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북적북적]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북적북적]

[골룸] 북적북적 395: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모든 것이 내 안에 있다.

혹시 S.E.S의 [달리기]라는 노래를 들어보셨습니까? 그리 유명한 곡은 아니지 않나, 혼자 멋대로 짐작하고 있었는데, 오늘의 [북적북적]을 녹음하면서 주변에 물어보니 대부분 아는 노래라고 대답하더라고요. 그래도 혹시나 해서 가사 일부를 옮겨봅니다.
 
지겨운가요. 힘든가요. 숨이 턱까지 찼나요.
할 수 없죠, 어차피 시작해 버린 것을.
쏟아지는 햇살 속에 입이 바싹 말라와도
할 수 없죠, 창피하게 멈춰 설 순 없으니.
단 한 가지 약속은 틀림없이 끝이 있다는 것.
끝난 뒤엔 지겨울 만큼 오랫동안 쉴 수 있다는 것.

이유도 없이 가끔은 눈물나게 억울하겠죠.
일등 아닌 '보통'들에겐 박수조차 남의 일인 걸.
단 한 가지 약속은 틀림없이 끝이 있다는 것.
끝난 뒤엔 지겨울 만큼 오랫동안 쉴 수 있다는 것.

원곡은 윤상의 것이었다는 걸 저도 이번에 알게 됐지만, 아무튼 저는 S.E.S의 노래로 처음 접했습니다. 평소처럼 화사하고 아름답되, 이 곡에서는 유달리 담담한 톤이 느껴지는 S.E.S.의 목소리에 아주 잘 어울리기도 하고요. 가사를 옮겨 적다 보니, 새삼 '요정 같은 아이돌'이 내놓은 오리지널 곡이라기엔 너무 대범한 선택이었겠다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대뜸 '지겨운가요'로 시작하는 노랫말이라니요.

저는 출근 시간이 꽤 빠른 편입니다. 아직 동이 트기 전 까만 새벽 출근길 차를 달리며 종종 이 노래를 올려놓게 됩니다. 아직 어둡다고는 하지만, 새벽마다 느끼는 것은 이미 이 시간에 하루를 시작한 지 한참 지난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낮 시간에는 서울 시내에서 잘 보이지 않는 대형 트럭들을 비롯해서, 아마도 장거리를 달려야 하는 듯 고속도로로 바삐 들어서는 차들이 이미 그 어둑한 진입로에서 정체를 겪기 시작하는 모습까지 종종 봅니다. "지겹고, 힘들고, 숨이 턱에 찼다"고 느끼면서도 새벽길을 열심히 달리는 많은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참 묘한 노래이고, 들을수록 명곡입니다. 유일하게 건네는 위로라고는 '당신도 언젠가는 죽는다, 틀림없이 쉬게 되는 끝이 저 앞에 있다'는 일깨움 뿐입니다. 열심히 달리면 1등이 될 수 있다고, 아니 등수가 좀 올라갈 수 있다고조차 말해주지 않습니다. 1등에게 쏟아지는 박수를 뒤에서 바라보며 달리는 '보통'일지라도, 어차피 시작해 버린 달리기를 그만두는 것은 '창피한 일'이지 않느냐고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도대체 이걸 위로나 응원이라고 볼 수 있는 건지, 하다 못해 격려라는 이름이라도 붙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 숨이 턱에 찬다고 느껴질 때, 이보다 더 마음 깊이 스며드는 '지지'를 전해주는 노래를 아직 달리 찾지 못했습니다.

사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이 힘듦에 오로지 한 가지 기약된 보상이라고는 '죽음' 뿐입니다. 그렇지만 달립니다. 그래서 달립니다. 기왕 시작된 인생이란 달리기. 걷는 것은 창피합니다. 숨이 턱에 차 와도, 입이 바싹 말라온다고 해도 말입니다. 이보다 우리 삶에 더 진솔한 '응원가'는 사실 존재할 수 없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젊은 날에 산을 올라야 한다. 젊음은 그 자체가 거대한 산이기도 하다. 그 산이 평지가 되기 전에 최선을 다해 올라야 한다. 젊은 시절에 자신의 산을 오른 자는 늙어서 산의 풍성함을 맛보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산에 오르기를 꿈꾼다. 어떤 사람은 그 열망이 지나쳐 병이 되기도 한다. 산을 오르기란 사실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단지 올바른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실패하기도 한다.

