 환호보단 비판에 익숙했습니다. 1994년 미국월드컵 독일전에서 골을 넣고도 기뻐하지 못했던 건, 앞선 숱한 실패들 때문이었을 겁니다. 반복된 실패 속에 선택지가 많지 않았습니다. '최선'은 당연했고, 기댈 곳은 '정성' 그리고 '신중' 뿐이었겠지요.
지난 6월, 중국과 평가전을 마친 후 황선홍 감독

이번 대회를 앞두고 황선홍 감독을 향한 여론은 좋지 않았습니다. 지난 6월, 중국과 평가전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엄원상, 고영준, 조영욱 등 핵심 선수들이 중국의 거친 플레이에 잇따라 쓰러졌습니다. 그럼에도 감독이 심판에게 항의 한 번 크게 하지 않자 팬들은 분노했습니다. 기자가 지적하자 한숨을 쉬며 답했습니다. "나라고 왜 화가 안 났겠어요? 그럴 때 흥분해서 결과가 좋았던 적이 없어."

이번 대회기간, 그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신중했습니다. 공식 기자회견장에서 질문이 나오면, 통역이 진행되는 동안 꼼꼼히 메모한 뒤, 정제된 말만 전했습니다. 쿠웨이트전 대승 후엔 "빨리 잊어버리고 다음 경기에 집중해야 한다"고 했고, 연일 대승을 거두면서도 "매 경기 크게 이길 수는 없다"며 흐트러짐을 경계했습니다.

언론에만 그랬던 게 아닙니다. 팀 관계자들에 따르면 황 감독은 이번 대회 기간, 선수단 회의에서도 깎고 또 깎아서 꼭 해야 할 말만 강조했다고 합니다. 여기엔 감독 선임 당시, 김판곤 국가대표팀 감독선임위원장의 조언도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김 위원장은 "솔직히 우리 지도자의 역량이 외국인 감독들보다 떨어지지 않는다"면서도 "차이가 있다면 외국인 지도자는 선수들을 동등한 위치에서 존중하지만, 우리 지도자들은 선수들을 후배로 대한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황 감독은 이미 프로 무대에서 충분한 경험을 쌓은 선수들을 20대 초반의 '어린' 후배로 대하지 않고, 나라를 대표하는 선수로서 존중했습니다. 지난 2일, A대표팀 명단이 발표되자 훈련에 앞서 해당 선수들을 축하한 모습도 눈길을 끌었습니다.
FC 서울 시절, 황선홍 감독과 갈등을 빚었던 데얀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공교롭게도, 대회 직전 FC서울에서 황선홍 감독과 갈등을 빚었던 데얀의 '저격'이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데얀은 황 감독에 대해 "축구적으로 아이디어가 좋았지만 선수단 관리 능력이 빵점이었다"고 혹평했습니다. 황 감독은 과거 K리그 사령탑 시절, 철저한 선수단 관리로 유명했습니다. '원칙'을 강조하며 '예외'를 두지 않았습니다. "너무 선수들을 잡는 거 아니냐"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선수들 입장에서 고통스러운 걸 안다. 하지만 그 고비만 넘으면 승리가 있다. 그렇게 성장의 기쁨을 선수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면서도 "너무 내 입장에서만 생각했던 부분은 반성한다"고 했습니다.

반복된 실패의 경험 때문인지, 그는 반성하고, 고치는 데 익숙해 보였습니다. 부산 사령탑 시절 강압적인 지도 스타일을 포항에선 완화했고, 서울에서 외국인, 베테랑 선수들과 불화를 겪은 뒤엔 비슷한 잡음은 줄었습니다.

이번 대회를 앞두고, 황 감독에게 전화가 한통 왔습니다. "이 기자, 다음 주 시간 돼?" 5년 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을 현장에서 취재했던 기자에게 황 감독은 여러 가지를 묻고 확인했습니다. 기자가 알고 있는 정보는 대부분 공개된 것이어서 특별할 것이 없음에도 "지금 나는 금메달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할 준비가 돼 있다"며 한 마디 한 마디를 꼼꼼히 기록했습니다.
헹가래 받는 황선홍 감독 (사진=연합뉴스)

황선홍 감독은 2003년 은퇴 기자회견에서 "대표팀 감독을 꼭 해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2년 전 이 팀을 맡게 됐을 때, 다시 자신의 말을 떠올리며 "이 자리까지 오는데 20여 년이 걸린 것 같다"며 "정말 모든 걸 걸고 매진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어떤 축구인 후배는 '이 멤버로 우승하지 못하면 옷 벗어야 한다'고 일갈했지만 이 세상에 당연한 우승은 없습니다. 한 경기 한 경기에 정성과 신중을 다해 아시안게임 남자 축구 사상 처음으로 3회 연속 우승을 달성한 황선홍 감독과 선수들에게 찬사를 보냅니다.

(덧붙이는 글)
대회 기간 내내 신중하기만 했던 황 감독이 유독 자신감을 보였던 적이 있습니다. 이번 대회 첫 고비로 평가됐던 중국과 8강전을 앞뒀을 때입니다. 최종 훈련장에 이례적으로 CCTV가 설치돼 있는 것을 기자가 확인하고 묻자 "얼마든지 보라고 해"라며 웃으며 "내일 재밌는 경기 할거야"라고 답했습니다. 그 순간, 이 팀이 우승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습니다.
▶영상 :  오늘 밤 중국과 8강전…홈 텃세 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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