성공에 집착하는 사람일수록 타인의 성공을 시기한다. 시기 끝에 헛소문을 퍼뜨리고 중상모략을 시작한다. 이런 방법으로는 절대로 그보다 빨리 산 정상에 도달하지 못한다. 자기 능력과 체력을 고려하지 않고 단숨에 뛰어오르려는 사람도 성공하지 못한다. 일시적으로 남보다 빠를지 모른다 시간이 지날수록 뒤처진다.

산에 오르고 싶다면 남을 떠밀어서도 안 되고, 자기 능력보다 무리해서도 안 된다. 정상을 바라보며 한눈팔지 말고 묵묵히 걸음을 옮겨야 한다. 너무나 평범한 방법이지만, 이것이 산을 무사히 정복하는 최고의 방법이다.

오늘의 책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늦었습니다. [북적북적]에서 이 주말에 함께 읽는 책은 포레스트북스가 펴낸 쇼펜하우어 잠언집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입니다. 김욱 님이 편역했습니다.

쇼펜하우어의 이름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도 없겠지만,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그의 말과 글들을 제대로 직접 접해본 사람은 더더욱 없는 편입니다. 그에 대해서 대중적으론 막연한 '이미지'들이 남아 있는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무섭게 생긴 노인. 염세주의 철학자. 비관론자. 여성들한테 지독하게 인기가 없었고, 그 이상으로 여성들을 싫어한 남성. 매일 죽는 게 사는 것보다 낫다고 떠들더니, 정작 전염병이 돌자 제일 먼저 도망간 사람. 폭행범 전과자. 중2병 환자들, 과대망상가들이 유독 열광하는 사상가.

이 모든 '이미지'들 속에 쇼펜하우어의 실제 삶이 녹아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곱씹어 볼수록 유독 강퍅하고 외로웠던 '은따 노인' 쇼펜하우어가 세상에 내놓고 떠난 관점과 인식들은 이미 우리가 접하는 많은 예술작품들과 '상식적인 진리' 속에 짐작하시는 것 이상으로 많이 녹아 들어 있어 여전히 큰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서 소개드린 노래 [달리기]야말로 바로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야 할 작품 중에 하나입니다. [달리기]는 제가 알고 있는 우리 대중가요들 중에서 가장 '쇼펜하우어'를 서정적이면서도 명징하게 구현하고 있는 노래입니다. '쇼펜하우어'라는 이름에 고리타분한 철학서일까, 재미없지 않을까, 막연하게 거리감을 느끼신다면, 일단 S.E.S.의 노래 [달리기]는 좋아하시는지 묻고 싶습니다. [달리기]를 좋아하신다면, 이 노래에 마음이 움직이신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쇼펜하우어를 만나보고 싶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는 쇼펜하우어의 사상 세계를 처음으로 직접 만나보기에 그야말로 최적의 책입니다.
 
인간의 정신이 오늘날과 같이 우울해진 근본적인 원인은 기술의 발달 때문이다. 인간의 육체를 위해 기술이 발달할수록 인간의 정신이 우울해지는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기술은 인간의 정신을 나약하게 만든다. 기술과 산업이 발달할수록 인간의 삶은 외형적으로 더욱 편리해지지만, 안락한 삶에 도취된 인간은 눈앞에 어떤 문제가 나타났을 때 이성적 고뇌로 치열하게 싸워 극복하기보다는 이미 만들어진 도구를 사서 해결하려 한다.

현대의 우울함이 두려운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특별한 증세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울의 덫에 빠져도 육체적으로는 힘든 일이 없다. 기술이 문명을 뒷받침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울을 핑계로 얼마든지 나태해져도 그 게으름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또 우울하다는 변명으로 얼마든지 무감각해지는 것도 가능하다. 기분이 우울해서 타인의 고통에 신경 쓸 여력이 없다고 한마디 툭 던짐으로써 간편하게 면죄부를 행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우울함에 취해 있다간 얼마 지나지 않아 판단력이 흐려질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불감증이며, 이 단계에서는 사회적 인습 전반에 무기력해져 자기 생각과 감정만이 유일하게 옳다는 망상에 빠지게 된다.

이 세상에서 나만 외롭고, 나만 힘들고, 나만 피곤하고, 나만 희생당한다는 망령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이 책을 처음 집어든 것은 제목 때문이었습니다. 이 물음을 쓰고 다듬은 사람의 삶이 녹진하게 스며든, 그 시간이 성큼 느껴지는 제목입니다. 우리가 각자의 시간들 속에서 분투하다가, 이렇게 그 시간을 압축해서 가만히 내놓을 줄 아는 누군가들의 손짓으로 서로 만나게 되는 거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는 지난 6월 말에 출간됐습니다. 사실 새로울 것이 없다고 느껴질 만한 150년 전 철학자의 잠언집이 지난 3개월 동안 야금야금 베스트셀러의 범주 안까지 들어와 있습니다. 일단 책을 참 예쁘게 만들었고, 저를 포함해 많은 이들이 집어들지 않을 수 없을 제목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어렵다고 소문난 쇼펜하우어의 글들을 친절하고 정갈한 요즘 언어로 다듬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포장'도 이 철학자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장 제대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사랑하고 공들여 쇼펜하우어의 글을 곱씹어온 사람들만이 이토록 쉽고 깔끔하게 풀어 우리에게도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편역자 김욱 님이 책머리에 붙인 글은 쇼펜하우어에 입문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하기에 안성맞춤입니다.

편역자와 출판사, 여러 사람들이 왜 이토록 마음과 시간을 모아 이 괴팍한 '은따 노인'이 남긴 말들을 한 줄, 두 줄 읽어봐 주십사 손을 내미는 것일까요. 북적북적에서 함께 들어보시고, 혹시 마음에 와 닿아 직접 책을 펼쳐봐 주신다면, 정말 기쁠 것 같습니다. 일단 한 번 이 책을 펼치게 되면, 두고두고 곁에 두고 싶어질 것입니다. 내 인생에 보내지는 가장 강력한 지지를 곧 만나게 되실 것입니다.
 
이 세상에 나 이상의 존재는 없다. 신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신의 문제고, 내가 존재한다는 건 오직 나만의 문제다. 나는 이 세상에 있고 싶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점이다. 쓸데없는 말로 그것이 나의 존재라고 설득당하고 싶지 않다.
 
옳고 그름 따윈 없다. 다수는 그저 많은 숫자일 뿐, 많다고 정의가 되는 건 아니다. 적음을 무능력하다는 편견으로 뒤집어씌우는 것에 반대한다. 윽박질러도 따라가지 않겠다. 그것이 '도덕!'이라고 외쳐도 듣지 않겠다. 여기가 내 한계라고 한다면, 한계라는 사물을 결정하는 건 오직 나의 인식 뿐이라고 가르쳐 줄 테다.

나는 내가 모르는 것을 안다고 말하지 않겠다. 물론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모를 것도 없다. 인간은 결국 자기 자신만을 체험할 뿐이니까.

그러므로 나는 말하겠다. 나는 인간이 아니다. 나는 함정이다. 나는 괴물이고 파괴자다. 온 세상이 인정하는 명제들이 나를 만나 무너지는 것을 본다. 나는 역사의 훼방꾼이며, 다른 사람이 책 한 권으로 말해야 하는 것들을 나는 열 개의 문장으로 설명해 줄 것이다. 다른 사람이 말하지 않는 진실을 나는 한 권의 책으로 무한히 써내려갈 것이다. 나는 한 가지 사실만 잊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인생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평가, 새로운 개연성이 필요하다는 것! 이 모든 것이 내 안에 있다.

이제 1년 중 가장 아름답고 청명한 하늘과 반짝이는 대기가 아주 짧게 우리 곁에 머물다가 지나갈 것입니다. 앞으로 며칠, 또는 몇 주 정도 우리를 감쌀 것입니다. 어떤 주말을 맞고 계시든, 이 가을을, 이 찰나의 아름다움을 듬뿍 즐기시는 시간이 있길 바라봅니다. 그때, 혹시 [북적북적]이 함께 하고 있다면 더없는 영광이겠습니다. 들어주시는 모든 분들, 늘 깊이 감사드립니다.

*포레스트북스의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 <골룸: 골라듣는 뉴스룸> 팟캐스트는 '팟빵', '네이버 오디오클립', '애플 팟캐스트'에서도 들을 수 있습니다.
- '팟빵' 접속하기
- '네이버 오디오클립' 접속하기
- '애플 팟캐스트'로 접속하기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